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립대 엔터테인먼트 공학을 전공하고 2000~2007년 <더 뮤지컬>의 뉴욕통신원으로 ‘오! 브로드웨이’를 연재했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서 뮤지컬 칼럼을 연재하는 등 각종 일간지 및 공연 전문지에 글을 써왔다. 2006년 CJ뮤지컬 쇼케이스 제작감독, 2008년 전국문예회관연합회 주관 창작 팩토리 실행위원 및 뮤지컬 코디네이터, 2009년 충무아트홀 도심뮤지컬 캠프 예술감독
그동안 주로 써온 글
기획 기사를 가장 많이 썼다. 이슈 메이킹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뉴욕에 머물면서 글을 쓴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 쪽에서 화제가 된 일들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우리 뮤지컬계를 비춰볼 만한 사안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버츄얼 오케스트라 문제나 브로드웨이 노조, 뮤지컬에서 서곡이 사라지는 추세인 이유 등등. 나 자신이 뮤지컬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일간지나 주간지에 정기적으로 공연 리뷰를 쓰는 것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평론을 쓰는 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전업 평론가로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직함을 가지게 되었을 때 뮤지컬계에서 하고 있는 다른 작업들에 곤란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기문화의전당에서 나오는 기관지에 창작뮤지컬에 대한 비평을 연재 한 적이 있다. ‘누가 볼까’ 하는 생각으로 썼는데 의외로 관계자들이 다 읽었더라. 리뷰를 보고 작품을 개정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 비평의 특징
뮤지컬은 연극이나 무용과는 달리 사람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고 좋아할 만한 공연예술의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형식이 만들어졌다. 보더빌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보면 처음에는 만담만 하다가, 거기다 음악을 넣으면 대사나 몸짓으로만 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지 않겠나 해서 음악이 포함되고, 음악에 스토리텔링까지 들어가면 사람들이 더 좋아하겠다 싶어서 지금과 같은 뮤지컬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즉,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그 출발부터 엔터테이먼트로서의 속성이 상당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평론의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 미적 완성도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엔터테인먼트로서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올 수 있겠지만 그건 본격적인 평론이라기보다는 비싼 돈을 주고 티켓을 사야하는 관객들이 작품을 좀더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는 ‘가이드’로서의 역할에 가깝다. 평론가의 역할이라고 하면 그 이전에 공연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고민하고 있는 문제, 즉 창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미적인 역할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뮤지컬 비평이 어려운 이유
첫째, 일단 예술적인 가치를 논할 만한 작품이 적다. 가령 <나인>이나 <스위니 토드> 같은 작품이 일 년에 10편만 나와 줘도 평론가가 할 일이 참 많다. 어떤 작품이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거기 참여한 크리에이터나 배우나 스태프들이 제 몫을 했다면 다음 작품에서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역할을 평론가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시장에서는 상업적인 결과만 너무 중요하게 보니까 티켓이 안 팔리면 그냥 재미없는 작품으로 끝나고 참여한 사람들의 공로도 같이 묻혀버린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목적인 뮤지컬이라면 그 작품에 대해서 어떤 심도 깊은 비평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비평이 의미가 있을까? 롤러코스터에 대해 비평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둘째, 일단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매체인 일간지의 경우, 공연 섹션이 선진국처럼 크지 않다. 문화 선진국의 경우 일간지에 공연 한 편에 대한 리뷰가 원고지 30매 분량씩 들어가는 것이 흔한데 비해 한국에서는 원고지 7,8매가 일반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일간지는 외부 평론가가 아니라 내부 기자가 리뷰를 쓴다. 해외와 비유하자면 「타임아웃」 지에 실리는 공연평이 딱 그 정도 분량이다. 그런데 타임아웃의 성격이 뭐냐면 시티라이프 매거진, 말 그대로 시티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볼만한 공연을 리스트 업 해주는 건데, 한국 일간지에 실리는 뮤지컬 리뷰의 성격이 이와 비슷하다. 만약 「뉴욕 타임즈」나 「월스트리트저널」, 영국의 「가디언」처럼 제대로 된 뮤지컬 비평이 가능하려면 지면이 늘어나서 심도 깊은 작품 분석을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론가의 역할이 불분명해진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속성을 연극, 무용, 음악, 고전문학 등 여러 가지를 관련 장르를 기반으로 해서 과거의 레퍼토리를 예로 들어가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로서 재미를 더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주는 수준이라면 그건 평론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뮤지컬에 대해 에세이 이상의 글을 수용하는 매체가 없다.
셋째, 뮤지컬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양적인 성장을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해 자연스럽게 체화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관객들이 없다는 것도 어려운 점 중 하나다.
한국에서 뮤지컬 비평이 자리를 잡으려면
평론가들의 글 때문에 창작자들이 상처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섭섭하다고 해도 평론가는 작품의 예술적인 영역을 대변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10년째 잘되고 있는 작품이지만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맘마미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는 평론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분명 재미있고 관객들로부터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평론가들이 기준으로 삼는 예술적인 가치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관객들의 경우에는 평론가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 위해 공연을 볼 때는 그런 비평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열광하는데 티켓 판매가 미지근하다 싶으면 ‘손드하임 류의 작품인가 보네’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 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한 것은 손드하임 류의 예술적인 뮤지컬들은 어차피 지원금을 받아서 제작을 하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적인 관객에게 문화적인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씨 왓 아이 워너 씨>든 <맘마미아>든 간에 관객 주머니 밖에 바라볼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보니 오직 흥행만이 살 길이고, 평론가들에게 기대하는 역할도 관객들이 많이 들 수 있도록 작품에 대한 가이드를 해달라는 것으로 국한된다. 뮤지컬 계에 비영리 극단이 전무한 한국의 상황에서 상업 자본으로 예술적인 시도를 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뮤지컬 장르에 있어서 비평의 역할은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영역에 집중해서 일반 관객들이 미처 알지 못한 가치와 이슈를 먼저 찾아내고 알리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작품은 예로부터 비영리 극단이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헤어>나 <콘택트>처럼 비평가들이 할 말이 정말 많은 작품들이 그 좋은 예다. 그런데 대형 자본으로 원래 있는 드라마와 음악을 가지고 동화적으로 만든 <미녀와 야수>를 놓고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지 않겠나. 그런데 한국에서 뮤지컬은 그 산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발전해 왔다. 뮤지컬의 산업적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작품들은 사실 매킨토시가 만든 몇 개의 작품에 한정되어 있고 오히려 비영리 극단에서 만든 뮤지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뮤지컬 비평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뮤지컬 제작이 오직 상업적 성공만을 목표로 하는 풍토 대신 좀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먼저 마련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