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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RITIC] <시카고> 극장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No.225]

글 |정수연(공연 평론가) 사진 |JEREMY DANIEL 2023-07-05 958

 

 

뮤지컬이 포착하는 미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가장 민감하게 담아내는 것은 대중 서사다. <더 글로리>나 <모범택시>같은 사적 복수를 다룬 이야기가 요즘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뭐겠나. 유력한 법조인의 아들이면 학교 폭력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주가를 조작하고 개미들의 돈과 목숨을 빼앗아도 처벌은커녕 조사도 받지 않는 게 우리 현실이기에 그렇다. 현실의 법과 제도가 정의에 무관심할 때 대중의 서사는 그 권력과 폭력에 죄를 묻고 벌을 내린다. 거기엔 지금의 현실에서 무엇이 무너졌는지를 묻는 질문과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촉구가 있다.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마냥 해맑을 것 같은 이 장르도 제도에 대한 질문을 예리하게 던지는 의외의 면이 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은 자기네 미국에 대한 자의식을 자주 보여준다.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이 질문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해밀턴>이다. 독립 전쟁에서부터 건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을 호명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뻔한 미국 예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절이 트럼프의 미국이라면? <해밀턴>은 그 자체로 미국 정부를 향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그러기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결국 <해밀턴>의 롱런은 그 자체로 작금의 미국을 향한 발언에 다름 아니다.


비단 <해밀턴>뿐만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사이에 흑인이 있고, 인간과 자연의 사이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라고 작가 어슐러 르 귄이 말한 것 같이 소수자의 권리는 언제든 박탈할 수 있는 사회, 자기네들의 위기를 감추고자 있지도 않은 증거를 핑계 삼아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 무서운 가면 뒤에 숨은 ‘삼류 떠돌이’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이곳은 어디일까. <위키드>의 오즈는 미국의 은유다.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른 녹색 마녀가 착륙해 발붙일 곳은 여기에 없다. 인종과 계급과 젠더의 갈등으로 가득한 미국의 모습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고전 뮤지컬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더랬다. 애국이라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자기네 미국을 말하는 뮤지컬의 자의식이야말로 브로드웨이의 또 다른 전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카고>는 이런 전통의 중간에 서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외형은 <해밀턴>(전형적인 역사 뮤지컬!)과 <위키드>(전형적인 가족 뮤지컬!)처럼 전형적인 쇼 뮤지컬이다. 그래서 미국을 이야기하는 다른 작품들의 진지함과 이 작품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 가볍고 천박하고 짓궂게 자기네 미국을 쇼의 무대에 올린다고나 할까. 움베르토 에코의 책 제목을 비틀자면, ‘미국이라는 바보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인 거다.

 

 

미국이라는 ‘쇼’

 

<시카고>의 형식이 보드빌 쇼라면, 그 내용은 미국이라는 ‘쇼’다. 이 작품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내연남을 죽인 록시나 남편을 죽인 벨마는 1920년대 시카고에 실제 있었던 범죄의 주인공들을 모델로 삼은 캐릭터다. 뮤지컬에서 두 사람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처럼 실제로도 두 사람은 배심원들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놀랍다. 남자 배심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그들이 예뻤기 때문이란다. 예쁘면 다 되는 건 법의 논리가 아니라 쇼의 원리다. 살인이라는 명백한 범죄가 한순간에 무죄가 되는 이 황당한 결론이 어울리는 자리는 쇼 무대밖에 없는 거다. 재판이라는 이름의 쇼. 1920년대 미국 사법제도의 민낯이다.


