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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웨버와 함께하는 숨은 그림 찾기 [No.83]

글 |김문정 사진제공 |나인컬처 2010-09-07 5,301

김문정의 Music Finder

웨버와 함께하는 숨은 그림 찾기

 

2006년 당시 <에비타>를 준비하던 어느 날 ‘체 게바라’ 역할을 맡았던 남경주 선배는 음악감독인 내게 멜로디 한 부분을 가리키며 가사 때문에 음정을 약간 고쳐도 되겠냐고 물어온 적이 있다. 선배의 제안이 가창자의 입장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별 이의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럴 수가! 공연을 올리고 그것도 2주쯤 지나서야 그 판단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멜로디는 극중 여러 역할(웨이터, 수위, 기자, 군인 등)로 등장하여 사회자적인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하거나 진행시키던 체의 다른 넘버와는 달리 에바에게만 들리는 양심의 소리였던 것이다.

2소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멜로디는 예고도 없이 불쑥 불쑥 다른 음악에 간헐적으로 섞여있어 특별히 염두에 두고 듣지 않으면 쉬 지나치기 쉽고, 음정도 굉장히 까다로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내 해석대로 체의 ‘질타’였고, 에바의 ‘양심’의 소리였다면, 그 멜로디가 잘 부각되고, 반복되는 멜로디 라인임을 잘 알 수 있도록, 음정 하나, 템포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작곡의 의도에 맞게 지켜줬어야 했다. 이후 뭔가 한방 얻어맞은 듯한 사건이 있은 후, 그렇게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있는 웨버의 멜로디 라인들을 찾아내는 흥미로운 놀이가 시작됐다. 연습 전 충분히 사전준비를 해왔지만 꼭꼭 숨어있는 웨버의 멜로디 라인은 공연을 올리고, 모든 것이 가장 가까이 눈앞에 펼쳐지고 나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비타>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멋진 드레스를 입고 발코니에 서서 몇 만 군중을 향해 가창력을 과시하며 우아하게 부르는 여주인공의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이다. ‘국모로 이 자리에 서기까지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이 감사하다. 우리 그동안 힘든 시간을 겪었으니 이제부터 좋아질거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내 조국!’ 굉장히 감동적인 연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에바 페론의 이 말은 진심일까, 위선일까? 추호도 거짓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넘버를 다른 각도에서 보자.

<에비타>는 극장에서 상영하던 영화를 중단하고 에바의 죽음을 속보로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감싸 안는 듯한 거대한 장송곡이 객석에 내려앉게 된다. (당시 이 부분을 무대 위 앙상블의 소리보다 몇 배나 크게 녹음, 믹싱하여 LG아트센터를 위엄 있게 쩌렁쩌렁 울리게 하자는 설도윤 대표님의 지시가 있었더랬다.) 장송곡에 이어 극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사실 두 인물이 같은 세대 인물은 아니다.)가 등장해서 ‘오 멋진 광경, 오 멋진 쇼~!’라고 비꼬는 노래를 부른다.

