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서울에 올라간 뮤지컬은 대략 200편, 어떤 작품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을까? 공연 다이어리를 들춰 올해 올라간 주요 작품에 대해 전문가분들을 모시고 좌담을 나누었다. 좌담에는 조용신 뮤지컬 칼럼니스트 및 연출가,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정수연 평론가 및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박병성 본지 편집장이 참여했다.
창작산실 작품들
박병성 올해 대략 200편의 뮤지컬이 올라갔는데, 창작뮤지컬의 비중이 높았다. 특히 연초에는 창작산실 작품들이 창작뮤지컬 붐을 주도했다. 그중 <곤, 더 버스커>, <달빛요정과 소녀>, <파리넬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이하 <너빛속>)가 올해 재공연을 이어갔고 관객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조용신 <곤, 더 버스커>와 <달빛요정과 소녀>, 연말에 올라간 <고래고래>는 콘서트형 뮤지컬로 묶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뮤지컬 <오
디션>은 홍대 밴드 문화와 대학로 문화를 결합한 스테디셀러인데, <곤, 더 버스커>는 그것의 연장선이라고 본다. 방송계 이야기를 넣어 상업적인 음악과 인디 음악의 대립을 극적 갈등으로 삼았다. 음악적인 장점이 있었지만 드라마와 무대가 아쉬웠다. <달빛요정과 소녀>의 경우 홍대 인디밴드 음악이 주크박스 뮤지컬 형태로 대학로에 진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 드라마 구성은 허술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음악에 진정성이 있었다. 특히 故이진원의 음악에서 삶에 대한 감동이 느껴졌다. <고래고래>는 앞선 요소들이 상업화된 작품으로 김신의가 작곡한 노래에서 인디 정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밴드를 ‘연기하고’ 있었다. 밴드 뮤지컬의 계보에서 보면 <오디션>이나 <곤, 더 버스커>에서 완성도는 후퇴했다. 하지만 인기 있는 배우들이 출연해 밴드 음악을 즐겼다는 것, 대극장에서 객석을 붐업시키며 교감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고희경 창작뮤지컬은 대본 중심의 작품이 많았는데 음악 중심의 창작이 나왔다는 것이 반갑다. 그런데 이런 형식이 흥행이 되니까 상업적으로 가면서 음악의 진정성을 놓치는 것 같아 아쉽다.
정수연 <곤, 더 버스커>나 <달빛요정과 소녀>가 결국 <고래고래>로 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관객에게 어필하는 것은 배우다. 작품이 지닌 빈약한 가능성을 꽃피우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방식에 대한 우려가 훨씬 크다.
고희경 지금 모든 공연은 퍼포먼스만 남고 작품은 남지 않는다.
조용신 뮤지컬에서 배우의 퍼포먼스가 중요한데 산업화가 될수록 필요한 것이 대본과 음악이다. 그것이 안정적으로 세팅이 되어야 배우가 바뀌어도 작품의 퀄리티가 유지되며 장기 공연을 할 수 있다. 이런 세태에서는 배우들이 바뀌면 다른 작품이 될 것이다.
박병성 세 작품이 노래 중심으로 가다 보니 스토리나 드라마 구성이 허술하긴 했다. 그런데 그 양상은 다양했다. <곤, 더 버스커>는 버스커들과 상업 방송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단순화해 메시지는 명확했다. 단지 세련되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 <달빛요정과 소녀>는 음악이 지닌 정서나 메시지를 위해 모든 것이 희생한 구조였다. 기존 노래에 의존한 드라마 구성이었는데 그래서 효과적이었다. 이 노래의 의미를 이보다 더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래고래>는 1막이 한 시간 반을 했는데 전혀 드라마 전개가 안 되더라. 애드리브 같은 대사가 너무 많고 장면 장면을 즐기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조용신 <달빛요정과 소녀>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이진원의 작업을 기리는 일종의 트리뷰트 뮤지컬을 만들려고 한 결과물이다. 그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 환경, 청년이 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보듬어주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 주제 의식이 명확했고 상업 제작사가 아닌 극단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박병성 창작산실의 또 다른 작품인 <파리넬리>는 어떻게 보았나?
