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은 뮤지컬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의미가 통용되지만 막상 정확한 개념과 범위를 설명하라고 하면 비로소 그 경계가 다소 모호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용어이다. 뮤지컬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앙상블은 ‘무대에서 완성되는 배우들의 조화’라는 의미와 ‘주조역이 아닌 다수의 배우들’을 지칭하는 명사로서의 의미가 혼용되고 있다.
가장 유용한 조커, 앙상블
인접한 공연 장르 중에서 뮤지컬의 앙상블과 유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무용의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 군무수)와 오페라의 코러스(Chorus, 합창단)가 있다. 춤과 노래, 드라마가 어우러지는 뮤지컬의 특성상 앙상블은 코르 드 발레와 오페라 코러스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 때문에 코러스나 군무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이 글에서는 ‘앙상블’로 통일함).
국내의 뮤지컬 시상식에는 ‘앙상블 상’ 부문이 빠지지 않는데, 해외의 드라마 시상식에서 앙상블 상이 주역 배우들 간의 호흡, 케미스트리에 대해 시상을 하는 데 비해 국내뮤지컬 시상식의 이 부문은 ‘앙상블’, 또는 ‘코러스’라고 불리는 이들이 수상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전체 공연에서 배우들이 보이는 조화가 심사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앙상블 팀’의 실력과 수준에 대한 평가가 핵심인 것이다.
드라마를 가진 서구의 극예술 대부분이 그렇듯이 뮤지컬 앙상블의 역할도 고대 그리스 연극의 ‘합창단’에서 맥을 찾을 수 있다. 다수의 배우들이 전지적 시점에서 극적 갈등의 핵심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거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하고, 주역이 내린 결정에 대한 다수 대중의 반응이나 주인공을 둘러싼 극 중 세계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극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의 깃발을 치켜든 민중의 에너지를 무대에서 구현하고, <지킬 앤 하이드>에서 극단적으로 빈부격차가 나뉜 사회에서 계층 간의 증오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앙상블 신이다. 이러한 앙상블 신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와 드라마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로 만들 수 있는 에너지를 극대화해서 관객들을 열광하게 한다. 뮤지컬에서 좋은 앙상블 신은 영화나 드라마가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몹신을 통해서 만들 수 있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뮤지컬 앙상블
사실 ‘뮤지컬 앙상블’이라는 말에서 좀 더 즉각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화려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코러스 라인>의 ‘One`이나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코인댄스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이미지화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 앙상블 신의 뿌리는 현대 뮤지컬의 어머니뻘이 되는 보드빌과 레뷔에 있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반짝거리는 쇼 의상을 맞춰 입고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면서 고난도의 테크닉과 빼어난 몸매를 과시하는 보드빌은 남성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가장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장르였다. 1907년 브로드웨이 뉴암스텔담 극장에서 막을 올린 <지그펠드 폴리스(Ziegfeld Follies)>가 그 대표작인데, 이 작품의 창조주인 플로렌츠 지그펠드는 그로부터 20년간 레뷔 스타일의 보드빌 쇼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급의 볼거리를 관객들에게 제공했고 <지그펠드 폴리스>는 명실공히 브로드웨이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지그펠드는 보드빌 전성기가 저물어갈 시점이었던 1928년 최초의 북뮤지컬로 손꼽히는 <쇼 보트>를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노하우를 다음 세대의 뮤지컬에 고스란히 전할 수 있었다. 미시시피 강 인근을 돌면서 선상에서 화려한 공연을 보여주는 ‘쇼 보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도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앙상블 신은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북뮤지컬이 점차 다양하게 발전해가고, 컨셉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대안이 되면서 전통적인 앙상블 신은 다소 고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밥 포시가 보여주는 어두운 관능이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캣츠>처럼 현대무용에 뿌리를 둔 앙상블 신은 뮤지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반짝이는 의상을 차려입은 장신의 늘씬한 미녀들이 하이힐을 신고 묘기처럼 아슬아슬하게 군무를 추는 장면은 점차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브로드웨이 42번가>나 <코러스 라인>, <프로듀서스>처럼 뮤지컬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뮤지컬에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앙상블로 할 수 있는 것
비록 배역에 이름이 없다고 해도, 앙상블은 뮤지컬 작품에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름 없는 배역을 일컫는 엑스트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역할을 한다. 극의 진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거나 미미하게만 개입하는 엑스트라와 달리, 앙상블 신은 작품의 핵심에 닿아있는 경우가 많다.
대극장 규모의 뮤지컬이라면 앙상블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애초에 영화나 TV드라마와 같은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 없는 무대극에서 상징적인 장치들로 그 빈자리를 메울 수밖에 없고,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앙상블이다. 앙상블의 춤과 노래는 드라마상으로 스케일이 크고, 상징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주연 배우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앙상블은 실제 무대에 선 것이 스무 명의 배우라고 해도. 스무 명의 노래와 춤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이야기, 또는 한 시대나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표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규모가 큰 작품일수록 크리에이터는 앙상블 신을 만들 때 더 많은 창조성을 발휘해야한다.
춤과 노래에 모두 프로페셔널한 역량을 갖춘 다수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구현하는 스펙터클은 분명 뮤지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고유의 매력이자 이 장르만의 자산이다. 보드빌 시대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볼거리로서의 앙상블부터 극장 안에 현실 세계의 거대한 사건이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까지 표현하는 앙상블까지 스타일은 각양각색이지만 그 효용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0호 2011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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