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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ime Travel] 혁신과 정통의 새천년 [No.109]

글 |배경희 도움 | 조용신(뮤지컬 칼럼니스트) 2012-11-01 4,016

새로운 태동과 함께 밀레니엄을 맞이한 브로드웨이에 역사로 남을 만한 두 작품이 등장한다. 바로 뮤지컬 장르의 영역을 확장시킨 <컨택트>와 브로드웨이 정통 뮤지컬 코미디의 부활을 알린 <프로듀서스>다.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 두 작품의 일등공신은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꼽히는 수잔 스트로만이다.

 

 

 

 

 

 

 

세기말이 낳은 혁신
‘기억에 남을 만한 뮤지컬이 한 편도 등장하지 않은 채 흘러간 시대’. 공연 평론가 존 켄릭(John Kenrick)은 1990년대 초반의 브로드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1991년, 영국산 메가 뮤지컬의 마지막 주자 <미스 사이공>이 미국에 상륙하면서,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영국 뮤지컬 빅4(<캣츠>(1982), <레 미제라블>(1987), <오페라의 유령>(1988), <미스 사이공>(1991))에 의해 점령당한다. 메가 뮤지컬의 흥행은 침체된 브로드웨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지만 이 같은 현상이 10년 가까이 지속됐다면, 이는 뮤지컬 종주국으로서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메가 뮤지컬에 대한 싫증, 브로드웨이 자존심 회복에 대한 열망, 포스트 손드하임(Post Sondheim) 세대라 불리는 젊은 창작자들의 등장, 비영리 극장의 부상, 여러 현상이 맞물리면서 199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에는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새천년이 밝아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기말의 불안과 새천년에 대한 기대는 예술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훌륭한 자극제였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창작자들을 한껏 고무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분위기는 ‘뮤지컬은 무엇이다’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어떤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중후반 브로드웨이는 새로운 역사가 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갖춰졌던 것이다.


미국 사회의 본질을 다루는 드라마, 지적인 음악, 이 시기에 제작된 새로운 경향의 뮤지컬은 소재와 음악, 형식, 모든 면에서 대형 뮤지컬과 달랐고, 그 어느 때보다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팔세토>(1992)와 <퍼레이드>(1998)를 포함한 대부분의 ‘뉴 뮤지컬’이 롱런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1990년대의 대표작으로 남은 <렌트>만은 예외다.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은 <렌트>는 브로드웨이 역사상 9번째 롱런 쇼로 기록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브로드웨이는 ‘뉴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기류의 상승세를 타고 밀레니엄을 맞이한다.


2000년대 초기의 브로드웨이는 다양한 도전과 모험을 했던 만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이었다. 20세기 마지막 시즌의 첫 신작 뮤지컬이 제임스 조이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죽은 사람들(The Dead)>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떤 시도들이 이뤄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원작은 심오한 주제를 다룬, 굳이 구분하자면 뮤지컬보다는 연극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작품이었다. 이처럼 ‘뮤지컬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뮤지컬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그런 와중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 뮤지컬 <컨택트>가 등장한다.

 

 

 

 

 


