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知音)’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친구인 종자기는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연주를 했는지 알아주었는데, 종자기가 죽고 나자 백아가 더 이상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례한 말이다. 뮤지컬계에서는 거문고의 줄을 끊게 하는 예술적 동반자들이 대형 사고를 치고 뮤지컬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명작 뮤지컬에는 명품 콤비가 있다. <레 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를 만든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와 알랑 부브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와 <에비타>의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엘리자벳>과 <모차르트!>의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콤비이다. 그러나 아직 국내 뮤지컬계에는 이들과 어깨를 겨눌 만한 콤비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국내 협업 과정을 살펴보며 명품 콤비의 탄생 가능성을 짚어보고, 그동안 잘 언급되지 않았던 해외 명콤비들을 소개한다.
한국의 뮤지컬 명콤비를 기다리며, 국내 협업 과정
브로드웨이에는 유명 뮤지컬 콤비들이 존재한다. 길버트와 설리반,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등 이와 같은 뛰어난 작곡가와 작가의 만남이 브로드웨이 뮤지컬 역사에 중요한 주춧돌을 얹어 놓았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에는 뮤지컬 콤비라고 할 만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국내 뮤지컬 제작 과정에서 협업 과정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작품의 완성도는 협업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말한다. 왜 유독 뮤지컬 장르에서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중요한 만큼 어려운 협업
영화나 연극, 드라마와는 다르게 뮤지컬은 기본 설계도가 되는 대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 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참여해야 한다. 뮤지컬에서는 말과 더불어 음악이 주요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대본은 작가 혼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작사가, 작곡가의 역할이 합쳐졌을 때 완성된다. 기본 뼈대가 되는 대본 자체가 협업을 요구하기 때문에 타 장르에 비해 협업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앞서 말한 대로 작가, 작사가, 작곡가가 구성된다면 뮤지컬 대본을 완성하기 위한 기본 멤버 구성이 된 것이지만 실제로 상업 프로덕션의 경우, 프로듀서와 연출가가 작품 개발 과정에 참여한다. 뮤지컬에서 대본은 정확한 설계도라기보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미완의 지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연출가를 비롯 안무가, 무대디자이너 등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면서 뮤지컬 대본은 끊임없이 변모해 간다. 뮤지컬 대본은 다시 씌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미완의 기획서인 셈이다. 종합예술로서의 뮤지컬이란 장르는 타 장르보다 음악과 연극, 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생명체와 같다. 영화에서는 영상이 주가 되고 음악이 부수적인 요소인 반면, 뮤지컬에서는 극과 음악이 한 몸을 이룬다. 아무리 극이 좋다고 하더라도 음악이 극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 뮤지컬은 좋은 작품이기 힘들다. 그러한 이유로 뮤지컬은 ‘협업이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만큼 중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 협업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꿈을 꾸는 협업이 어려운 과정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티스트들의 가치관이나 취향을 통일시키는 것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고된 일이다. 취향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호불호의 문제다. 탐미적이고 자존심이 생명인 예술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쉽게 포기하거나 굴복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설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애초에 예술적 취향이 어느 정도 비슷한 아티스트들로 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티스트들의 취향을 충분히 고려해 팀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협업 과정에서 마찰은 불가피하다. <미카도>를 비롯한 명작을 남겼던 길버트와 설리반은 명콤비였지만 출신 성분부터 성품이나 예술적 취향에서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결혼 생활과 마찬가지로 명콤비는, 어느 정도 미적 수준이나 취향이 비슷하다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율이 매우 중요하다. 아티스트들 간의 조율은 프로듀서나 연출가가 맡게 된다. 해외에서는 프로듀서가 작품 개발에 개입하는 비중이 높고 조율도 책임지는 편이지만, 국내에서는 주로 연출가가 조율을 담당한다. 국내 뮤지컬 제작은 연극처럼 여전히 연출가가 주도하는 시스템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프로듀서는 아티스트들 간에 치열한 대립이 있을 경우, 둘 중 어느 누구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제 3의 안을 제시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간다고 한다. 그만큼 아티스트들 간의 자존심 대립이 치열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협업의 다양한 유형
뮤지컬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작가, 작곡가, 작사가는 물론 연출가, 안무가, 프로듀서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의견을 교류한다. 무대화하기 이전 뮤지컬 대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는 작가, 작곡가, 작사가와 프로듀서가 함께 작품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작품이 개발되면 연출가가 합류해서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상업 프로덕션의 경우 이러한 작품 개발 과정을 겪지만 아티스트들이 의기투합하여 개발하는 경우, 보통 핵심 아티스트인 작가와 작곡가, 작사가의 협업이 이뤄진다.
