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엠컬처 정인석 대표
<레드북>으로 런던의 문을 두드리다
2014년 창립한 공연 제작사 아이엠컬처는 영국의 새롭고 실험적인 공연을 발 빠르게 국내에 소개해왔다. 한 공간에서 세 작품을 돌아가며 공연하는 ‘트릴로지’ 시리즈부터 즉흥 뮤지컬 <쇼스타퍼!>를 벤치마킹한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관객 참여형 추리극 <머더 미스터리>, 카바레 쇼 형식의 뮤지컬 <아이위시>, 이머시브 다이닝 <그랜드 엑스페디션>, 그리고 현재 공연 중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 <식스>까지. 지난 10여 년간 다양성이야말로 공연계 발전을 위한 토대라는 신념으로 달려온 아이엠컬처의 정인석 대표. 그가 이번에는 한국 창작뮤지컬로 영미 공연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발을 떼었다. 현재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의 영국 공연을 추진 중인 정인석 대표를 만나 그 개발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레드북> 런던 리딩 공연 ⓒ아이엠컬처
아이엠컬처는 그동안 다수의 영국 공연을 한국에 소개해 온 제작사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한국 뮤지컬을 영국에 소개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인가?
아이엠컬처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성을 경쟁력으로 삼아 달려왔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어떤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면 너도나도 비슷한 유형의 작품을 따라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장이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관객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다양한 스타일의 공연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국으로 향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과 런던의 소극장을 찾아다니며 색다른 형식의 공연을 관람했고, 그 가운데 한국에서도 통할 법한 작품을 골라 국내에 선보였다. 그 결과 관객과 공연 관계자 사이에서 도전 정신을 지닌 제작사로 신뢰를 얻었지만,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드는 제작사에 비해 큰 수익을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돌파구를 찾으려면 영미권 시장을 노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뮤지컬 제작사가 일본, 중국 등 아시아권 진출에 주력하고 있는 지금, 영미권 진출에 도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해 국내 뮤지컬 시장 매출이 4000억 원을 돌파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산업에 비하면 ‘산업’이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시장 규모가 작은 편이다. 무대에 오르는 작품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관객의 수요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국내 뮤지컬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사가 더 넓은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 창작뮤지컬은 비교적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아시아권 국가에서 먼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뮤지컬 시장 역시 규모가 크지 않기에 아시아권 진출만으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시장을 확장하고 명확한 수익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세계 공연의 중심지인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 진출해야 한다.
이전에도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해외 창작진과 손잡고 대극장 창작뮤지컬을 개발한 제작사들이 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이엠컬처는 한국 창작진이 만든 중극장 규모의 창작뮤지컬 <레드북>을 영어 프로덕션으로 새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들과 접근법이 다르다.
런던 웨스트엔드에 아츠 씨어터Arts Theatre라는 350석짜리 소극장이 있는데, 정규 공연이 없는 월요일에 쇼케이스가 열린다. 2018년 이 무대에서 케임브리지 대학 뮤지컬 동아리 학생들이 <식스> 쇼케이스를 선보였다. 나는 이때부터 <식스>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향후 한국 라이선스 공연을 염두에 두고 초기 투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후 <식스>는 점점 더 큰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며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식스>의 성장을 지켜보며 꼭 거대 자본을 투입한 공연이 아니라도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작품성이 뛰어나면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웰메이드 창작뮤지컬로 영미권 시장의 문을 두드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랬을 때 해외에서도 통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레드북>이라고 생각했다.
<레드북>은 한국 공연 제작사가 따로 있는데, 어떻게 아이엠컬처가 영어 프로덕션 제작을 맡게 되었나?
<레드북>은 2017년 트라이아웃 공연을 올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작품이다. 영미권 뮤지컬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본과 음악이 뮤지컬 문법에 맞게 잘 짜여 있어서 공연을 보는 내내 감탄했다. 나중에 창작진이 <레드북>의 새로운 제작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계약을 제안했는데, 아떼오드 쪽에서도 제안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한국 공연은 아떼오드와 함께 만들고, 우리와는 별개의 프로덕션을 꾸려 영미권에 진출해 보자고 창작진을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아떼오드는 한국어 프로덕션을 꾸려 한국과 아시아권에서 공연하고, 우리는 영어 프로덕션을 꾸려 영미권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분리해서 계약을 맺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계획이 연기되었지만,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개발에 들어갔다.
지난해 12월 런던에서 <레드북> 리딩 공연을 올렸다고 들었다. 리딩 공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현지 공연 관계자를 초대하긴 했지만, 투자를 받고 파트너를 만나는 것보다는 내부적으로 작품을 점검하는 데 의의를 뒀다. 한국어 대본과 가사를 영어로 번역한 뒤, 현지 배우들이 일주일간 연습해 공연을 올렸다. 기존 뮤지컬 넘버 가운데 3~4곡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하여 전체 흐름을 살폈다. 이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색하고자 했다.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 포스터 ⓒ아이엠컬처
리딩 공연에 참여한 창작진과 배우는 어떻게 섭외했나?
