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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ONGS OF MY LIFE] 내 인생의 뮤지컬 넘버, 이영미 [No.125]

정리 | 이민선 2014-03-03 4,891

내 인생의 뮤지컬 넘버, 이영미

 

                              

 

가장 처음 접한 뮤지컬 넘버
?<아가씨와 건달들> ‘I`ve Never Been in Love’?
고등학생 때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던 교회 남친이랑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러 갔더랬죠. 그게 저의 첫 뮤지컬 관극!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라 그랬을까요? 뮤지컬이란 세상에 완전히 꽂혀버렸어요. 이후 석 달가량 팸플릿 뒷장에 수록된 악보 속의, 사라와 스카이가 함께 부르던 사랑 노래를 줄곧 흥얼거리고 따라 부르며 연습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도 그 곡이 ‘I’ve Never Been in Love’였던 것 같아요. 이젠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제겐 아주 풋풋한 추억의 한 장면이죠.

 

감정이입이 잘됐던 뮤지컬 넘버
?<브루클린> ‘Raven’?
<브루클린>에서 파라다이스가 부른 ‘Raven’은 순수하고 가녀린 영혼을 누구나 사랑하게 되는 게 마땅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고 내게 주어진 역할은 사람들이 날 미워하게 만들어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도 역시 사랑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내게도 순수한 시절이 있었고 꽃같이 키스를 받고 영원을 맹세한 사랑이 있었으나 그건 다 지난 이야기이고, 난 이제 매일 강하게 갑옷을 입고 악녀의 탈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있지만 그 갑옷 안에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다는 파라다이스의 속내가 드러나죠. 한 번 불러보곤 훅 빠져들었던 곡이에요. 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브루클린>을 공연하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어쩜 이 노래는 제 깊은 속내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잊지 못할 실수담이 있는 뮤지컬 넘버
?<지킬 앤 하이드> ‘Bring on the Man’?
‘Bring on the Man’은 술집 댄서로 부르는 곡이에요. 의상이 꽤나 야하고, 그 장면에선 거의 모든 배우가 손님 역할로 무대 위에 등장해 있죠. 열심히 노래를 하고 있는데, 음, 그 왜 볼륨감을 위해 속옷 안에 넣는 ‘Bbong’님 있잖아요, 그 베이지색 B님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걸 어쩌나, 노래하고 춤을 추며 고민 고민을 하다가! 음악의 사운드가 팍 터지는 부분에서 박자에 맞춰 힘껏 그것을 빼 던졌죠. 그 순간, 모든 배우들의 눈동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 B님을 쫓고 있더라고요. 그러고는 다들 저를 안보고 다 그 B님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까만 무대 바닥 위에 떨어진 베이지색 B님 추락 사건. 정말 잊을 수 없어요. 제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네요.

 

힘들 때 위로가 된 뮤지컬 넘버
?<서편제> ‘살다보면’?
<서편제>는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참여한 작품이기도 해요.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신 때였거든요. ‘살다보면 그저 살아진다. 그저 되뇌다보면 무슨 주문처럼 아픈 내 마음 멀리 사라진다’는 가사가 위로가 됐죠. 말없이 함께 술 한잔 해주는 친구처럼.


내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뮤지컬 넘버
?<밴디트> ‘Another Sad Song’?
많은 분들이 저를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닌 배우라고 말씀해주세요. 정말 감사한 이야기지만, 사실 전 가창력보단 감성을 보여줄 수 있는 노래가 좋아요. 어떤 후배가 제 목소리를 “보석 부서지는 소리”라고 표현해줬는데, 전 그 표현이 참 좋아요. 슥삭슥삭 거리는 패스트리 빵의 곁 같은, 제가 좋아하는 제 목소리죠. <밴디트>에서 외로이 혼자 기타를 치며 나지막이 쓸쓸한 밤을 노래하는 곡이 있어요. 이게 아마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까 생각해요. 아직도 제가 부르는 ‘Another Sad Song’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현재 가장 꽂혀 있는 뮤지컬 넘버
?<맨 오브 라만차> ‘둘시네아’?
현재 가장 꽂혀 있는 노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둘시네아’죠. 돈키호테가 알돈자를 처음 본 순간 부르는 그 노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순간이며, 이 세상에 그와 나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며칠 전 공연 중에 (조)승우 씨가 평소 하던 것과는 다르게 끝 음을 길게 끌더니 한 5초간 멈춰 있는 거예요. 관객과 배우들 모두 숨이 멎은 채로 있었죠. 그 장면이 끝난 후에도 무대 뒤 소대를 돌며, 뛰는 심장과 흐르는 눈물을 진정시키느라 혼났어요. 정신이 혼미하더라고요. 누가 뭐래도 나를 둘시네아로 생각하는 남자를 만나는 순간, 여자는 늘 그런 순간을 꿈꾸지 않을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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