고희경 <파리넬리>에서 ‘울게하소서’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루이스 초이는 신의 한 수였다. 그런 음악과 캐스팅을 했다는 것은 시장 확대 측면에서 평가할 만하다. 음악으로 승부를 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정수연 그것 외에 창작한 음악은 별로 들을 게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 노래와 편차가 너무 심하니까 이 작품의 음악을 지지해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
고희경 뮤지컬은 노래 한 곡으로 모든 것을 무마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에서는 그 뮤지컬 넘버가 창작이 아니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 노래를 변주하고 합창하고 오케스트라를 쓰면서, 그래도 음악을 남겼다.
박병성 카운터테너가 부르는 ‘울게하소서’를 경험한다는 것 외에 드라마 구조도 그렇고 다른 노래의 수준도 미흡했다. 그런데도 마니아들이 열광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런 반응을 일으켰을까.
조용신 루이스 초이라는 뮤지컬계가 아닌 분야의 인물을 뮤지컬계에 끌어들여서 그가 신 나게 공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워크숍부터 같이했다고 하더라. 연기를 최소화한다거나 해서 그의 단점을 보완하려 했다. 합창단을 무대 뒤에 올리는 선택은 시각적으로 부담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은데 관객의 입장에서 프로덕션이 음악을 배려한다는 이미지를 주었다. 리카르도나 안젤로 등 가공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는데, 거세된 중성 캐릭터인 파리넬리와 안젤로는 일반적인 남녀 연인의 느낌과는 달랐다. 또한 리카르도 형과의 브로맨스가 있다. 이러한 젠더 이슈를 통해 새로운 성적 긴장감을 주고 이런 구도에 익숙한 마니아들을 타깃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수연 파리넬리와 리카르도, 안젤로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겠는데 설정에 그쳤을 뿐 드라마적으로 진전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박병성 <너빛속>은 어떻게 보았나?
조용신 <너빛속>은 소재가 특별했던 것 같다. 특히 익숙한 실존 인물들을 캐릭터로 가져와서 내용이 특별히 어려운 게 없었다.
고희경 앞부분은 드라마가 잘 진행되었다. 결론으로 가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는데, 현존하는 인물이 등장하다 보니까 작가가 충분히 자유롭게 다루지 못한 점이 있다.
정수연 재공연에서는 논란이 많았던 노예섬 부분을 완전히 들어내고 아버지의 부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고쳤다.
신작, 재연 창작뮤지컬
박병성 그 외 올해 올라간 창작 초연들을 살펴보자. <난쟁이들>은 공연 전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인기가 좋았는데, 이 작품을 먼저 이야기하자.
조용신 개발 단계부터 ‘끼리끼리’가 화제였다. 이 노래는 작품의 주제와 배우들이 건들거리는 동작과도 두루두루 잘 어울려서 한예종 워크숍 공연부터 반응이 컸다. B&B에서도 처음 선보인 노래가 큰 반응을 얻는 걸 보면서 잘되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제작사를 잘 만났다. 전역산 배우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그걸 제작사에서 권유했다고 한다. 워크숍에서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맡았던 해설자와 신데렐라 역을 한 배역으로 줄였는데 전역산이라는 여장이 가능한 아름다운 남자 배우가 있으니까 해결되고 오히려 장점이 됐다. 이렇게 대안을 제시하고 비용도 절감하면서도 작품이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프로듀서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박병성 익숙한 캐릭터들을 적절하게 비꼬아놓는 것도 흥미로웠다. 신데렐라를 출세욕에 눈먼 캐릭터로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상상력이 재밌었다. 그런데 마지막 이야기를 몰아가는 힘이 떨어졌던 게 한계였지 않나 싶다. 그것만 해결되면 오래 남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조용신 <로기수>는 재미있게 관람했다. 다만 양식 면에서 쇼가 주는 환상이랑 리얼리즘이 다소 거칠게 붙었다. 다큐 같은 연극을 하다가 송 앤 댄스 쇼가 붙는 부분의 이음새가 매끈하지 못했다.
고희경 끝까지 이야기 전개를 궁금하게 만들어 기대하게 했다. 긴장감도 있는데 유쾌하기도 하고 드라마 자체도 어느 정도 흥미로웠다.
