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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뮤지컬 속 혁명 [NO.102]

글 |김영주 2012-03-13 4,254

혁명을 노래하라

 

 

 

그 단어를 입 밖에 내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일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듯한 긴장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 혁명은 그런 에너지를 가진 말 중 하나다. 기존의 헌법이 인정하는 범위 밖에서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체제나 제도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이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이미 기득권층에 맞게 짜여 있는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역사 발전을 위해 비합법적인 수단까지 용인되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한 혁명에 관한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지만 ‘혁명은 피를 마시고 자라는 꽃’이라는 섬뜩한 통념을 부정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정체불명의 격언이 통용되는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는 미묘하지만, 기존의 법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자연법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사회 구성원 다수의 공감대를 얻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공감대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확고하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고, 구체제에 대한 거부에는 동의한다고 해도 그 대안에 대해서는 혁명 주체의 세부 그룹에 따라서 다른 기준과 열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혁명 원년이 언제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혁명이 완성된 시점, 또는 종료된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세상에 미친 영향이 크면 클수록 그 기간은 더 긴 것이 보통이다.


정치와 낭만은 함께 말하는 것이 어색할 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세상을 지금보다 옳은 방향으로 바꾸어놓기 위해 자신의 피를 바치는 데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젊은이는 청춘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가 이상주의자든 현실주의자든 관계없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로맨티스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이상과 현실, 명예와 치욕이 수시로 교차하며, 형제와 같은 동지를 이튿날이면 적진의 한가운데서 발견하는 극적인 상황들이 이어지는 혁명의 날들은 많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연극의 배경이 되어왔다. 보통 혁명의 대상이 되는 기득권층이 각별히 애호하는 오페라에서도 <당통의 죽음>, <안드레아 셰니에> 같은 작품이 등장했으니 뮤지컬 역시 예외일 리가 없다.


전형적인 386 출신으로 운동권 이력을 가진 한 지인은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투어 공연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을 때, 혁명을 노래하는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적기(赤旗)를 흔드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레 미레자블>에서 혁명군이 높이 든 깃발이 한국인들이 레드 콤플렉스를 갖게 된 기원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 그것도 박정희 정권이 만든 거대한 극장에서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민중의 노래를 들으라’라는 가사의 장엄한 합창이 울려 퍼지는 상황 자체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잊히지 않을 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관객들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하지 않고 공연했던 93년판 <레 미제라블> 속에서 그려지는 바리케이드 신의 가사 중에는 얌전하게도 ‘개혁을 위해’라고 번역된 부분도 있었다.

 

 

 


사실 <레 미레자블>을 비롯한 뮤지컬에서 그려지는 혁명은 그 본질까지 깊이 파고들어가서 다층적으로 접근한다기보다는 감성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앙졸라와 마리우스 등 혁명에 가담한 젊은 학생들은 순결하고 정의로우며, 그들이 소리쳐 부르는 혁명의 노래에는 어떤 사적인 욕망이나 야심도 섞여있지 않다. 하지만 이를 두고 미화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마리우스를 제외한 그들 모두가 목숨을 잃는 것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표현은 단지 동지들이 모두 희생된 가운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젊어서 죽은 자들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다. 이타심과 희생정신, 정의감으로 현실을 깨부수고 세상을 바꾸어놓겠다고 나선 그때까지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정치인의 시대가 열리면, 살아남은 청춘들은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꾸는 것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어떤 혁명도 꿈꿨던 모습 그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현실과의 타협은 혁명 이후의 정해진 수순일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속한 그룹의 입장을 대변하며 싸우는 순간부터, 목숨을 던지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진짜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앙졸라와 마리우스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권을 위해서 서로를 공격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뮤지컬에서는 차라리 학생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던 카페에서 혼자 살아남은 마리우스가 텅 빈 테이블과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면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을 추억하는 노래를 부르게 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휩쓸린 세 남녀와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동경하는 조선의 세 청춘을 교차시키면서 보여준 <라 레볼뤼시옹>에서 혁명은 드라마틱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에 가깝다. 소극장에서 세 명의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하는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이라면 대부분의 뮤지컬이 혁명이나 민중봉기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앙상블들의 에너지가 넘치는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듣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장엄한 송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혁명’을 어떻게 묘사하냐는 것이다. <라 레볼뤼시옹>은 거대한 사회적 움직임인 혁명을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진 세 남녀와 그들의 관계로 축소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닥터 지바고>에서는 거대한 대륙에서 시작해서 세상을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과 2차 대전, 그리고 러시아 내전을 뭉뚱그려서 묘사한다. 애초에 그 모든 희생과 비극이 각각의 문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리 지바고라는 햄릿형 캐릭터가 겪게 되는 역사의 질곡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갈등과 모순으로 인한 것인지를 묘사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 점은 <닥터 지바고>라는 한 작품만의 특성이 아니다. 뮤지컬 속에서 묘사되는 혁명과 봉기는 대부분 하나의 사건처럼 보인다. <레 미제라블> 속 청춘이 싸우는 대상이 정확히 어떤 정권인지, 심지어는 그 혁명이 프랑스 대혁명인지 7월 혁명인지 2월 혁명인지조차 몰라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에비타>에서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을 위해 모여들어서 한목소리로 군부에 저항하는 민중들과 <광화문 연가>에서 어깨를 걸고 함께 노래하는 대학생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아는 데 뮤지컬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두 국가의 민중들이 어떻게 다른 입장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뮤지컬에서 그려지는 혁명은 우리가 그 단어에서 느끼기를 원하는 것들의 재현이다. 낭만적이고 정의로우며 순결하다.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해도 아름다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꿈이다. 뮤지컬 속의 혁명이 현실과 지나치게 거리가 멀고, 관객들에게 쉽게 감동을 안겨주기 위한 도구 정도로 얄팍하게 그려진다는 지적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께 행진하면서 목소리를 합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그 거대한 에너지는 혁명이라는 현실 모두를 담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무엇인지는 보여주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2호 2012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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