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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No.122]

글 | 송준호 사진 | 김수홍 2013-12-04 6,635


영상은 또 하나의 배우


올해 공연된 일련의 화제작 리스트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무대 디자인 못지않게 인상적인 영상 디자인이 활용됐다는 점과, 그 작품 프로필에 빠짐없이 올라있는 ‘정재진’이라는 이름이다. 그는 무대 디자인의 부속 영역쯤으로 여겨져 ‘영혼 없이’ 활용됐던 영상 디자인을 시각적 표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 부각시키고 있는 주역이다. <잃어버린 얼굴 1895>를 마치고 <푸른 눈 박연>에 연이어 투입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작업의 출발은 현대미술과 무용이었다고 들었다. 뮤지컬은 어떤 경로로 시작하게 됐나.
대학 때 전공은 서양화였고 부전공으로 영화를 했다. 그러다 영상에 관심이 많아져서 대학원에서는 테크놀로지를 전공하게 됐다. 예술이 미디어의 흐름에 따라 내용이나 형식이 달라지는데, 순간 공연되고 사라지는 무대 예술의 특성이 그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공연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뮤지컬 쪽에 인맥이 없어서 무용 쪽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에 이지나 연출의 <바람의 나라>에 참여하면서 뮤지컬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카르멘>, <언약의 여정> 등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서편제>였다.
초연을 못 봤는데 영상을 보니 묵화가 좀 인위적이고 그래픽 냄새가 나서 이걸 아날로그적으로 표현하면 좋아질 것 같았다. 이지나 연출에게 이걸 맡겨달라고 졸랐고, 전 스태프가 모인 자리에서 만약 못해내면 공연계에서 매장당할 각오를 하라는 엄포를 듣고 긴장하고 열심히 했다. (웃음) 당시 300장 정도의 밑그림 작업을 했는데, 한국화 그리는 선생님과 함께 며칠 밤을 새웠다. 사람들에게 영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작품이라 의미가 있다. 한국적인 작품에서 묵화는 흔하게 쓰인 소재였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주문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 커튼과 어우러진 <그날들>의 영상도 인상적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컨셉이 안 잡혀 유독 힘들었던 작품이다. 물론 그 전에도 실 커튼을 쓴 작품은 많았지만, 주로 조명만 썼고 영상과 적극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의도대로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시도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르센 루팡>도 영상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PMC에서는 기획 단계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는데, 그때 무대까지 구상해서 보여줬다. 그래야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작 나온 무대를 보니 아예 영상을 배제한 채로 나왔다. 그래서 오프닝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서편제>가 한지처럼 비어있는 무대에 그림을 채워 넣는 느낌이었다면, <잃어버린 얼굴 1895>는 ‘한국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연출가가 주문한 건 한국화 느낌을 빼라는 거였다. 전작에서도 충분히 했고 그 작품의 시대 배경도 근대화의 과도기니까 당시 서구의 느낌이 나게 하는 컨셉이었다. 그래서 ‘먹 퍼짐’ 같은 기법도 안 쓰고, 스케치도 핸드 드로잉 위주로 갔다. 제대로 보인 게 하나도 없었지만. (웃음) 유독 화려하게 보였던 건 의상에 영상을 직접 비춰서가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한국적 색채와 영상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작품에서 영상은 이질적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한국미와 영상의 조화를 많이 고민했겠다.
영상 매체를 활용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슬라이드나 환등기를 쓰는 건 아날로그 느낌이 나지만, 대부분은 디지털 기기로 평면 스크린에 쏘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났던 거다. 그동안 프로젝션 공간이 진화하면서 그런 느낌을 최대한 보완할 수 있었다.

영상 디자인이 공연 예술에 도입됐던 초창기에는 영상이 작품과 상관없이 혼자 튀는 모습이 많았다.
나도 해외에서 공연을 보면서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영상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깨닫고 올여름부터 그걸 작품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참 어렵다.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게, 영상 디자인은 ‘영상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스태프들과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면서 더 나은 컨셉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런 스태프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후발주자인 영상 디자인을 경쟁 상대로 보는 것 같다. 영상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분들도 많다. 디자인을 다 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영상을 작업하라고 한다. 그럼 당연히 영상이 따로 놀 수밖에 없다. 내가 오죽하면 <영웅>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겠나.

작품이 좋아서?
아니, 열 받아서. (웃음) 왜냐하면 내가 해온 작업은 대개 2~3일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영웅>은 3개월 동안 세트와 영상 작업을 함께했다고 하더라. 작품이 잘 나올 수밖에 없다. 연출가나 프로덕션이 그런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레 미제라블>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배우와 세트의 호흡이 잘되어 있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건 영상에 대한 인식이 있는 스태프들과 만나는가와, 디자이너의 발언권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갈리는 문제다. 그러면서 깨닫는 사실은 앞으로 더 나은 작업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스태프들과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시도가 필요하다는 거다. 아니면 내가 무대 디자인까지 직접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 무대미술도 공부하고 있다.



확실히 그런 부분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결과물은 나오기 어렵겠다.
맞다. 무대미술은 물감의 시대에서 빛의 시대로 넘어왔다. 허공에 빛을 쏘는 게 조명이고, 거기에 이미지가 투사되는 게 영상이다. 처음엔 배경이었다가 움직이는 영상으로 바뀌고, 그걸 넘어서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형태로 발전해온 거다. 이게 서구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 이야기인데, 우리의 상황은 아직까지도 영상을 단순한 배경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상은 소리 없는 배우, 또 하나의 배우 역할을 한다. 영상을 써본 연출가들은 그 효과를 경험했기 때문에 적극성을 띤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설득하는 과정이 힘들다.