정수연 이런 시대를 다루는 것치고는 작품 자체가 흥미로웠다. 아주 구체적인 시대와 구체적인 장소인데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화에서 오는 후광 효과도 있었다. 뮤지컬에서 춤이 핵심이 된다는 것도 매력이긴 한데 공연에서는 춤이 너무 허접하다. 1막 마지막에 기계로 배우를 돌게 한 장면은 너무했다.
박병성 시대적인 상황과 판타지를 넘나들어야 하는데 기계가 들어오면서 오히려 더 무대 현실이 확 들어오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조용신 <빌리 엘리어트>가 연상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왜 빌리가 춤을 출 수 없는지 사회 상황이 분명이 제시된다. 더 중요한 것은 빌리가 춤을 너무 잘 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잘하니까 드라마의 논리가 완성된다. <로기수>에서 로기수가 왜 춤을 춰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는 이는 프랜이라는 흑인 병사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발레 선생님에 비해 비중이 적고 감초 캐릭터로만 나오는데 사실 그는 다른 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대에서 춤의 기량은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로기수가 댄서가 되는 것보다 다른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없어 아쉽다. 그리고 작품 모티프가 얼굴을 가린 채 춤을 추는 한 장의 포로수용소 사진에서 비롯되어 극 중에서 얼굴을 가리는 이유가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설정을 주었는데 개인적으로 설득력이 좀 부족한 것 같다.
고희경 이 작품은 소극장 스토리가 아니다. 환상을 보여주려면 여럿이 나와서 탭댄스라도 춰야 가능한데, 소극장에서 하기는 힘들다. 주인공의 춤이라 하더라도 그 장면에는 군무가 나와 주고 탭댄스 사운드도 듣고 해야 쇼에 빠져 드는데 그 부분이 너무 약하다.
정수연 로기수의 춤도 춤이지만 프랜의 춤이 중요하다. 프랜이 매개가 되는 인물이고 춤을 소개하는데 프랜이 너무 중년 아저씨 같다. 로기수가 춤에 넘어갈 때 관객도 춤에 설득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서 모든 것이 삐걱거린 것 같다.
조용신 <무한동력>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노래도 좋고 배우들도 좋고. 특히 진기한을 연기한 유제윤의 발견. 다만 무한동력을 만드는 하숙집 주인 아저씨가 그걸 어디에 쓸 것인지 목적이 명확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과학에의 도전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가령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쓰겠다’ 즉 계급적인 갈등이 들어가면 목적의식이 커질 것 같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 사용처를 듣고 찬성을 한다거나 반대를 한다거나 하면서 인물의 개성이 드러날 텐데 과학의 성취에 있으니까 작품이 착해진 것 같다.
박병성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재미있다. 진기한, 김솔, 수동, 수자 남매가 부르는 노래도 흥미로웠다. 꿈이라는 화두를 강하게 던졌는데, 꿈은 해결이 안 되고 가족의 문제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갈등이 약하다 보니까 꿈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조용신 <로기수>가 <빌리 엘리어트>라면 <무한동력>은 <애비뉴 Q>다. <애비뉴 Q>도 대단한 스토리는 없다. 맨 마지막에 돈을 벌어서 몬스터 학교를 짓는데, 그 돈을 포르노로 번다.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결론이 있고, 표현을 인형으로 하니까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애비뉴 Q>는 트레키 몬스터가 해결해 주는 구조인데 <무한동력>에서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버지인데 너무 진지하고 목적이 불분명하다.
고희경 작가의 의도가 캐릭터를 살리는 데 중심이 되니까 길을 잃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신 세트가 미술품 같은 무대인데 원 세트로 진행되다 보니 거기서 리얼리즘으로 연기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공연 사진을 통해 그 디자인을 알고는 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만 나오는 줄 알았다.
박병성 또 다른 웹툰 원작인 <신과 함께>는 구성이나 드라마에서 허술한 점이 너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작품이 지닌 힘 때문에 재미있게 봤다.
