간첩, 첩보원 등으로도 불리는 ‘스파이’의 사전적 의미는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이다. ‘비밀’ ‘몰래’ ‘경쟁’ ‘대립’ 등 여기 사용된 어휘만 봐도 스파이란 것이 얼마나 치열한 긴장과 갈등,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한 직종인지 감이 온다. 이런 일을 실제로 수행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위험한 일일 테지만, 역으로 긴장과 갈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드라마 장르에서 스파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일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장르 특히 첩보와 액션물에서 스파이는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캐릭터 중 하나다. ‘제임스 본드’라는 전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며 20세기 첩보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007 시리즈’부터 테마곡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대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2000년대의 새로운 액션 패러다임을 제시한 ‘제이슨 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들 시리즈는 속편에 속편을 거듭하면서도 흥행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다. 본격적인 액션 장르를 넘어 <오스틴 파워>나 <미녀 삼총사> 같은 코미디 장르,
비범한 능력과 성적 매력의 종결자
대체 무엇이 이토록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로 하여금 ‘스파이’란 소재에 매달리게 하는 걸까. 일단 스파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거나 위장한 채, 적(혹은 단체)에 접근해 비밀을 빼내 오는 과정은 그 자체로 스릴 넘치는 긴장으로 가득해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진짜 신분을 감추거나 숨긴 채 만났던 인물들이 나중에 정체를 드러내는 구조 역시 극적인 재미를 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드라마적 요소와 함께 ‘스파이’라는 캐릭터 역시 그 자체로 극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존재다. 비밀 업무에 종사한다는 신비감과 함께, 고도로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그들은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체력과 정보력, 상황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초인적인 기술들은 대부분의 스파이 캐릭터들을 ‘초능력을 쓰지 않는 영웅’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상대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상, 스파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신체적, 성적 매력을 극대화시키곤 한다. 상대(특히 이성)를 유혹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 역시 스파이의 능력 중 하나이므로, 대부분의 스파이들은 멋지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매우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안다. 그래서 이쪽 장르에서는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스파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모든 본드걸들을 부드러운 여자로 무장 해제시키는 제임스 본드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을 매혹시킨 마타 하리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섹슈얼한 이미지와 매력 역시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탈이념의 시대를 살아가는 스파이들
흥미로운 것은 시대적인 흐름의 변화 속에서 스파이 장르의 대결 구도나 캐릭터의 형태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념적 갈등이 팽배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시대에 스파이는 그 누구보다 선명한 이념과 신념을 지닌 애국자들이었다. 목숨을 담보 삼아 적국에 침입한 뒤 정보를 캐내고 요인을 암살하는 스파이들의 행동은 그 자체로 정의로움의 상징이었고, 그의 상대는 어느 나라가 되었든 간에 ‘악의 축’으로 비쳤다. 인물 그룹은 선과 악의 구도로 매우 분명하게 나뉘었고, 이야기는 많은 굴곡 끝에 언제나 주인공 스파이가 활동하는 ‘우리 편’의 승리로 끝나곤 했다.
이러한 선명한 선악의 대립 구도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무너지게 된다. 이념의 시대에서 탈이념의 시대로, 그리고 점차 국가의 경계가 없어지는 글로벌 시대로 접어들면서 예전처럼 스파이들이 한 나라, 하나의 조직에 이념적으로 소속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어졌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스파이들이 대면하게 된 ‘적’들의 양상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냉전시대 언제나 소련의 편에 있던 적들은 소비에트 붕괴 이후 동유럽이나 중공 등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나라로 치환되었고, 이후 아랍과 이슬람권으로 옮겨갔으며 이제는 아예 이념과 국가를 떠난 다국적 범죄 조직이나 사이비 종교 단체로 바뀌거나, 심지어는 내부의 적이나 개인적인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간첩 영화들
‘스파이’ 장르의 기본적인 전제가 서로 적대하는 진영과 비밀스런 업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은 분명 매력적인 스파이 장르의 무대가 될 만한 지역이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두 나라가 붙어있는 곳이고,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서로 왕래가 금지된 곳이니 스파이들이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김수임 간첩 사건을 비롯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간첩 사건들도 종종 일어났고, 이를 소재로 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역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의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며 가장 널리 알려진 첩보 영화로는 <쉬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상당한 스케일 속에서 분단 현실의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념과 국적의 성격이 사라지는 스파이물의 전 세계적인 경향은 한국 영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쉬리>에서 숨 막히던 남북 대립에 집중되어 있던 극적 갈등은 <이중간첩> <간첩 리철진> 등을 거치며 외부 상황보다 개인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생활 밀착형 첩보물을 표방한 <간첩>, 김수현의 반전 매력을 부각시킨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 처럼 ‘간첩’이란 특수한 상황을 블랙코미디나 일상의 사유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외국 작품이든 한국 작품이든 스파이들이 대항하는 ‘적’의 양상이 변하면서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이제 ‘적’이 누구인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적이 누구고,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런 것보다 우리의 주인공이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대응하는지가 더욱 흥미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어떻게’가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스파이들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스타일과 매너 등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즉 탈이념의 시대에서 스파이들은 이념적 갈등의 해소자나 영웅이 아니라, ‘폼 나는 스타일리스트’이자 ‘프로페셔널한 스페셜리스트’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매너의 사나이’ <킹스맨>이나 ‘반전 바보’의 캐릭터를 선보인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은 그러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적’이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스파이는 더욱 자신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적이 누구로 어떻게 바뀌든 간에, 비범한 능력과 매력을 뽐내며 놀라운 업무를 수행해 내는 스파이들의 매력은 여전히 빛을 발할 것이며, 이들을 소재로 하는 작품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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