아마 <에비타>를 본 관객이라면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아시는가? 이 노래의 멜로디는 우리가 그토록 잘 아는 ‘Don`t Cry for me Argentina’와 똑같다는 것을! 사실 ‘오 멋진 광경, 오 멋진 쇼~!(O, What a Circus! O, What a Show!)’의 첫 부분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웬 서커스? 웬 쌩쇼?’다. 오케스트라 연습 초반에는 웅장한 장송곡 뒤에 우스꽝스럽게 나오는 ‘O, What a Circus! O, What a Show!’의 전주를 보고 ‘이거 맞아? 하며 심지어 뭔가를 더 채워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물론 편곡은 다르지만 웨버는 왜 굳이 어느 면으로 보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O, What a Circus! O, What a Show!’와 2막의 ‘Don`t Cry for me Argentina’ 이 두 곡을 같은 멜로디로 작곡했을까? 그리고 ‘과연 어떤 곡을 먼저 썼을까?’ 5초 안에 대답해봐라. 땡! 정답은 그 유명한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아닌 ‘O, What a Circus, O, What a Show!’를 먼저 작곡했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확신한다. 나중에 웨버를 만나게 되면 꼭 확인하고픈 인생의 숙제(?)이기도 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웨버가 ‘Don`t Cry for me Argentina’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뭔지 짐작이 가시는가? 2막 첫 곡, 작품 안에서 가장 유명하고, 에바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장면에서 풍성한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고급스럽게 연주하는 이 곡이 결국 ‘웬 서커스? 웬 쌩쇼?’라는 거다. ‘너무 말이 길었죠, 나의 진심을 믿어주세요’ 하며 고귀한 노래의 마지막이 채 끝나기도 전 에바는 뒤돌아서 ‘두고 봐! 귀족들 가만 놔두지 않아. 이제 국민들 모두 나를 찾게 만들거야’라며 독기어린 눈빛을 보낸다. 이런 에바의 마음을 눈치 챈 체 게바라는 계속 자신만의 2소절 멜로디로 딴지를 걸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골 출신이 에바가 탱고 가수 마갈디를 따라 처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 노래 ‘Buenos Aires’ 중간에 신나게 춤을 추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나오는 멜로디는 에바를 깔보는 귀족들이 후에 여러 번 반복해 부르는 중요 테마를 삼바 리듬으로 아주 신나게 변주해 놓은 것이다. 이는 음악적으로 에바의 도시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권력자인 페론과 함께 살던 어린 정부가 에바에게 쫓겨나며 부르는 노래의 주요 멜로디 한 부분도 이후 계속 반복되는데, 나중에 에바가 귀족을 내쫒을 때, 페론이 병들어 신음하는 에바를 끌어안고 ‘이제 어떡하나’ 한탄할 때, 모두 쫓겨나는 상황에 등장하는 ‘쫓겨남’의 테마로 반복 사용된다.

에바의 야욕이 불타오를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테마, 남자들을 갈아치울 때의 테마(재밌는 것은 그녀가 결국 정착한 페론을 만날 때도 이 테마가 사용된다. 드라마적으로 에바가 페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에바의 캐릭터가 어떠한지 가늠케 해준다), 무시당할 때의 테마 등 상황 상황마다 노래와 연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 멜로디들을 발견할 때면 흥미로운 숨은 그림 찾기의 해답을 찾은 듯한 쾌감이 느껴진다.

‘웨버는 이 작품 참 쉽게 썼겠다! 같은 멜로디를 계산 잘해서 반복하면 되니까!’ 하면서도 ‘얼마나 고민했으면 이리 자로 잰 듯 오차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된다.

 

에바가 죽기 전 국민들에게 마지막 방송을 하던 장면을 연습하던 때가 기억난다. 이미 쇠약해진 에바는 전성기 시절 국민들에게 했던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일부분을 잠깐 부르는데, 그에 앞서 아홉 소절 정도 짧은 부분을 부른다. 그런데 그 아홉 소절 멜로디가 어찌나 난해하고 기괴(?)하던지 당시 두 명의 에바(김선영, 배해선)와 첫 연습을 하며 ‘아니, 왜 이래 이 부분? 웨버가 졸면서 썼나?’ 하는 말을 나눴다. 나 역시 그 당시 피식 웃으며 첫 연습을 진행했다. 이후 웨버! 난 알고 말았다. 그건 결국 그녀가 ‘Don`t cry for me Argentina’을 진심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였다.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녀의 심경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진심이 빛을 발할 수 있으니까. 일부러 천재 작곡가가 그리 썼을 리가 없지 않나.
흔히 한국 뮤지컬들을 관람한 후 ‘귀에 남는 곡이 없다’라고 자주 말한다. 귀에 남는 곡이 없는 게 아니라 좋은 곡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독성이 있는 작품은 오래간다. 중독되려면 길들여져야 하고 길들여지기 위해선 우선 친근감을 주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한국 뮤지컬에 좋은 곡들이 없는 게 아니라 2시간 30분 동안 좋은 곡들에 익숙해질 시간이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에비타>에 관한 얘기를 해보리라 마음먹고 오래 전 자료들을 들춰보던 중 악보를 보다 잠깐 놀라 또 한 번 피식 웃는다. 그 때 발견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또 빼꼼 고개를 내민다. 요녀석! 요런 뜻으로 여기 클라리넷 연주로 슬쩍 변장하여 숨어있었구나!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3호 2010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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