이 사법제도의 옆에는 언제나 지라시 언론이 있었다. 사소한 일을 자극적인 사건으로 과장하고, 가짜 인터뷰와 사이비 전문가를 등장시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을 극대화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지라시 기사들. 감각을 자극하는 가십으로 구독자와 판매량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된 언론에게 진실 따위는 개나 줘버릴 일이다. 이 시대가 특별히 더 부패해서 그런 게 아니다. 퓰리처상으로 기억되는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의 신조도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였으니, 미국 언론의 역사에서 지라시의 횡행은 뿌리 깊은 전통인 것이다. <시카고>는 이것이 비단 마피아가 판치던 1920년대 시카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한다. 작품의 안무와 연출을 맡은 밥 포시는 아예 이 작품이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말했더랬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이기기 위해 정치적 상대를 도청한 사건에서 출발한 워터게이트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비리와 거짓에 잠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속보 경쟁에만 익숙한 언론은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을 외면했고, 대중은 진실에 무관심했으며, 정치권은 각자의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그 결과 도청의 주도자 리처드 닉슨은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결국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정치, 언론, 법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세 가지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지만, 무기력하고 기회주의적일 때 국가가 거짓말과 범죄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거짓을 밝히려는 언론은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뉴스’로 매도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검사는 수시로 해고하며, 명백한 거짓말도 딱 잡아뗀 이 한심한 쇼의 주인공이 미국의 대통령이었으니. 1920년대에는 시카고의 쇼걸이 주절대는 거짓말에 법이 놀아났지만 1970년대에는 대통령이 시전한 거짓말에 미국이 놀아난 셈이다.


<시카고>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단락된 다음 해인 1975년에 초연되었다. 원작 희곡인 <작고 용감한 여인>보다 뮤지컬이 더 차가운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쇼걸보다 훨씬 천박한 쇼를 보여준 미국을 충분히 조롱하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쇼’ 제대로 보여주기

 

<시카고>는 이 쇼가 ‘살인, 탐욕, 부패, 폭력, 사기, 간통, 배신이 가득한 얘기’임을 내놓고 시작한다. 보드빌의 형식에 맞춰 사회자가 소개하는 쇼의 레퍼토리부터 벌써 가관이다. 함께 바람피운 남자를 죽이고도 자연스레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는 록시의 쇼 제목은 ‘사랑과 헌신의 노래’, 죄의 유무보다 돈의 유무를 묻는 변호사의 노래는 ‘보석도 명품도 아닌, 나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다. 교도소의 간수가 됐든, 갇혀 있는 죄수가 됐든, 그들의 거짓말은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당당하다.


이 쇼의 재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과 가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통쾌함에 있다. 살인죄로 수감된 여섯 여자의 쇼 ‘셀 블록 탱고’를 보시라. 이들은 모두 남편을 죽였다. 남자들이 먼저 폭력, 의처증, 외도, 간통, 사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입을 모아 노래한다. 이런 놈들은 ‘죽어도 싸다!’ 그리고 확인한다. ‘그 꼴 봤으면 너라도 했을걸!’ 당당하게 무죄를 외치는 이 여자들의 탱고는 여자들이 당해온 폭력에 대한 일종의 미러링과도 같다. 상식을 뒤집고 나서야 제대로 보이는 현실을 향해 이 쇼는 가랑이 사이로 감자를 먹이는 거다. 그러다가 문득 현실은 서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헝가리 여자가 시카고에서 무려 47년 만의 교수형을 당할 때 쇼는 이 극장이 현실의 공간임을 각인시키는 거다. 죄가 없는 사람의 말은 통하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회. 우리의 쇼는 이런 공간 위에 있다. 쇼의 틀로 바라본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셀로판 투명 인간으로 남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죽이든 누군가를 속이든 무조건 승자가 되어야 하는 법. 이 쇼에 인간다운 감정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이해하거나 발견해야 할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에서 공감은 필요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재료다. 감정은 감각으로 대체된다. 눈물이나 웃음이나 탄식 같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선정적인 의상과 관능적인 춤이라는 감각의 언어가 이 쇼의 중심을 차지하는 거다. 옷을 입었다기보다 천으로 가렸다고 하는 게 맞을 만큼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언어가 요구하는 것은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보고 즐기자는 것이다. 괜한 공감이나 감동보다 감각의 직관은 현명할 때가 많다. 오락을 즐길 때도 그렇고, 현실을 직시할 때도 그렇다.


