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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빌리 엘리어트>와 대처리즘 [No.86]

글 |김영주 2010-11-08 5,457

 

80년대 초반 출생자 중에는 어린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장개석, 막사이사이, 맥아더와 나란히 꽂힌 마가렛 대처의 위인전을 읽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위인전을 읽어서든 한국의 주류 언론을 통해서든, 마가렛 대처를 강력한 지도력으로 ‘귀족노조’를 굴복시키고 파업과 생산성 저하로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원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한국인들에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였던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왕과 장미의 나라 영국에서 모든 이들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던 동화 속의 ‘프린세스’가 거식증과 자살 기도, 배반과 모욕이 뒤엉킨 자신의 결혼 생활을 까발렸을 때처럼 말이다.
만인에게 사랑받으면서도 가장 가까워야 할 이들과는 증오밖에 주고받을 것이 없었던 왕세자비가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절을 전장보다 나을 것 없는 왕궁에서 소진하고 있을 때, 그 왕국의 실질적인 1인자였던 또 한 사람의 여인 역시 자신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마가렛 대처, 대서양 건너 대한민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철의 여인’, ‘영국병을 치유한 진정한 리더십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발레에 대한 꿈을 키우는 어린 빌리와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생각하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에게 <빌리 엘리어트>는 예상 밖의 작품일 것이다. 쥐방울 만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이 나쁜 놈아!’를 외치고(실은 이마저도 원작의 대사를 상당히 완화한 표현이다), 아버지와 장성한 맏아들이 서로 평등하게 주먹질을 하면서 뒹구는 장면만큼 당황스러운 것은, 파업 중인 광부들이 어린아이들과 소리 높여 부르는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마가렛 대처 당신이 죽기를 바라네’라는 요지의 노래다.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이자 뛰어난 위인인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왜 저 가난한 탄광 마을의 남녀노소에게 미움 받고 있는가.

 

95년 삼성의 이미지 광고에 쓰인 ‘아무도 이 사람을 구멍가게 둘째딸로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카피가 필부필부의 가슴에 성공 신화의 이미지를 남겼지만 사실 마가렛 대처는 구멍가게 둘째딸이라기보다는, 자수성가한 상인 출신으로 시장의 자리까지 올랐던 보수당 정치인의 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서 신분 상승을 이룬 사람들이 오히려 강경한 보수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자신의 성공이 인간의 삶의 수준은 사회적인 지원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증거라고 믿고, 자신을 받아들여 준 기존 시스템에 충성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마가렛 대처, 그리고 그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모두 이 유형에 속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마가렛 대처의 악명 높은 별명 중에 ‘우유 날치기범(Milk Snatcher)’이라는 것이 있다. 1970년대 초, 보수당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여성 장관이 된 대처가 교육부 장관으로서 추진한 가장 유명한 정책이 우유 무료 급식 중단이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경멸조의 별명이다. 여성으로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수상의 자리까지 오른 대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녀는 유럽식 사민주의보다 미국식 자유주의를 믿었고, 복지와 평등 대신 경쟁과 자율이 도입되어야 영국이 과거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파했다. 대처는 정권을 잡자마자 영국 북부의 강력한 탄광 노조를 대상으로 한 장기전을 위해 은밀하게 해외에서 광물 자원들을 수입해서 비축하는 철저한 사전 준비에 돌입했다. 마가렛 대처는 1979년부터 90년까지 11년간의 집권 기간에 국영 기업 50여 개를 민영화하고, 복지, 문화, 교육 예산을 대폭 감축하면서 공무원 수를 75만 명에서 64만 명으로 줄였다. 영국 공무원 일곱 명 중 한 명을 내쫓는 대규모 인원 감축이었다. 영국이 IMF의 금융 지원을 받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 이 모든 희생의 명분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결과 재정 악화의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던 영국 경제가 회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파업이 벌어질 낌새라도 보인다 싶으면 국내의 주요 경제지들이 앞다투어 본받으라고 요구하는 강력한 대처리즘의 결과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실업, 가정불화, 공교육 붕괴 등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불안한 내면으로 보호 장치 없이 전쟁터에 내던져진 세대, 바로 대처의 아이들(Thatcher’s Children)이 그녀의 시대가 남긴 또 하나의 얼굴이다. ‘대처의 아이들’이라는 용어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사회적 약자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지원이 하루아침에 끊긴 상태에서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로 내몰린 이들의 혼란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한다. <빌리 엘리어트> 이전에도 <풀 몬티>와 <브래스드 오프> 등 이 시대를 다룬 많은 작품이 있었다.

 

산업혁명 당시 끔찍한 환경에서 착취당했던 영국의 노동자 계급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기가 열린 것은 양차 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전후 폐허가 된 산업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길고 참혹한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의 수만큼 노동 인구는 줄어들어 있었다.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조직을 구축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수탈의 대상이었던 노동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승리의 경험과 연대 의식은 그들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빌리 엘리어트>의 인상적인 테마곡 중 하나인 ‘하나가 되어(Solidarity)’가 다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와 그의 정부가 표적으로 삼아 산산조각 낸 것이 바로 이 자부심과 형제애였다. 실제로 대처와 그 후계자가 실각한 후 토니 블레어의 10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광부들은 예전 같은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시대는 바뀌었고, 영국 북부의 광부들은 나라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의 생산자들이 아니라, 죽어가는 한 시대의 유물로 밀려난 이후였다.

 

노동조합은 절대선이 아니라 하나의 이익 집단이고, 대처와의 승부에서 무리한 자충수를 둔 것이 그들의 패인 중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벼랑 끝에 밀린 채 붙들고 있었던 연대 의식은 이 삭막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각자일 때는 별 볼 일 없고 미약한 존재이지만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믿고 ‘우리’가 되어 싸울 때, 우리보다 더 큰 힘과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때 바람 속의 촛불처럼 불안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 믿음에 대한 뮤지컬이기도 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6호 201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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