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를 바라봤고, 그 순간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자유를 바랐고,
그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 죽음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그리고 파멸이 기본 코드가 되는
모든 서사의 시작에는 대개 이처럼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팜므파탈의 존재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카르멘이다.
이들은 작품 안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끝을 맺으며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다가가면 도망치고 돌아서면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통제 불가능한 이들,
팜므파탈의 근원과 매력을 되짚어본다.
치명적인 매력녀의 탄생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남성들을 종속시키는 팜므파탈은 그 이름처럼 치명적인 불행을 야기하는 여성들을 총칭한다.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남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요부다. 이들의 마력에 빠진 남성들은 파멸의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끝내 그녀에게 다가가 미련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세상에 나온 팜므파탈은 문학 작품에 이어 미술과 연극, 무용,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활용되고 있다. 뮤지컬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단연 돋보인다. 국내 공연에서도 올해만 벌써 <레베카>의 레베카,
<살짜기 옵서예>의 애랑, <시카고>의 벨마 켈리가 캐릭터의 위력을 뽐냈고, 집시계의 양대 캐릭터인 에스메랄다와 카르멘도 배턴 터치를 마쳤다. 특히 카르멘은 얼마 전 국립오페라단과 고양문화재단의 오페라로도 무대에 올라 대표 팜므파탈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팜므파탈의 탄생 시점은 19세기 말이다. 당시 유럽은 전통적인 성(性)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자의식에 눈뜬 신여성들이 목청을 높이던 시기다. 여성들은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육체에 얽힌 편견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행동과 주장을 펼쳤다. 숙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적 여성상에 익숙하던 남성들은 동등한 성과 해방을 외치는 여성들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꼈다. 그런데 남성들은 희생자에서 지배자로 돌변한 여성에게 매혹당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남성의 욕망과 공포가 팜므파탈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되었고, 이런 심리적인 요인들이 캐릭터로 구체화돼 곧 예술 전반에 확산됐다.
이후 대중 매체들이 매혹적인 팜므파탈들을 지겹도록 미화하고 선전하면서 캐릭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될 수 있었다. 특히 TV나 영화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지금의 대중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섹시한 여성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모습은 이런 과정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팜므파탈은 상당히 전형화됐지만 그럼에도 창작자들이 이들을 찾는 것은 그 캐릭터가 지닌 불온하고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 때문이다. 가령 남자들만 있는 무인도에 출현한 미녀는 그 존재 자체로 수많은 드라마를 파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미녀가 남자들을 상대로 ‘밀당’이나 ‘어장 관리’의 기술이라도 시전하면, 무인도는 조만간 생지옥이 된다. 그중 압권은 그렇게 남성에게 불행이나 몰락을 선사하는 팜므파탈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창작자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런 공멸의 결말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네 가지 색 팜므파탈
팜므파탈의 속성에는 남성들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들이 내재되어 있다. 팜므파탈들은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이런 이미지들 중 특정한 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캐릭터의 외모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매혹적인 이미지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으로 남성의 눈을 멀게 하여 이후 참혹한 재앙을 초래하는 팜므파탈이다. 그녀를 만나는 남성들마다 한눈에 반해 혼자 애간장을 태우게 된다. 이 유형의 가까운 예로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가 있다. 집시라는 태생적 야성과 억압된 욕망을 춤으로 표출하는 그녀의 모습에 꼽추도, 군인도, 신부도 단숨에 무장 해제된다. 에스메랄다 자신은 오로지 페뷔스만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고통을 준 죄로 그녀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로 함께 걸어간다.
신비한 이미지의 팜므파탈은 베일에 쌓인 정체와 비밀을 감춘 듯한 표정과 눈빛으로 남성들이 스스로 매료되는 마력의 소유자들이다. 이 신비한 매력의 특징은 특히 남성의 정복욕을 자극해 몸과 마음을 자신의 영향 아래 종속시키는 요부의 전형이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클레오파트라다. 그녀는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최고의 권력자들을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다. 올해 공연된 <살짜기 옵서예>의 애랑도 이런 매력을 무기로 배비장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며 강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편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은 음탕한 이미지다. 순결하고 정숙하며 순종적인 여인들이 채워줄 수 없는 남성의 욕망을 자극해 이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팜므파탈이다. 남성들의 욕망이 가장 많이 투영된 이 캐릭터는 팜므파탈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카르멘을 꼽을 수 있다. 이야기의 처음에 호세는 성실한 병사였지만 아름답고 정열적인 카르멘의 매력에 빠지면서 그녀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만다. 본능에 충실한 카르멘은 호세를 유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만, 그의 집착적인 사랑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도망치려 한다. 이것이 같은 집시인 에스메랄다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파멸의 아이콘으로서 팜므파탈의 정체성은 냉혹한 이미지에 있다. 이 이미지의 요부들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표적이 되는 남성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극단적으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형으로, 도도하면서도 극히 차가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카고>의 벨마 켈리가 대표적 인물었이지만, 올해 처음 등장한 <레베카>의 레베카는 단숨에 악마적 매력으로 ‘치명적’의 사전적 의미를 제대로 보여줬다. 그녀는 심지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압도하며 새로운 팜므파탈의 출현을 알렸다.
다만 이런 팜므파탈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은 동시에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성들의 속성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팜므파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뭇 남성을 유혹하는 악녀에서, 규범과 윤리에 갇히지 않고 본능대로 살아가는 신여성의 얼굴로 재해석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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