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뮤지컬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다
2001년 한국 공연계의 최대 이슈는 단연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2001년 12월부터 2002년 6월까지 7개월 동안 12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된 <오페라의 유령>은 당시 국내 공연사상 최장기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의 공연 가능성부터 흥행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 94퍼센트, 24만 명의 관객 동원, 192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한국 뮤지컬 역사를 새로 썼다. 대규모 자본과 기획력의 결합이 낳은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은 단순히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한국 뮤지컬의 산업화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뮤지컬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도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이 모든 일들은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의 뮤지컬 산업에 대한 확신과 과감한 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 성공의 일등 공신인 설도윤 대표를 2001년의 인물로 선정하는 데에는 어떤 이견도 따르지 않았다.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 이후 설도윤 대표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고, 그의 이름 앞에는 ‘한국 뮤지컬계의 미다스 손’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12월 1일 <오페라의 유령>의 첫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2001년은 설도윤 대표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시간’이었다. “50억 원이 넘는 사전제작비를 미리 투자받기가 쉽지 않았어요. 공연은 돈이 안 된다는 생각이 주도적이었거든요. 투자가 모자라면 진행하고 있던 라이선스 계약이 모두 중단되는 상황이어서 하루하루 피가 말랐죠. 모 국회의원이 저를 두고 한 얘기처럼 진짜 사기꾼으로 전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결국 동양그룹을 설득해서 제미로 공동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런 대기업에서조차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하고 투자 결정을 하지 않아 끝까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죠.”
<오페라의 유령>은 1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 7개월간의 장기공연 예정 등 국내 공연계는 물론 당시 영화계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완성도와 상업성을 검증받은 작품에 관객을 뺏길 것을 우려한 중소 제작사들의 반감과,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공연계가 극심한 침체기로 빠져들 것을 우려하는 의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티켓 오픈 이후 흥행의 조짐이 보이자 설도윤 대표를 두고 ‘운이 좋았다’, ‘외국 유명 브랜드를 노력 없이 들여온 것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운이라뇨. 프로듀서라면 작품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시장성과 사업성까지 볼 줄 알아야 해요. <오페라의 유령>은 지난 몇 년간의 데이터를 통한 시장 분석과 치밀한 리서치를 통해 경제 흐름, 소비자 패턴 등을 고려한 작업이었어요. 저는 이미 삼성영상사업단 시절인 1996년에 한미합작으로 올린 <브로드웨이 42번가>를 통해 뮤지컬의 산업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50일 공연을 통해 32억 원, 앙코르 공연까지 더하면 80억 원의 매출을 올렸어요. IMF를 벗어난 지 몇 년 안 되긴 했지만 국내 뮤지컬 시장의 잠재성을 크게 봤고, 내가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VIP 고객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도 적중한 셈이에요.”
뮤지컬 배우에서 안무가, 연출가를 거쳐 뮤지컬 프로듀서로 변신한 후, 설도윤 대표가 경험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제작 노하우가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에 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은 1991년 그가 전문 프로듀서로서 뮤지컬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품어왔던 생각들-뮤지컬 산업의 진화를 위한 대기업 자본의 수혈, 상품성 있는 작품들을 계속 선보여 시장 규모 확대, 뮤지컬 전용극장 설립, 뮤지컬 크리에이티브 인력 양성 등-을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전용관을 지어 장기 공연한 브로드웨이 퍼포먼스 <델라구아다>나 텐트 극장으로 전국 순회공연에 나선 <캣츠> 빅탑시어터 공연, 5년여의 기획 끝에 국내에 첫선을 보인 디즈니 뮤지컬 <미녀와 야수>, 세계 최초의 <오페라의 유령> 투어 공연 등은 2001년 즈음부터 계획해두었던 일들이었다. 뮤지컬 <라보엠>을 통해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첫 번째 한국인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1년에 저는 얻은 것만큼 잃은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넘쳐서 너무 앞서갔죠. 뮤지컬 산업에 너무 일찍 눈을 떠서 그때부터 브로드웨이 진출을 꾀했고, 뉴욕에 법인 사무실도 열었어요. <오페라의 유령>이 아니었다면 좀더 치밀하게 공부하고 접근해서 한국이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때 투자자들을 한 번 더 설득했더라면 <애비뉴 Q>에도 프로듀서로 참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더라면 <인 더 하이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까지 이어졌을 테고 그럼 나는 캐빈 맥컬럼이나 제프리 셀러만큼 유명한 프로듀서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웃음)
설도윤 대표는 <오페라의 유령>의 가장 큰 수혜자를 ‘관객’으로 꼽았다. 2001년의 뮤지컬 시장은 뮤지컬 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정부의 뒷받침도 없는 상태에서 한 개인에 의해 붐업이 형성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세계 4대 뮤지컬 중 한 편을 관람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한국 뮤지컬의 산업화를 이끌어오면서 설도윤 대표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 이상으로 공연계 전반을 아우르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저소득층과 소외계층 청소년을 위한 사단법인 공연예술아카데미 운영,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60인조의 유니버설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 영종 브로드웨이 프로젝트 운영 등 그 범위도 다양하다.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오페라의 유령>을 8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보다 ‘나의 목표는 한국 시장의 창작 작업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설도윤 대표의 다음 행보가 더욱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