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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ime Travel] 시대정신과 록 스피릿의 결합 <헤어> [NO.104]

글 |이민선 도움 | 조용신 2012-05-07 4,890

뮤지컬 황금기까지 뮤지컬은 늘 당시에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록의 인기가 드높아지던 1960년대부터, 더 이상 뮤지컬 음악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아니었다.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음악으로 뮤지컬을 만들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음악으로 드라마를 전개시켜야 하는 뮤지컬의 특성상 모든 장르의 음악이 뮤지컬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기는 어려웠다. 특히 멜로디보다 비트 중심의 록만으로 드라마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 록 음악으로 이뤄진 뮤지컬 한 편이 등장하여 문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헤어>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첫 번째 록 뮤지컬이며 당시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담았다는 점에서, 이후로도 대체할 만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1968년, 록 뮤지컬 <헤어> 등장
1930~40년대에 뮤지컬이 황금기를 누릴 때까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쇼튠은 곧 대중음악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TV의 보급과 함께 유행한 로큰롤 음악이 젊은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가 소비하는 음악이 달라졌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고 여전히 이전의 성공 사례에 따라 제작되는 뮤지컬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헬로, 돌리!>(1964)와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 <맨 오브 라만차>(1965) 같은 훌륭한 작품이 나오기도 했으나, 뮤지컬의 황금기는 확실히 지고 있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영국에서 넘어온 비틀즈와 더 후 같은 록 그룹의 음악에 빠져들었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은 더 이상 이전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록 음악을 뮤지컬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행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오프브로드웨이의 젊은 창작자들은 록 뮤지컬 창작에 도전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델로 하여 1960년에 만들어진 <바이 바이 버디>가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기존의 쇼튠과 엘비스 스타일의 록을 섞어 음악을 꾸렸다. 그리고 1968년에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각색하고 하드록을 사용한 <당신만의 것>이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두 작품이 이후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데 반해, 이어서 제작된 <헤어>는 1968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헤어>는 음악의 사용뿐만 아니라 작품이 추구하는 정신에서 진정 ‘록 뮤지컬’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으로 역사에 남았다.


<헤어>는 제임스 라도와 제롬 래그니가 극작과 작사를 맡고, 거트 맥더모트가 음악을 만들었다. 세 명의 창작자들과 함께 이 작품의 무대화를 성사시킨 프로듀서는 조셉 파프이다. 이전의 브로드웨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성향의 네 사람이 뭉쳐 <헤어>라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라도와 제롬 래그니는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함께 활동한 배우였다. 1964년에 같은 공연에 출연하며 만난 두 사람은 그해 말부터 함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헤어>에 등장하는 클로드와 버거는 두 사람의 자전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로부터 창작을 시작한 두 사람은 주위의 인물들과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스트 빌리지의 징집 거부자들, 머리를 기르고 학교를 뛰쳐나온 젊은이들, 그리고 거리의 히피들에게 흥미를 느끼고, 이들을 무대 위로 옮기게 된다. 두 사람이 <헤어>를 쓰고 있던 1966년에, 래그니가 오픈 씨어터의 <비에트 록(Viet Rock)>에 참여하면서, 이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비에트 록>은 베트남전에 투입된 젊은이의 이야기로, 실험극에서 사용되는 즉흥적인 표현 방식을 사용한 작품이었다.) 라도와 래그니는 작곡가 거트 맥더모트를 소개받고, 로큰롤 쇼를 만들어 나갔다. 이들은 브로드웨이의 많은 프로듀서들에게 그들의 작품을 내밀었으나, 거절의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뉴욕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운영하던 개성 강한 프로듀서 조셉 파프가 이스트 빌리지에 개관할 퍼블릭 시어터에 <헤어>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헤어>는 오프브로드웨이 퍼블릭 시어터에서 1967년 10월 17일에 첫선을 보인 후 6주간의 공연을 이어갔다. 래그니는 직접 버거 역으로 출연했고, 쉴라를 비롯한 많은 출연자들은 거리에서 즉석 캐스팅한 이들이었다.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디스코 클럽 치타(Cheetah)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이어서 대본을 좀 더 현실적으로 수정하고 새로운 13곡을 추가하고, 톰 오호건이 연출가로 투입돼 1968년 4월에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게 된다. 브로드웨이에서 1,750회 공연했고 미국 내 투어 공연과 런던 공연으로 이어지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헤어>의 신선한 주제와 표현 방식
<헤어>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 않다. 반체제 성향의 다양한 주제들이 레뷔 형식으로 나열된다. 베트남 전쟁과 인종 차별 반대, 환경오염 문제, 헤어스타일의 자유 등에 대한 주장에 노래와 춤, 무대 효과 등 다양한 연출이 가미돼 이어진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 출연진이 누드로 등장해 성 차별에 대한 반대와 자유를 주장한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이지만, <헤어>는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국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의견들을 무대 위에서 대변했다.


