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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S] 명동을 누빈 예술가들 [No.145]

글 | 나윤정 2015-11-02 6,124

<명동로망스>는 2015년을 살고 있는 9급 공무원  장선호가 1956년 명동의 로망스 다방으로 건너가  당대의 예술가들과 만나게 되는 타임슬립 뮤지컬.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명동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6·25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듬고 꽃피우게 한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암울했던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했던 명동의 예술가들. 그들이 명동을 누비며 꿈꾸던  예술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고통 속에도 희망이 피어난다.’ 6·25 전쟁 후의 명동에 어울리는 말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였던 명동은 정부의 복구 계획에 따라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당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 관련 시설이 들어서며 문인, 화가, 연극인 등이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명동에 하나둘 자리하게 된 다방과 주점이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렇게 1950~1960년대 명동은 문화 예술이 화려한 꽃을 피웠던 시기로 기록됐다. 작가 김동리, 황순원, 이봉구, 시인 박인환, 김수영, 화가 천경자, 이중섭, 국극 배우 임춘앵, 번역가 전혜린 등이 명동을 누비며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다. 
연합신문의 문화부 기자로 재직했던 작가 이봉구는 당시 ‘명동 백작’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명동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명동 시절에 대해 이렇게 소회했다. “그들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에 그마저 예술가가 할 일도 없던 시절에 태어난 것이다. 할 일을 찾아 예술인들이 많은 명동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고, 그곳에서 시를 쓰고 원고를 청탁받고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다닌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술이었다.” 전후의 절망을 술로 달래며, 무수한 일화를 남겼던 예술가들. 일례로 박인환과 전혜린의 요절이 그 시절 예술가들의 고뇌와 허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비운의 시대였지만, 낭만을 잃지 않았던 명동 시대. 1970년을 전후로 명동의 터줏대감이었던 조지훈, 김수영 등이 세상을 떠나며 명동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그 시절의 낭만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짧은 생, 강렬한 예술



 불꽃같은 여인, 전혜린 (1934~1965)    €
전혜린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당대의 날카로운 지성이었다.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를 지낸 변호사 아버지를 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내며 당시 여성으로선 드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고,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꿔 독일 뮌헨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그녀는 점차 자유와 예술에 심취했다. 귀국 후 그녀는 대학 강단에 올랐고, 헤르만 헤세 『데미안』,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등의 명작을 번역하며 당대 청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제시했다. 남녀평등을 외쳤던 자유주의 여성 전혜린은 사랑 앞에서도 열정적이었다. 스무 살 제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제자 어머니의 만류로 이별을 겪은 일화도 유명하다. 시대란 벽 앞에 늘 현실과 이념 사이를 고뇌하던 그녀는 서울문리대 앞 학림다방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명동의 주점 은성에서 통금 시간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며 삶의 탈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수면제 세코날 마흔 알과 함께 서른한 살의 나이로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그녀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을 전하며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고독의 천재, 이중섭 (1916~1956)    €
한국 근대 서양화를 대표하는 천재 작가 이중섭. 하지만 생전에 그는 비극적인 시대를 만나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던 불우한 화가였다. 평안남도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워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일본 유학에서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불행이 이어졌다. 가족과 함께 부산, 제주도로 피난을 다녀야 했고,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병에 걸리는 힘든 상황에 처해진다. 결국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향했지만, 이중섭은 홀로 한국에 남아 전국을 전전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특히 1953~1954년 통영에 머물며 완성한 ‘소’ 연작과 ‘부부’는 그의 내면적인 폭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중섭 필생의 걸작이 되었다. 한편 이중섭은 명동의 동방싸롱, 돌체다방 등을 전전하며 다른 화가와의 교류를 이어갔고, 1948년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김환기, 장욱진, 백영수 등과 전시회를 열었다. 



 낭만적인 명동 시인, 박인환 (1926~1956)                  €
헌칠한 키와 빼어난 외모로 명동의 댄디보이라 불렸던 시인 박인환. 경향신문의 기자로도 활약한 그는 서점 선술집 ‘마리서사’를 운영하며 김수영, 김기림, 김광균 등의 문인과 친교를 맺었고, 1946년 ‘거리’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김수영, 김경린 등과 함께 낸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모더니즘 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이 느낀 시대적 고뇌와 고독을 잘 담고 있다. 명동의 주점을 전전하며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였던 그는 1956년 ‘세월이 가면’을 지은 후 이상의 기일을 기린다며 폭음을 해 며칠간 만취 상태로 지냈고, 심장마비로 서른 살에 요절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문인들이 평소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 술 한 병과 카멜 담배를 그의 무덤에 함께 묻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명동 예술가들의 아지트



 은성 주점    €                      
1953년 문을 연 은성은 배우 최불암의 모친인 이명숙 여사가 운영했던 주점으로, 당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유명하다. 김수환,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천상병 등이 이곳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대와 예술을 논하였다. 시인 박인환이 이곳에서 즉석으로 지은 시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당시 작곡가 이진섭이 이 가사에 곡을 붙였고,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또한 소설가 이봉구가 매일 이곳 카운터 옆 통나무 의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사색에 잠겨 있어, ‘봉구주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73년 개발 붐으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은성주점터’라는 표지석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나리자 다방    €         
6·25 전쟁 후 명동 일대에 들어선 다방 ‘마돈나’, ‘플라워’, ‘동방싸롱’, ‘모나리자’ 등은 절망에 빠진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었다. 명동 시대 다방은 단순이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닌 문화 예술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하는 터전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그중 대표적인 ‘모나리자’는 김동리 작가, 조병화 시인, 김성환 화백 등 당시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즐겨 찾았던 곳. 신사실파 화가 백영수 등 당대 화가들의 개인전을 열어 더욱 특별해진 장소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5호 2015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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