정수연 무대와 영상에 전적으로 기댄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토리만 남겨서는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
조용신 무대가 그렇게 모던하게 잘 나오니까 동선도 해결되고 특수 효과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갑자기 현대무용으로 바뀌는 장면은 어색했다. 음악도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원작이 잘 알려진 내용이고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높아서 재밌게 봤다.
고희경 <무한동력>, <신과 함께>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뮤지컬인데 그러한 장점이 웹툰에 기대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정수연 재공연을 한다면 마지막에 ‘신과 함께’ 주제를 보여주는 노래 하나라도 바꿔주어야 할 것 같다. 원작이 있지만 그래도 무대에서 캐릭터를 살려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것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이 창작자의 능력인데 그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박병성 <아리랑>은 오랜만에 올라간 대형 창작뮤지컬이다. 애초에 이 기획을 발표했을 때 이게 가능한 미션인가 의문이었다. 고선웅 연출이 참여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는 있었다. 공연을 봤는데 ‘아리랑’이라는 소재가 주는 정서를 초지일관 유지하면서 불가능한 원작을 잘 압축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극적이긴 했지만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선전했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을 굳이 뮤지컬로 만들어야 할까 하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가 ‘아리랑’이나 ‘쑥대머리’인데, 그 장면은 살았지만 그만큼 뮤지컬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조용신 고선웅 연출이 연극계에서 해온 성과가 있다. 언론 인터뷰에 보니까 자신이 추구하는 게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더라. 그러한 소극장에서의 방식을 대극장 창작뮤지컬에 도입했다. 리얼리즘으로 풀지 않고 공연성을 확장한 연출이나 동선에서 신선한 부분이 많았다. 카이나 윤공주가 꽉 짜여진 동선 안에서 놓여지니까 그 역할이 살더라. 그런데 현재 우리 시장에서 대극장 뮤지컬로서의 상업성은 다소 부족했다.
고희경 소설 『아리랑』으로 저렇게 만들어내다니 고선웅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가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발라드로 듣는데 너무 듣기 힘들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제” 전라도 남자가 저런 식으로 말하나? 연출로서의 고선웅은 탁월했는데 뮤지컬 작가, 작사가로서의 고선웅은 아쉬움이 컸다.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는데 그 감동 코드가 수많은 여성들의 죽음과 상처에 기인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정수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여성 캐릭터이다 보니 윤공주가 빛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서사의 중심을 여성 캐릭터에 주지 않는다. 거기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하면서 결국 아리랑이 아니어도 되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고희경 쓰인 극의 주인공은 남자들인데, 여성들의 희생이 잔인할 정도로 강하게 그려진다. 결국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자들이 무한 희생할 때 사랑받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정수연 비단 <아리랑>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아리랑은 시대극이니까 그나마 그럴 수 있지만 현대극에서도 여자 캐릭터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
박병성 90년대 대작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 올해 20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고희경 지속적으로 수정해 온 작품이어서인지 업그레이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명성황후> 김소현의 재발견이었다. TV에서 주안이 엄마로서 이미지가 쌓여 있기도 했고 그를 통해 무대에서도 어머니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김소현이 노래를 잘하는 배우였지 새삼 깨닫게 해주면서, 강한 명성황후가 아니라 호소력 있는 명성황후로 거듭났다.
박병성 <형제는 용감했다> 역시 오랜만에 재공연을 했다.
고희경 대극장으로 옮겼는데 영리한 작품인 것 같다. 1막과 2막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웃겼다 울렸다 끝내는 전형적인 창작뮤지컬의 구성이다.
정수연 딱 판소리 구성인데, 그게 판소리 미학이다. 창작뮤지컬을 보면 그런 구조들이 보인다. 농담 삼아 전통의 재발견인가 하기도 하는데, 관객들도 그것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 오히려 없으면 허전해한다.
라이선스 뮤지컬
박병성 <유린타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까? 중견 배우가 무대에 서면 안정된다고 하잖나. 최정원이 그런 배우가 됐구나 싶었다. <고스트>에서도 그렇고 조역의 위치에서도 선배로서의 역할을 다하더라.