히피 무리 중 리더인 클로드는 베트남전에 의한 징집 명령을 받는다. 참전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공연의 주요 플롯이 되며, 평화주의가 <헤어>의 주요 메시지로 등장한다. 당시 미군이 한 달간 죽인 적군의 숫자를 의미하는 뮤지컬 넘버 ‘Three-Five-Zero-Zero’에서 죽어가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미친 듯 정신없이 춤을 추며, 엔딩곡 ‘Let the Sun Shine In’에서는 전 출연진이 전쟁을 거부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바람을 노래한다.


<쇼 보트>(1927)와 <포기와 베스>(1935) 정도를 제외하면, <헤어>가 나오기 전까지 다수의 출연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채워진 적이 없었다. <헤어>에는 인종 통합의 의미로 다수의 흑인이 출연하는데, 그들이 이전의 작품에서처럼 노예나 희화화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동등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여겨 볼 일이다. ‘Colored Spade’와 ‘Black Boys’, ‘White Boys’ 같은 노래는 인종 차별 이슈를 다룬다.


예나 지금이나 무대에서 배우의 벗은 몸을 직접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헤어>의 누드 장면은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고 사회적인 의미를 전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누드 생활은 히피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헤어>의 누드 연출은 성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개방적인 성 개념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인종을 넘어선 자유로운 성 관계와 동성애를 가감 없이 표현한 점도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히피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무대 위로 옮겨놓았다는 게 <헤어>가 이룬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제목의 ‘헤어’는 히피들이 고수했던 긴 머리를 뜻하는데, 히피들은 남녀를 규정짓지 않는 자유로운 헤어스타일로 기존의 질서에 저항했다.

 


1950년대부터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는 전통적인 문법에 반하는 실험적인 공연이 올려졌다. <헤어>가 만들어질 당시, 리빙 씨어터와 라 마마, 오픈 씨어터 등에서 전통적인 대본에 따른 것이 아닌 즉흥적인 연기로 창작된 작품들이 속속 제작됐다. 작가들은 단순히 글로써 대본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무대에서 표현될 만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무대에 맞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작가와 연출가, 배우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제임스 라도와 제롬 래그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헤어>의 작가는 이 두 사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다수의 히피들로, 이는 곧 공동 창작의 의미를 가진다. 다수가 함께 창작한 이야기들을 묶는 데 레뷔 형식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헤어>의 연출가 톰 오호건 역시 라 마마에서 실험극 운동에 앞장섰던 이로, <헤어>가 브로드웨이로 옮겨질 때 장면들을 재배열하고 좀 더 즉흥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그는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감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연출을 즐겼다. 오프닝 넘버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어우러졌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이는 등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제 4의 벽을 허물었다.


음악을 맡은 거트 맥더모트는 <헤어> 이전에 히피 문화도,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접한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음악을 수학한 그는 <헤어>의 뮤지컬 넘버에 록 비트와 유사한 아프리칸 리듬을 접목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펑크 스타일의 음악을 완성했다. <헤어>에서는 로커빌리(Rockabilly, 로큰롤과 컨트리 음악의 혼합) 감성의 곡부터 포크 록, 리듬 앤 블루스와 애시드 록 등 다방면의 록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부모와 나라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록에 실려 전해졌다. 이전의 세대들이 즐겨듣던 우아한 선율의 음악과는 달리 육감적이고 강렬한 비트 중심의 록은 그것을 듣는 행위 자체가 기존의 질서에 반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평론가 클라이브 반스의 말에 따르면, <헤어>는 무대 위에서 록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되었다.