이 작품의 노래가 대부분 거짓말인 것도 이 때문이다. 뮤지컬에서 노래는 진심과 진실의 표현인데, 이건 감정을 가진 인간의 언어다. 하지만 이 쇼에서 내면의 갈등이나 고민을 노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진심을 다해 거짓을 노래한다. 그 흔한 듀엣이나 합창이 거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6명의 살인자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때나 두 쇼걸이 경쟁하듯 자기를 과시할 때 함께 노래하긴 하지만 이건 서로의 말이나 마음을 주고받는 넘버가 아니라 각자 자기의 말을 경쟁하듯 뱉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마지막에 벨마와 록시가 마침내 한 팀이 되었어도 그들 사이에 우정이나 성장이 아예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쇼는 ‘밤새 껴안고 화끈하게 춤추고 내 인생을 사랑해!’(All That Jazz)로 시작해 ‘남자와 재즈와 술, 멋진 인생이야, 살고 싶은 인생이야!’(Nowadays)로 끝난다. 시작과 끝이 제자리인 거다. 벨마 혼자 시작한 쇼가 록시와 함께하는 쇼로 바뀌었지만, 이들이 함께함으로써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들의 관계는 여전히 쇼 비즈니스일 뿐 여기에 자기 성찰은 요만치도 없다. 뮤지컬의 통념을 완전히 비웃는 결론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는 가시가 하나 숨어 있다. 두 사람이 마지막 쇼를 마치고 관객에게 건네는 말이 힌트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미국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모든 신뢰도 잃었지만, 우리 둘을 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지 알겠죠? 그러니 함께 인생을 즐겨요, 여러분!” 기가 막힌 반어법이요, 풍자요, 조롱이다. 그들이 성찰한 것은 자아가 아니라 미국이었던 거다. 살인과 배신과 거짓이 난무하는 이 쇼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결국 하나다.

‘이것이 미국이랍니다.’

 

 

더 많은 쇼를 기대하며

 

보드빌 형식을 가져온 게 아니라 아예 이 공연 자체가 한 편의 보드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카고>는 쇼에 진심이지만, 이 작품의 차가운 웃음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브레히트의 그림자다. 무대 전면에 노출되어 있는 오케스트라나, 사회자가 쇼를 소개하는 것도 그렇고, 자주 코미디의 과장과 생략을 구사하는 진행 방식도 모두 서사극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친숙한 장르에서 가장 민감한 치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관객들에게 웃으며 들이미는 능청은 현실을 반영하는 서사극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이 작품이 같은 해 토니 어워즈에서 왜 <코러스 라인>에 일방적으로 밀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코러스 라인>은 뮤지컬의 수많은 코러스를 하나하나 발견하는 이야기로 감동이라는 뮤지컬다운 결론에 충실하다. 반면 <시카고>가 끈적한 쇼로 날리는 풍자의 웃음은 유쾌하지만 어딘지 불편한 거다. 이 작품을 콘셉트 뮤지컬이라고 분류한다면 그 콘셉트의 중심은 쇼라는 형식이 아니라 풍자의 현실성에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당대에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오래도록 묻혀 있었더랬다. 1996년부터 제대로 공연되기 시작해서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니, 이 작품이 여전히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은 작품도 세상도 그대로이기 때문일 거다.


벨마와 록시의 마지막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또 모르지, 50년 후에는 달라졌을지도!’ 불행히도 5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빠졌다. 그때는 거짓말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개소리Bullshit의 시대다.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에 의하면 거짓말은 진실을 의식하기에 자기가 거짓인 것을 스스로 알지만, 개소리는 진실과 거짓 자체에 무관심하고 자기가 하는 말이 곧 진실인 무지성의 산물이다. 지금은 진실과 거짓이 아니라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해야 하는 시대인 거다. 트럼트가 재선을 노리는 미국의 현주소다.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일까. 개소리는 어디에나 넘쳐난다. 개소리와 거짓말을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쇼다. 정치든 경제든 법이든 현실이라는 쇼는 진실과 거짓, 거짓과 개소리의 경계를 희미하게 뒤섞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대의 쇼는 다르다. 극장에서는 어떤 것이든 발가벗겨 본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니 감각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유쾌한 전복은 오직 무대에서만 가능하다. 거기에 붙는 이름이 폭로든 풍자든 다 괜찮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대 위의 더 많은 쇼가 필요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5호 2023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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