조용신 뮤지컬 창작자에게 교과서 같은 작품 중 하나다. 대본, 음악, 장면 구성이 완벽하다. 풍자, 서사극, 송앤댄스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갔다. 전문 댄서가 아니어도 창의적인 움직임으로 드라마를 표현할 수 있게 짜여져 있다. 우리나라 창작진들이 배워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작품이다. 그래서 기대하고 봤는데 올드하게 느껴지도록 무대화되었다. 평범한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특히 서사극 요소가 뜬금없었다. 번역도 직역이 되어 전달이 안 되는 지점도 많았다. 작품의 템포감이나 이런 것들이 꽉 짜여져 있으니까 숨 막히게 보였고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희경 오랜만에 반가운 작품이었는데 메르스 기간 내내 공연되어 흥행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린타운>만의 날선 풍자를 잘 부각하지 못했다.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사극적인 타이밍, 소통 포인트들을 놓치고 지나쳐버리면서 보통의 뮤지컬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정수연 이런 작품은 뮤지컬 중에서도 시대의 말 걸기라고 할까 동시대적인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뮤지컬들이 많지는 않다. 연극 <햄릿>이 그런 것처럼 연출의 재해석이 가미될 수 있는, 이런 작품은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질까 기대하게 되는데 평범하게 끝나 아쉽다.
박병성 <팬텀>으로 넘어가 볼까? 어떻게 봤나?
고희경 <오페라의 유령>이 잘 만든 작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줬다. 작품 안에 극중극으로 실제 <라 트라비아타>도 보여주고 오페라가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임선혜를 캐스팅했는데 제작진의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어떤 면에서 <파리넬리>보다 음악적으로 활용을 못했다. 왜 성악가를 불러오고 발레리나를 캐스팅했는지 모르겠다. 클래식와 뮤지컬 장르 사이의 서걱거림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박병성 그런 캐스팅을 했다면 뮤지컬을 좀 더 클래식한 장르로 끌어올리는 프로덕션이 되어야 하는데 싸구려 드라마 같은 농담을 한다거나, 세트도 빈약했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눈요기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까.
고희경 그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장면도 기대 이하였다. 임선혜는 <라트라비아타> 같은 대형 오페라에 서는 가수가 아니다. 이 가수는 원전 오페라나 고음악 전문이다. 세계 무대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여주는 성악가라면 그의 장기를 고려했어야 한다고 본다. 성악가도 매니징이 필요한데 남용된 인상이었다.
박병성 작년에 라이선스로 선보이고 올해 투어 팀이 온 <원스>는 어떻게 봤나?
조용신 <원스>는 잔잔한 포크 음악을 추구하는 아담한 액터-뮤지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다. 우리나라 흥행 실패 이유로 아일랜드·체코 정서와 우리의 차이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부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규모인 것 같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버스킹’이고 그것은 작은 규모의 프로덕션이어야 빛이 난다.
박병성 원작 영화도 인디영화였고 영화가 주는 규모도 크지 않았다. 무대에서 주는 분위기가 참 좋고, 원 세트 안에서 처리하는 연출이나 아이디어들이 정말 뛰어났다.
조용신 뉴욕 시어터 워크숍이라는 비영리 극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출발 자체가 소박하다. 진정성이 있는 작품 개발이어서 좋았는데 상업 프로덕션이 되면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윤도현 캐스팅은 우리 방식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수연 <원스> 보면서 눈과 귀가 호강했다. 뮤지컬의 진화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 말도 안 되는 작품들도 있지만 <넥스트 투 노멀>이나 <원스>를 보면 전통에서 축적된 힘 같은 걸 느낀다. 그것을 자산으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뮤지컬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박병성 관심을 받은 또 다른 라이선스 <데스노트>로 넘어가자.
조용신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연극적인 세트에 쇼를 끼워 넣었다며 초연은 일본스럽게 나왔다고 하더라. 하지만 창작 단계부터 한국 공연까지 염두에 두고 주연 배우들의 솔로곡이라든지 그런 비중을 반영한 작품이다. 무대는 원 세트로 단출했다. 내용도 마이너한 소재에 어두운 이야기다. LG아트센터 같은 곳에서 3~4주 일본 극단 같은 곳에서 연극으로 만들어 투어 공연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예술적인 작품인데 캐스팅이 좋아서 장기 뮤지컬 공연으로 갈 수 있었던 일종의 기획의 승리였다.