<식스>의 공동 프로듀서인 앤디 반스Andy Barnes가 이끄는 퍼펙트 피치Perfect Pitch라는 비영리 회사가 있다.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작 뮤지컬을 개발하는 창구 역할을 해온 회사인데, 그곳 PD에게 연출가, 번역가, 음악감독 등을 추천받았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창작진은 계속 바뀔 수 있다. 배우들은 영국에 가기 전 온라인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했다. 캐스팅 비화를 하나 밝히자면, 오디션에 합격한 로렐라이 역 배우가 연습 직전에 코로나19에 걸리는 바람에 현지 창작진을 통해 급하게 새로운 배우를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 배우가 오픈리 바이섹슈얼이라서 로렐라이 캐릭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는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밝히고 활동하는 배우가 드문데, 영국 배우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스스로 ‘그He’로 불리길 바라는지 ‘그녀She’로 불리길 바라는지를 터놓고 얘기하더라. 한국과의 문화 차이를 느꼈다.
작품에 대한 현지 공연 관계자의 반응은 어땠나?
<레드북>은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차별에 맞서 꿈을 키우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국적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영국인들도 충분히 공감하더라. 다만 사소한 디테일에서 양국 간 정서 차이를 느꼈다. 우리는 안나와 브라운이 서로 갈등하면서 점점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좋고 싫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미권에서는 감정 표현이 모호하다고 느끼는 듯하다. 이 문제를 두고 현지 배우 및 창작진과 한참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거친 번역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대본을 다듬어 다시 한번 반응을 보려고 한다. 음악은 호평을 받았다. 다만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과 가사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지속적으로 가사를 다듬어나갈 계획이다.
현지 정서에 맞춰 대본을 각색하는 것 말고도 한국 공연과 달라지는 점이 있나?
아무래도 무대 미술과 연출이 기존 한국 공연과는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동화적인 색채로 다가오지만 영국에서는 사극이나 마찬가지다. 단순히 당대를 재현한 무대와 의상은 영국 관객에게 진부하게 느껴질 것이다. 최근 웨스트엔드에서 호평받은 <식스>와 <&줄리엣>은 각각 역사와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이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레드북>에도 색다르고 과감한 시도가 필요할 듯하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리고 K팝이 일으킨 열풍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런던에서 리딩 공연을 준비하며 한국 문화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점을 실감한 적이 있나?
사실 처음에는 이 작품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밝히지 말까 고민했다. 작품성 자체로 승부하고 싶은데 한국 뮤지컬이라고 하면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지 관계자들이 한국 뮤지컬이라는 점을 꼭 밝히라고, 그 점이 오히려 셀링 포인트가 될 거라고 조언하더라. 그래서 포스터도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의 이름을 넣어 디자인했다. 한국 창작진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 눈에 확 띄도록 말이다. <레드북>은 런던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한 창작뮤지컬도 신선하고 재기 발랄한 발상만 담고 있다면 얼마든지 영미권 시장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미권 진출을 준비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준 정부 지원 사업이 있나?
공연예술 단체의 중장기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어 1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국내에서 공연된 창작뮤지컬을 영어 프로덕션으로 바꾸어 영미권 시장에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 후발 주자가 참고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 예정이다.
<레드북> 한국 공연 ⓒ아떼오드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만큼 완성도 높고 참신한 작품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은 흥행 공식에 맞춰 비슷비슷한 작품을 양산하고 있다. 당장의 수익만 따져 작품을 기획하는 제작자도 문제지만, 요즘은 작가, 작곡가마저 유행하는 스타일의 작품만 만들려 하는 듯해 안타깝다. 창작진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정부가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고자 한다면, 재능 있는 창작진을 뽑아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다채로운 공연을 보고 돌아온다면 뮤지컬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얘기해 달라.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 개발에 박차를 가해 내년에는 영국에서 정식 공연을 올리고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다. 전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는 작품을 개발하여 더 넓은 시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 싶다.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성공 사례가 나오기만 하면 다른 한국 뮤지컬도 영미권에 진출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권 프로듀서들은 한국 뮤지컬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후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아이엠컬처가 제작한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와 <전설의 리틀 농구단>도 일본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해외에 나가 한국 뮤지컬을 홍보하지 않아도, 전 세계 공연 프로듀서가 좋은 작품을 찾아 한국의 대학로를 방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이 그러한 미래를 앞당길 수 있기를 바란다.
>>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① - 해외로 뻗어나가는 창작뮤지컬
>>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② - 라이브 강병원 대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④ - 해외 시장 진출의 마중물, 창작뮤지컬 해외 진출 지원 사업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3호 2023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