국내에서도 공연한 <씨 왓 아이 워너 씨>의 마이클 존 라키우사처럼 글, 가사, 음악을 혼자 다 해내는 괴물도 있지만 보통의 아티스트들은 한 가지 재능을 갖게 마련이다. 작사가가 별도로 있는 경우가 있고, 작가나 작곡가가 작사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서는 작가가 작사를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해외에서는 작곡가가 작사를 하는 경우도 흔히 접할 수 있다. 미국의 자존심 손드하임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로 데뷔했다. 그 이후 또 다른 작곡가의 노래에 작사한 작품이 참패하자, 더 이상 작사가로만 참여하진 않을 것을 선언했다. 문학적 재능이 있는 작곡가라면 작사와 작곡을 병행하는 것이 유리하다. 음악을 알기 때문에 음악 형식에 맞는 가사를 쓸 것이고, 작사가와 작곡가가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피곤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사와 작곡을 병행하는 이지혜 작곡가의 경우, “어떤 곡은 가사와 멜로디가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 노래들은 보통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가사와 노래가 마치 한 몸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 작사가와 작곡가의 이상적인 협업일 텐데, 이미 만들어질 때부터 한 몸으로 태어나니 이질감이 생길 여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해외에서는 주로 별도의 작사가를 두는 편이다. 국내에서 별도의 작사가를 두는 경우는 흔치 않다. 주로 작가나 연출이 작사에 깊게 개입한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아도 작사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빨래>의 극본과 가사를 함께했던 추민주 연출은 작곡가에게 “제발 사설시조를 가져오지 말아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지혜 작곡가는 리듬감이 있는 가사는 가사를 보고 있으면 노래가 절로 나온다며 작사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음악에는 형식이 있는데, 전문 작사가가 아닌 경우 그것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작곡가로서는 그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영웅>의 한아름 작가는 작곡가에게 그럼 먼저 음악을 쓰면 거기에 맞춰 가사를 써보겠다고 했다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했다고 했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작곡가들의 고충도 심하다는 말이다.
한국의 뮤지컬 콤비
협업의 중요성은 앞서 누차 강조해왔다. 오래된 연인들이 싸우는 방법도 잘 알고, 화해하는 방법도 알듯이,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한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공감대는 협업의 큰 힘이 된다. ‘바담 풍’ 해도 ‘바람 풍’으로 알아듣는 찰떡 호흡은 상대방의 신뢰와 많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각 분야의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오랜 경험을 거쳐 예술적 시각을 공유하게 될 때 명콤비로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국내 뮤지컬계에서 콤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블루사이공>, <들풀> 등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김정숙 작가(연출가), 권호성 작곡가(연출가),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송산야화>를 함께 작업한 장유정 작가(연출가), 김혜성 작곡가, <뮤직 인 마이 하트>, <폴라로이드>의 성재준 작가(연출가), 원미솔 작곡가 등이 국내 콤비로 꼽을 수 있는 이들이다. 작가, 작곡가는 아니지만 <사춘기>, <마마 돈 크라이>의 이희준 작가, 김운기 연출 콤비도 있다. 김정숙, 권호성 콤비는 같은 극단에서 마음을 맞춘 경우고, 장유정, 김혜성 콤비는 학교에서, 성재준, 원미솔 콤비는 어려서부터 뮤지컬을 좋아했던 동네 오빠 동생 사이였다. 이희준, 김운기 콤비는 부부다. 이와 같이 국내 뮤지컬 콤비는 사적인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사적인 관계를 통해 신뢰도가 높았고, 또 사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최근 제작 방식은 프로듀서들이 주도하는 기획 제작 방식이 많다. 아티스트들만의 작업이 아니라 상업 자본이 들어온 창작 과정이다 보니 체계적이긴 하지만 작곡가, 작가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리고 기획사 주도의 작품 개발일 경우 프로듀서나 연출가가 일단 작가를 선정해 대본 개발을 먼저 한 후 작곡가가 나중에 참여하는 방식이 많아서 시작 단계부터 작가와 작곡가가 호흡을 맞춰 작품을 개발하는 경우와는 협업의 효과 면에서 차이가 있다. 워크숍이나 창작 교육 기간이 부족해서 창작자들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할 기회가 적은 것도 뮤지컬 콤비의 등장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지난해 시작한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를 통해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리딩 공연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고, 한예종의 음악극 창작과나 사설 뮤지컬 창작 단체 ‘연필과 지우개’ 같은 곳에서 꾸준히 활동하여 작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협업을 해나가는 아티스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박천휘 번역가는 “누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긴밀하게 이루어진 작업”을 좋은 협업으로 꼽았다.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라키우사처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할 경우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여러 아티스트의 협업에서 발생하는 창조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성재준 작가 및 연출가는 “상대방이 제가 원하는 것과 완벽하게 같은 색깔을 내길 바라지 않아요. 저는 블루를 원했는데, 상대가 딥블루 또는 바이올렛이 섞인 블루를 보여줬을 때 훨씬 좋을 수 있거든요.” 파트너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상상력을 제시해서 그것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창조적인 스파크가 일어날 때 협업은 더욱 빛난다. 그래서 많은 창작자들이 뮤지컬 제작에서 협업이 가장 힘든 과정이면서도 그것이 아름답게 폭발할 때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다. 국내에서도 한 아티스트의 이름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뮤지컬 콤비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 이 기사는 올해 서울아티스트페스티벌 심포지엄에서 일부분 사례를 인용했습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8호 2011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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