장르 파괴 뮤지컬의 탄생 <컨택트>
연출가 스캇 엘리스의 눈에 띄어 뮤지컬계에 발을 내딛은 수잔 스트로만은 그녀의 세 번째 브로드웨이 쇼 <크레이지 포 유>(1992)로 토니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낸다. 물론 언제나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영화 원작 뮤지컬 <빅>(1996)과 존 칸더·프레드 엡 콤비의 <스틸 피어(Steel Pier)>(1997)의 연이은 실패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링컨 센터의 예술감독 앙드레 비숍은 <스틸 피어>의 안무를 마음에 들어했고, 수잔 스트로만에게 작품 개발 지원을 약속하며 그녀만의 공연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한다. 스트로만은 제의를 수락하고 <빅>의 대본을 맡았던 존 와이드만를 섭외해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컨택트>의 시작이다. “아무도 내게 이 작품이 뮤지컬다워야 한다든지, 연극이어야 한다든지 무용 같아야 한다고 지적하지 않았어요. 내게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던 거죠.” 수잔 스트로만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창작의 자유 아래 수잔 스트로만이 만들어낸 <컨택트>는 개막하자마자 하룻밤 사이에 화제작으로 떠오를 정도로 새로운 ‘무엇’이었다. 우선, 타인과, 또는 자신과의 ‘컨택트’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망을 세 개의 에피소드, ‘Swing’, ‘Did You Move?’, ‘Contact’로 엮은 옴니버스 구조부터가 브로드웨이의 관행을 깨뜨리는 도전이었다. 또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아닌 녹음된 음악을 사용하는 결정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과감한 시도였다. 무엇보다 <컨택트>가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노래나 대사가 아닌 춤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뮤지컬 넘버는? <컨택트>는 차이코프스키부터 록 밴드 비치 보이스까지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장면에 맞게 삽입해 배경 음악처럼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처럼 말이다. 가사와 대사가 없는 작품을 뮤지컬로 볼 수 있는가, 보수 평론가들은 <컨택트>가 뮤지컬이라는 데 반기를 들고 문제를 제기했다.


<컨택트>의 장르 정체성 논란이 이슈화된 것은 2000년 토니상 작품상 후보 선정 문제에 부딪히면서다. <컨택트>를 작품상 후보에 올리느냐의 문제를 두고 후보작 선정 위원회에서 격론이 벌어진 것. 이로 인해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의 정의에 대한 때 아닌 논쟁이 벌어진다.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유무보다 드라마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 아래 <컨택트>에게 작품상이 돌아가면서 논란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밀레니엄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도가 환영받았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노래, 춤, 연기가 뮤지컬의 필수 구성 요소로 여겨져 왔지만 한 분야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컨택트>의 토니상 수상은 밀레니엄을 맞은 브로드웨이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인 셈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미디의 귀환 <프로듀서스>
<컨택트>로 안무가 겸 연출가의 지위를 획득한 수잔 스트로만은 이듬해 정통 뮤지컬 코미디 <프로듀서스>(세인트 제임스 시어터 2001년~2007년, 2,502회 공연)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위치를 견고히 한다. 수잔 스트로만은 <프로듀서스>로 안무상과 연출상을 동시에 거머쥐는데 이는 1970년대 밥 포시 이후 맥이 끊겼던 안무가 겸 연출가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프로듀서스>는 원로 코미디 배우이자 패러디 영화의 귀재라 불리는 영화감독 멜 브룩스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는 실패할 공연을 만들어 투자금을 챙기려는 프로듀서의 사기행각을 그린 블랙 코미디다.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미디의 전통을 따르면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사기꾼 이야기라는 참신한 소재를 다룬 <프로듀서스>는 브로드웨이 관객들이 좋아하는 흥행 요소를 모두 다 갖춘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에 브로드웨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인기 스타 네이선 레인과 매튜 브로데릭의 출연도 인기에 한몫했다. 소위 말하는 스타 캐스팅 전략이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프로듀서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연일 매진 사례로 공연 티켓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고, 관객들은 암표를 구입하기 위해 1천 달러도 기꺼이 지불했을 정도다. 이 같은 뜨거운 반응에 프로덕션은 제일 좋은 오케스트라석 가운데 자리를 ‘이너서클’이라 이름 붙이고 480달러에 판매하는 사업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이 결과 1일 박스 오피스가 3백만 달러를 기록하기도 한다.


<프로듀서스>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영국산 메가 뮤지컬과 디즈니 시어트리컬의 가족 뮤지컬에 의해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복고 뮤지컬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또한 9· 11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관객들은 가볍고 재미있는 공연을 원했고, 제작자는 흥행에 대한 태도가 보수적이었던 당시 상황과 잘 맞물리면서 <헤어스프레이>,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제작이 이어져 쇠퇴한 뮤지컬 코미디가 브로드웨이를 다시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9호 2012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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