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과 연극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숭동도 일요일 밤이 되면 한적해진다. 분주한 한 주를 위해 숨고르기가 필요한 일요일 밤 9시, 학전 블루 3층에 위치한 연습실에서는 주말의 끝자락에도 아랑곳 않고 뜨거운 숨결이 새어나온다. 신발장에 미처 자리잡지 못한 신발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있다. 언뜻 봐도 이삼십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로 연습실이 좁아 보인다. 건반 앞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방주란 씨가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의형제>의 ‘빚더미’이다.
“이 빚내서 저 빚 갚고 끝도 없이 늘어만 가네. 빚더미”
가난으로 인해 쌍둥이를 모두 키우지 못하고 한 아이를 보내야 했던 간난으로 분한 방주란이 가슴을 파고드는 미성의 노래를 토해낸다. 안경 너머로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김민기 연출 저편으로 한 무리의 배우들이 모여서 방주란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평범한 옷차림에 익숙한 얼굴들. 찬찬히 들여다보니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이종혁 내로라하는 국내 간판급 영화배우들과 권형준, 서범석, 배해선, 익숙한 뮤지컬 배우들이다. 이번 학전 20주년 축하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또는 응원차 바쁜 일정 중에 연습실을 찾은 것이다.
방주란의 노래가 끝나고 앙상블들의 노래 연습이 이어진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숨을 고르는 방주란에게 말을 걸었다. 참 오랜만이에요. “아이 낳고 7년 만에 컴백하는 거예요. 이 작품은 지금의 남편(김윤석)을 만나게 해준 작품이라 저에게 더 뜻 깊죠. 오랜만에 다들 만나서 같이하니까 내가 배우였구나 싶고,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다시 생기는 거 같아 기분 좋아요.” 7년을 쉬었다지만 방주란의 간난은 여전히 미성에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밀도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남편 김윤석이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영화에서 거친 역을 많이 맡아 터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어떤 역에 참여하세요? “연습한다고 해서 응원차 왔어요. 영화 촬영 때문에 참여할 수 없지만 공연 때 티켓을 팔거나 안내를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도울 생각이에요.” 설경구 역시 공연에 참여하지 않지만 김윤석과 함께 티켓을 담당하거나 안내라도 도울 생각이라고 한다. 이번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김윤석이나 설경구에게 표를 받을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얼마나 죽을 쑤는지 볼까.” 후배들의 연습이 끝나자, 김민기 연출의 말에 제일 먼저 호출된 선배는 장현성이다. 2000년 공연 때 거렁뱅이 해설자로 조승우와 더블 캐스팅된 그는 이번에도 조승우, 서범석 등과 같은 역에 출연한다. 빠른 비트의 ‘밥상 위의 신발’을 부르는 장현성의 목덜미에는 어느새 땀이 흐른다.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세요. “원래 땀이 많아요. 촬영 때문에 이틀 밤새우고 오는 길이에요. 학전에 오면 항상 리프레시 되는 느낌이 들어요. 김민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기본이거든요. 기본 마음가짐을 재점검받는 기분이 들죠.”
“팀이 많아서 너무 많은 퍼즐을 짜 맞추려면 머리가 복잡해.” 기념사진 찍을 때도 한번 웃지 않으시던 김민기 연출이 마냥 좋아하는 기자에게 슬쩍 말을 건네고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김민기 연출은 연습 내내 농담을 던지고 아이 같은 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새끼들을 보니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그러나 한 배우가 대사를 정확히 하지 않자 불호령이 떨어진다. “어미 하나 틀리지 마. 몇 줄 안 되는 대사라고 기분대로 해선 안 돼.” 연습실은 긴장감이 흐르지만 배우들의 입가엔 웃음이 머문다. 그들은 마치 ‘그래 저게 바로 김민기 선생님이지’ 하는 것 같다. 이종혁도 슬쩍 웃음을 지어 보인다. “스케줄 때문에 참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연습한다고 해서 일단 온 건데, 하게 되면 2001년도에 했던 현민 역을 하게 되겠죠. 선생님 앞에 서면 늘 작아지는 느낌이에요.” 이종혁의 말처럼 김민기 선생님 앞에선 한국 영화계의 대표 배우들이 누구 하나 티내지 않고 연습생들처럼 얌전해진다. 예전 인터뷰에서 김민기 연출은 유명해진 제자들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그렇지 못한 제자들을 더 안쓰러워했다.
<의형제>의 마지막 장면 연습으로 접어들었다. 쌍둥이 형제인지 모르고 무남과 현민이 대치하는 장면, 초연부터 무남 역을 맡았던 권형준은 연습임에도 완전히 인물에 몰입해서 연기했다. 무대 장치도, 조명도, 반주도 제대로 없었지만 감동이 밀려왔다. “무남 역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배역이에요. 다시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어서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선생님과 함께 연습한다는 자체가 행복해요.” 그것은 비단 권형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쉽게 시간을 빼기 힘든 이들이 연습하는 날도 아니고 역할을 맡지도 않았는데, 연습실에 찾아와 지켜보고 같은 공간에 머물려고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연습은 밤 11시를 훌쩍 넘기면서까지 이어졌다. 김민기 선생님과 학전 배우들. 이들의 연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행복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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