현대미술, 연극, 무용 등 타 장르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뮤지컬 작업과의 차이가 있나.
타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자기만의 자부심이랄까, 그런 게 있어서 오히려 영상은 확실히 맡기는 분위기다. 반면 뮤지컬 쪽은 콜라보레이션이 더 필요한 분야임에도 영상 디자인에 대해 배타적이다. 국내 인력에 대한 대우도 차별적이다. <살짜기 옵서예>는 해외 디자이너가 참여했는데 장비에 10억 원이 투자됐다고 들었다. <레 미제라블>도 엄청난 지원이 있었다. 해외 인력에 대해서는 이런 대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잘못돼 있다는 걸 느낀다. 게다가 영상 작업에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줄고 있다고?
자꾸 주문대로 해주다 보니까 그러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얼굴 1895>의 경우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3일 만에 하긴 했지만, 이런 게 고착화되면 앞으로 길어야 2년 정도밖에 활동을 못한다. 영상은 그렇게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영역 중에서 영상만 현장과 사무실에서 계속 작업을 해야 하는 파트다. 한마디로 24시간 작업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각 파트에서 뭔가 ‘구멍’이 생기면 결국 마지막에는 영상으로 ‘떼우려고’ 한다. 내내 대접도 못 받다가 마지막까지 과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과적으로는 인상적이었던 무대도 사실은 임기응변의 산물이 많겠다.
<잃어버린 얼굴 1895>의 그 유명한 액자 스펙터클이 그런 경우다. 원래는 3면 프로젝트가 이번 무대미술의 핵심 컨셉이었다. 그런데 공연 날짜는 다가오는데 무대가 아무리 봐도 답이 안 나왔다. 그래서 비중이 크지 않았던 액자를 메인으로 바꿨다. 그걸 조명이 다 처리 못 하니까 영상이 각 액자와 매핑하는 작업을 추가로 해야 했다. 3일간 못 움직이고 또 밤을 새워야 했다. (웃음)

그래도 이제까지의 작업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장면이 있다면.
원래 만족을 못하는 스타일인데.(웃음) 영상만이 아니라 작품 전체로 봤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진 작품은 창극 <서편제>의 파도 장면이다. 사실은 예상치 못하게 건진 거다. 보면서 “착시 효과 최고다!” 하고 환호했다. 우리 팀 작업의 특징 중 하나가 ‘전환 영상’인데,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특히 잘 구현된 것 같다. 대개 연출가들이 장면 전환 때 암전되는 걸 싫어한다. <그날들> 때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에게 배운 건데, 이것에 재미가 들어서 이후 <광화문 연가2>나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도 효과적으로 썼다.



전환 영상 외에 자신만의 특징이 또 있나.
다 수작업이라는 것? <아르센 루팡>의 신문 영상도 실사가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그린 거다. 다른 팀도 묵화 작업을 할 때는 수작업을 하겠지만 나는 회화과 출신이라 그런지 미술을 모르면 공연 영상을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팀보다 회화 느낌이 강하다. 보면 알겠지만 내 그림 스타일이 거칠고 대범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다작과 동시 작업을 안 한다는 거다. 한 작품에만 완전히 몰두해야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환경에서는 한 작품만 하는 것도 벅차다. (웃음)

이번 <푸른 눈 박연>은 어떤 식으로 풀어갈 생각인가.
렘브란트 에칭 느낌의 스케치인데, 표류된 네덜란드 사람들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무조건 서양화 스타일로 하기보다 한국화 느낌도 나는, 하멜이 그렸을 법한 동판화 스타일이 될 것 같다. 문제는 <잃어버린 얼굴 1895> 때와 마찬가지로 예산 문제인데, 더 나은 영상을 쓰려면 좋은 장비가 필요해서 이번에도 상당액의 사비가 투입될 것 같다.

내년에는 <명성황후>도 한다고 들었다.
이제까지 영상을 안 썼던 작품이라 고민이 많다. 게다가 기존 스태프에 영상만 들어가는 거라 내게 큰 숙제다. 이제까지의 버전과 비교하면 확실한 업그레이드가 될 것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 (웃음) 아직은 톤을 어떻게 정할지 모르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면 굳이 내가 안해도 되니까.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데 고민이 많다.

이제까지의 프로필을 보면 창작이나 한국적 색채가 강한 작품을 주로 해왔다. 그런 취향과 전혀 다른 작품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올해 <마마, 돈 크라이>를 흥미롭게 봤다. 개인적으로 어두운 내용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좋을 만한 아이디어가 많다. 이것도 영상이 안 들어간 작품인데, 만약 작업한다면 기존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영상과 관련해 무대미술의 흐름은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미디어가 발전을 하면서 기존 무대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다. 무대 디자이너의 입지도 2~3년 안에 많이 축소될 것이다. LED 세트 사용이 늘고, SM이나 YG 같은 곳에서 운영하는 퀄리티 높은 영상 콘텐츠 팀의 등장도 뮤지컬에 영향을 미칠 듯하다. 기존의 주류 스태프들은 이런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대중의 취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시대 흐름에 발 맞추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경력이 많아도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다. 저렴한 비용에 영상만 그럴듯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작품 전체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멀리 봐야 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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