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 여성의 날 특집 기획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더뮤지컬이 공연계 ‘여성 서사 작품’의 현황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먼저, 여성 아티스트와 여성 서사 작품을 다루는 공연예술월간지 『여덟 갈피』를 발행한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여성 중심 서사 뮤지컬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난설> <브론테> <여기, 피화당> 등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속 주목할 만한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 해당 작품의 배우와 창작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뮤지컬 <브론테>는 여자는 글을 쓸 수 없었던 시대에도 굳건히 글을 썼던 브론테 자매의 삶에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가 세 자매에게 도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강지혜는 지난 2022년 초연에 이어 다시 한번 『제인 에어』를 탄생시킨 세계적인 작가이자 브론테 자매의 장녀 샬럿 역을 맡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주저함 없이 사랑을 꼽을 만큼 세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무대에는 언제나 사랑이 가득하다.
<브론테>와 2년 만에 다시 만난 소감이 어떤가요?
초연이 끝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초연에 출연한 배우들과 창작진이 다시 모여서 이 작품의 재 공연을 올릴 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을 정도로 <브론테>는 저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애정이 큰 작품이에요. 그런 작품을 다시 만나니 좋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초연 당시 대부분의 회차가 매진되고, 연장 공연을 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흔치 않은 여성 3인극이라는 점에 관객들이 열광했어요.
창작진 분들이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기에 꼭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더더욱 컸어요. 극 중 샬럿이 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여성 중심 작품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브론테>가 잘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초연을 함께했던 모든 배우에게 있었어요. 특히 <브론테>는 배우뿐만 아니라 창작진, 스태프도 대부분 여자거든요. 그래서 더 애틋하고 각별한 마음이 컸어요.
무대 위에서 한 인물로서 살아있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감정과 목적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잖아요. 지혜 씨가 생각하는 샬럿은 어떤 인물인가요?
사실 샬럿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장녀가 됐어요. 그래서 장녀로서, 언니로서 에밀리와 앤을 이끌어 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더욱 컸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작가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을 거고요. 샬럿은 그 자체로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인데, 거기에 언니로서의 책임감과 글에 대한 열망,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더해지니 삶의 무게가 굉장히 무거웠을 거예요.
사실 저와 샬럿은 많이 달라요. 샬럿에게는 독선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면모가 있는데, 저는 평화주의자거든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스타일이고, 삶이 꼭 완벽하지만은 않아도 되는 스타일이죠. (웃음) 그래서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샬럿에게 상처 받을 때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샬럿과 가까워질수록 그 삶의 무게가 느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샬럿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컸던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컸던 거고요.
이번 시즌에 샬럿을 다시 만나면서 새롭게 든 생각이 있나요?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샬럿은 불쾌해해요. 자신에게는 ‘너의 오만함과 이기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충고를 하는 반면, 에밀리에게는 ‘시간이 흐르면 너의 글은 더욱더 빛나게 될 것’이라고 응원을 해주니까요. 샬럿은 글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 편지의 내용을 보고 에밀리를 의식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시즌에 다시 샬럿을 연기하면서, 사실은 샬럿이 마음속으로 에밀리의 재능을 누구보다 믿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믿음을 바탕으로, 초연 때와는 조금 다른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작가가 그렇듯 배우 역시 대중의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대중의 평가는 어떤 창작물이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거잖아요. 브론테 자매도 자신들의 글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몰랐듯이, 배우들도 작품을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관객분들 앞에 서기 전까지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절대 알 수가 없죠. 배우로서 살아가는 한 평생 그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대에 서는 걸 멈추고 싶진 않아요. 저는 연기를 사랑하고, 제 연기는 무대 위에 올라 관객 앞에 서야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거니까요.
사실은 과거에 1년 정도 불안장애를 겪은 적이 있어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안감이 너무 크니까 모든 걸 내려놓고 싶더라고요. 그러다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서 조금씩 나아졌어요. 기존에는 내가 내 몫을 잘 해내는 데에만 집중을 했다면, 내가 전해야 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통해 행복해할 관객분들의 마음에 집중하게 된 거죠. 집중의 대상을 바꾸니까 불안감이 훨씬 덜어지더라고요. 이제는 그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무대에서 가장 큰 행복감을 느껴요.
관객이 공연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위로와 응원을 얻는다는 점이 공연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지혜 씨의 출연작을 보면 특히 여성 관객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 많아요.
<유진과 유진>을 할 때 특히 느꼈어요. 그때 편지나 SNS 메시지를 많이 받았는데, 극 중 유진이들과 유사한 상처를 가진 분들이 공연을 보고 힘을 많이 얻어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관객분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작품을 더 많이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작품을 허투루 만들지 않았구나 싶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요. <유진과 유진>을 공연할 때는 관객분들과 함께 앉아서 손을 잡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정말 많이 느꼈어요. 작품을 통해 관객분들만 힘을 얻어가신 게 아니라, 배우들도 관객분들 덕분에 힘을 많이 얻었죠.
<키다리 아저씨>도 저에게 굉장히 소중한 작품 중 하나예요. 저는 제가 타인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인데,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가 그 가치관과 정말 잘 맞는 역할이었어요. 제루샤도 자기가 받은 사랑을 주변으로 확장하는 인물이니까요. 그 외에도 저와 제루샤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정말 많아서, 공연을 하는 내내 저와 제루샤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키다리 아저씨> 공연할 때도 관객분들께 ‘공연을 보며 힘을 얻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저 역시 <키다리 아저씨> 공연을 하며 힘을 많이 얻어갔던 기억이 나요. <안테모사>도 빼놓을 수 없죠.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누군가와 가족이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인정과 사랑과 이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작품이에요. 이렇게 건강한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싶어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많이 제작됐고, 그와 동시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는 여성 배우도 많아졌죠. 지혜 씨는 2012년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해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대에 서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나요?
물론이죠. 어린 시절 여성 배우로서 느꼈던 한계들이 이제는 많이 허물어졌다고 느껴요. 배우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는 여성 창작진도 정말 많아졌어요. 다들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는 점이 멋있어요. 무대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예능 쪽에서도 여성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죠. 자신의 앞에 놓인 벽을 넘어서기 위해 모두가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제 대학로는 물론 대극장 공연에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전에도 다양한 모습을 지닌 여성 캐릭터가 존재해 왔지만, 이제는 조금 더 다채로운 성격을 지닌 여성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지혜 씨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결국은 사랑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그래서 사랑은 어려워요. 어떠한 사람도 완벽할 수 없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없죠. 그러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나와 함께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사랑이 피어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