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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lumn] 1980년대를 넘어서게 한 가교, 이영훈의 발라드 [NO.91]

글 |이영미(대중문화 평론가) 2011-04-13 5,151

대중들이란 참 묘하고 복잡한 존재이다. 한 시기에 대박을 터뜨릴 정도의 최고 유행 경향은 종종 단순하고 때론 상투적이기도 하다. 이런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대중들의 취향이 저 정도밖에 안되는가 싶어 절망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경향이 결코 오래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를 넘어 의미 있는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겨지는 것은 종종 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경향이 아니라, 그로부터 조금 앞서 나간, 그래서 아주 약간은 덜 대중적이었던 작품들이다. 

 


1980년대 이영훈의 위치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영훈이 가수 이문세의 음반으로 인기곡을 쏟아내고 있던 무렵,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흐름은 조용필의 인기가 정점을 찌르고 다소 주춤거리고 있을 때였다. 1980년대 대중가요계는 슈퍼스타 조용필이 록과 스탠다드팝을 결합한 강렬한 사운드와 비장한 선율로 대중들을 휘어잡고 있었고, 대학가요제 출신의 송골매, 김수철 등이 청소년 팬들의 환호를 받고 있었던 때였다. 1985~6년 즈음은 록에 기반을 둔 다소 파워풀한 경향이 주춤거리면서, 모든 노래가 섬세하고 화려해지고 있던 때였다. 최성수, 김범룡, 이광조, 이치현과 벗님들, 김종찬 등으로 이어지는 텔레비전 가요의 인기 경향은, 1980년대 초반 조용필이 쌓아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조용필과 송골매의 강렬함에 비해 좀 더 섬세한 감각성이 강조되고, 고급스럽게 우아하고 유려한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포크의 소박함과도, 록의 강렬함과도 다른 경향이었다.


다소 과도기적으로 보이는 이런 경향이, 또 하나의 확고한 경향으로 자리매김한 시기는 1988년이다. 변진섭 식 발라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슈퍼스타 조용필의 시대가 확실히 끝나고 발라드의 시대로 접어든 때이다. 변진섭, 이승철, 이상우, 신해철, 윤상, 김민우, 이승환,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1988년부터 1991년 즈음까지 발라드는 대중가요의 최고의 주류 경향이었고, 제2의 인기 경향으로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심신 등의 댄스뮤직이 옆자리를 차지하는 양상이었다. 이러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흐름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며 지각변동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1992년)이었다. 이로써 대중가요계의 제1의 주류 경향은 발라드에서 댄스뮤직으로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이영훈이 만들고 이문세가 부른 노래가 인기를 모으던 시절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의 시기였다. 말하자면 1980년대 초중반 조용필과 송골매의 시대에서, 1988년 이후 발라드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영훈은 발라드라는 새로운 경향을 선도하는 위치에 놓여있었던 셈이고, 따라서 그의 인기는 변진섭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변진섭보다 더 깊고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가 되었다.

 


이문세가 처음부터 이영훈과 호흡을 맞춘 것은 아니다. 1983년 <나는 행복한 사람>이 수록된 첫 솔로음반은 너무 얌전한 올드패션이었고 1984년의 <파랑새>가 실린 2집의 록 경향은 그의 목소리와는 부조화했다. 이런 이문세가 자신의 색깔을 찾기 시작한 것이 1985년 3집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였고, 그것이 바로 이영훈의 작품이었다. 즉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가수 이문세의 색깔이란 이영훈의 색깔이었고, 이영훈의 작품으로 음반 전체를 채우면서 이문세는 가수로서의 자신의 색깔을 비로소 만든 셈이 되었다. 쉽고 평이하나 가사와 선율에서 소녀적 센티멘털리즘을 건드리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발랄경쾌 캐릭터의 이문세와 어울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노래는 1986년을 뒤흔들었고, 게다가 텔레비전이 아닌 라디오와 음반을 통한 대박이었다.


1집에서 대중적 인기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모았지만, 이영훈의 면모를 더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은 <휘파람>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텔레비전 가요보다는 다소 복잡하고 파격적인 선율과 음악의 구조, 결코 직설적이지 않으나 시각과 청각, 후각 등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감각적인 가사 같은 것들은, <난 아직 모르잖아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영훈의 고유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노래는 1988년 변진섭의 히트로 본격화되는 발라드의 흐름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고음의 화려하고 강렬한 절정부의 후크를 보여주고 있어서, 대중들의 선택을 한두 걸음 앞서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2년 뒤에 나온 이문세 4집에서는 이영훈의 이러한 색깔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그녀의 웃음소리뿐>, <사랑이 지나가면> 등이 히트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도 라디오의 인기차트를 이영훈, 이문세 콤비의 노래가 점령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지나가면>은 다소 쉽고 평범한 악곡이지만, 이별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의도된 무덤덤함과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감각적 표현이 어우러진 가사 덕분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록의 강렬함과 발라드의 화려함의 맛을 함께 느끼게 하는 곡이었다.

 


1987년의 3집과 1988년 5집은 이문세, 이영훈 콤비가 절정의 인기를 누린 시대였다. 3집에서 제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 후 이영훈은 1988년 5집에서는 <시를 위한 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으로 한층 더 고급스럽고 복잡한 질감을 드러낸다. ‘시’를 두드러지게 제목부터 드러낸 노래 <시를 위한 시>도 그렇거니와, 특히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장조와 단조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슬픔과 기쁨, 아쉬움과 감격 등이 복잡하게 얽힌 노래를 뽑아낸다. 라일락 향기 피어오르는 오월의 가로수길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슬프다. 이영훈의 강한 센티멘털리즘과 그 묘한 절제감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클래식음악에서 주로 써온 악기들을 동원하여 우아하게 표현된다(같은 음반에 실린 <광화문 연가>는 오히려 평범하고 쉬운 곡이다. 광화문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던 그 세대들의 추억을 건드리며 이후에 더 큰 인기를 모은 감이 있다).
이렇게 보면 이영훈의 노래는, 1988년부터 주류 가요계의 최고 인기 경향이던 발라드의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변진섭 이후의 발라드에 비해서는 훨씬 복잡하고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자리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라디오와 음반이었다. 같은 시기 탄탄한 화성적 편곡을 보여준 유재하와 함께, 그는 비트와 사운드가 강해진 1980년대 초중반의 경향을 딛고, 피아노가 주도하는 화성과 감각적이고 화려한 선율이 중시되는 발라드로 나아가는 가교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즉 1980년대 한국 대중가요는 이영훈과 유재하라는 언더그라운드의 두 작곡가를 딛고, 변진섭의 다소 대중적이고 편안한 발라드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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