 

 

 

 

<헤어> 그 이후
<헤어>의 충격적인 무대에 대한 악평도 일부 있었지만, 호평이 압도적이었다. 새롭고 참신한 컨셉, 전염성 강한 저항 정신과 거부할 수 없는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에 대한 칭찬들이었다. 2007년 뉴욕 타임스는 “<헤어>가 뮤지컬 황금기 이후로 문화계를 휩쓴 마지막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 록의 인기와 <헤어>의 성공에 힘입어, 또 다른 브로드웨이 록 뮤지컬들이 흥행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록 뮤지컬은 그 명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헤어>의 영향으로 레뷔 형식의 ‘컨셉 뮤지컬’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컨셉 뮤지컬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것으로, 스티븐 손드하임의 <컴퍼니>와 <폴리스>, <태평양 서곡>, 마이클 베넷의 <코러스 라인> 등이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1960년대 록 음악계에서는 단순히 여러 곡을 담은 것이 아닌, 일관된 컨셉을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컨셉 앨범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페퍼 상사의 고독한 밴드(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와 더 후의 「토미(Tommy)」(1969),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The Wall)」(1979) 등이 그런 예이다. 더 후의 「토미」에 실린 24개의 곡은 살인 현장을 목격한 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등장인물의 말을 모두 노래 가사로 처리하는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하다. 더 후의 리더인 피트 타운센드가 자신의 앨범을 하나의 오페라라고 명명하고 그에 맞게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가진 곡들을 만든 결과다. (평단과 관객 모두 호평한 이 앨범으로 뮤지컬을 만드는 데 많은 이가 관심을 가졌으나, 피트 타운센드가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음반이 발매된 지 24년이 지난 1993년에야 그의 허락으로 브로드웨이 공연이 성사됐다.) 이 앨범에 영향을 받은 파릇파릇한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작사가 팀 라이스는 1969년에 싱글 앨범 「수퍼스타」를 낸 후, 이듬해에 이를 발전시킨 컨셉 앨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발표한다. 이 앨범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실제로 무대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록 뮤지컬을 이미 경험한 톰 오호건이 참여하여, 1971년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이후 <갓스펠>(1971)과 1950년대 록 사운드로 돌아간 <그리스>(1975),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한 <더 위즈>(1975)가 제작되긴 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록은 뮤지컬 무대보다 음반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갔다. 1980년대 이후 팝 음악으로 이루어진 메가 뮤지컬들이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록 뮤지컬은 자취를 감추었다. 1990년대 이후에 <렌트>(1996)와 <헤드윅>(1998), <스프링 어웨이크닝>(2006) 같은 록 뮤지컬과, <위 윌 록 유>(2002)나 <록 오브 에이지>(2009)처럼 기존의 록 음악을 엮은 주크박스 뮤지컬이 사랑받은 정도다. <헤어>만큼 뮤지컬계를 휩쓴 록 뮤지컬은 등장하지 않았다. 록 음악의 단순한 리듬과 비트가 복잡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록 밴드를 하던 창작자들이 뮤지컬 작곡에 참여하기도 하고, 록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뮤지컬에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헤어>가 록 뮤지컬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의 질서에 반하는 메시지와 록 음악이 지니고 있는 저항 정신이 한 몸처럼 어울렸기 때문이다. 충격적이고 실험적인 표현 방식 역시 작품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했다. 당시의 대중들이 보여준 시대정신을 담았던 것도 큰 성공 요인이다.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대중들은 곧 예술의 생산자에 다름 아니다. 대중의 목소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들이 바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시대정신과 록 음악이 가진 정신의 일치, <헤어>가 준 일격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3호 2012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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