박병성 강홍석이나 박혜나도 그렇고 우리 배우들의 캐릭터 구현력이 매우 좋았다. 뼈대가 되는 이야기도 좋고, 그것을 연극적인 연출로 잘 전달했다. 그런데 노래는 그다지 극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조용신 캐스팅이 좋았던 것 같다. 러닝 타임이 세 시간 정도 되는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홍광호, 김준수, 박혜나, 강홍석, 정선아, 다섯 명의 배우가 한자리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는데 행복했다. 다른 작품에서 주연할 배우들이 조연하고 다들 노래를 너무 잘하니까 듣는 재미가 있었다. 홍광호가 고등학생 역할인데 잘 어울렸다. L은 김준수가 지닌 아우라가 있으니까 그것과 잘 맞았다.
박병성 <인 더 하이츠>는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공연을 보기 전에 오프브로드웨이 영상의 일부를 먼저 봤는데, 음악이나 움직임에서 라틴계 정서가 느껴져 저걸 우리 배우가 어떻게 할까, 의문이었다. 메시지보다 쇼가 더 강조됐고, 막연한 지역 공동체의 훈훈함을 주면서 끝나는데 쇼가 흥겹다 보니까 즐길 수 있었다.
조용신 브로드웨이 초연을 굉장히 즐겁게 본 기억이 있다. 맨해튼 위쪽 변두리에 사는 남미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로 이 작품에도 나쁜 사람이 없다. 브로드웨이에서 스패니시 랩을 도입한 첫 작품인데 첫 장면에서 우스나비가 스패니시 랩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신선하고 재밌었다. 실제 배우들도 다 히스패닉 아니면 흑인, 혼혈 백인이다. 이미 대중문화에는 랩이나 스패니시가 자리를 잡았는데 뮤지컬에서만 보지 못했다. 뮤지컬에서 그 문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던 거다. 우리 공연에서는 아무래도 한글 가사 랩이 어색한 부분이 있고 가사 전달도 어렵더라. 게다가 인종 문제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니나의 아버지는 히스패닉이지만 베니는 흑인이어서 딸과 사귀는 걸 반대하는데 우리 공연에서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인 더 하이츠> 같이 인종 문제가 강한 작품은 투어로 들어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박병성 별 사건이 없고 갑자기 폭동이 일어나는데, 그들에겐 익숙한 장면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 뜬금없어 보인다. 문화적인 정서가 다르니까.
조용신 <베어>는 완벽한 게이 청소년 극인데 게이 극을 피해 가려고 한 점이 문제였던 것 같다.
박병성 그러다 보니 본성을 받아들이는 청소년과 이를 거부하는 기성 세대의 갈등이 부각됐는데 설득력이 없었다. 본성은 <쓰릴 미>인데 <스프링 어웨이크닝>처럼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어했지만 정작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인상이었다.
조용신 <쓰릴 미>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기보다는 <쓰릴 미>의
<하이스쿨 뮤지컬> 버전 같았다. 학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 구성이 비슷하다. 한 명의 여자가 사랑하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서 삼각관계가 된다. 킹카인 남자 게이가 여자와 자게 되는데 그다음 태도가 굉장히 모호하다. 마치 양성애자처럼 행동한다. 게이라면 여자랑 자는 것도 어렵지만 자고 나서 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여자와의 섹스가 1막 끝에서 필요 이상으로 멋있게 그려진다. 그러곤 2막에서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해명이 없다.
박병성 게이 학생이 본성을 밝히고 싶어하는데, 부모님이나 수녀님은 계속 회피한다. 이들이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데서 갈등이 생기는데 그런 점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신 이성애자 극에 게이가 나오는 작품과, 그냥 게이 극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에서는 게이들이 기존 사람들과 갈등하고 차별받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냥 게이 극은 게이들이 창작하고 관객들도 게이이기 때문에 굳이 이성애자들과의 갈등까지 다룰 시간이 없다. 게이들 사이에도 얼마나 복잡한 이야기가 있겠나. 그런 점에서 <베어>는 원래 완전한 게이 극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극에서 게이가 나오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거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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