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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스트레인지 루프> 흑인 게이 뮤지컬 작곡가의 웃픈 고백 [No.213]

글 |여태은(뉴욕통신원) 사진 | 2022-09-28 1,137

<스트레인지 루프>
흑인 게이 뮤지컬 작곡가의 웃픈 고백

 

현재 브로드웨이에서는 두 명의 마이클 잭슨을 다룬 뮤지컬이 절찬리에 공연 중이다. 하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음악으로 만든 (『더뮤지컬』 210호 NOW IN NEW YORK에 소개)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 겸 작곡가 마이클 R. 잭슨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스트레인지 루프>다. 2019년 오프브로드웨이의 비영리 극장 플레이라이츠 호라이즌스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흑인 게이 뮤지컬 창작자의 이야기를 색다른 형식으로 풀어내 2020년 퓰리처상을 차지하였다. 이후 2021년 워싱턴 D.C.의 울리 매머드 시어터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올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최근 무대 위 다양성과 형평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스트레인지 루프>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뮤지컬판 인사이드 아웃


<스트레인지 루프>의 주인공은 뮤지컬 작곡가 지망생 어셔(Usher)다. 브로드웨이 <라이온 킹> 공연장에서 안내원(Usher)으로 일하는 그는 2막의 시작종을 울리며 무대에 등장한다. 어셔는 극장 안내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자전적인 뮤지컬(이 작품의 제목 역시 <스트레인지 루프>다)을 쓰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흑인 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어긋난 기대 때문에 갈등한다.


무대에는 총 7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어셔 역을 맡은 자켈 스파이비는 약 10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무대를 떠나지 않고 거의 모든 곡을 소화한다. 이 작품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과 지구력으로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자켈 스파이비를 제외한 6명의 배우들은 모두 어셔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대변한다. 이들은 어셔가 떠올리는 생각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역할을 하는데,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극장 안내원 어셔는 인터미션 종을 울리며 속으로는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 고민한다. 이 장면은 6명의 배우가 그의 주변을 맴돌며 노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집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려는 어셔 앞에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어셔의 머릿속 자기혐오, 경제관념, 흑인 정체성, 그리고 성(性)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이들은 공연 중간중간 나타나 밝은 목소리로 어셔의 무가치한 삶, 남아있는 학자금 대출, 자랑스러운 흑인 커뮤니티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를테면 ‘와칸다 포에버’를 유행시킨 마블 영화 <블랙 팬서>와 같이 흑인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성생활을 상기시킨다. 6명의 배우는 어셔의 생각뿐 아니라 여러 주변 인물로도 변신한다. ‘We Wanna Know(우리는 알고 싶어)’라는 노래에서는 똑같은 가운을 입은 6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어셔의 어머니로 분해 통화를 이어가는데, 제각각 개성이 넘치는 이들의 표현력에 폭소가 터진다.


<스트레인지 루프>는 이처럼 어셔가 작품을 구상하면서 겪은 일과 머릿속에 뒤얽힌 복잡한 생각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 간의 갈등과 해소, 사건의 발생과 해결 등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스트레인지 루프>를 보며 길을 잃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따지기 시작하면 작품의 제목과 같이 무한한 질문의 고리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 뿐이다. 그저 흐름에 순응해 배우들이 발산하는 매력을 즐기다 보면, 흑인 게이라는 정체성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고 그로부터 비롯된 내면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창작진의 대범하고 절묘한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스트레인지 루프>는 쓰디쓴 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지만 재치 있고 기발한 가사와 음악으로 달콤하게 포장되어 있다. 작가 겸 작곡가 마이클 R. 잭슨은 라임을 살린 손드하임 스타일의 음악부터 가스펠 스타일의 음악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한다. 연출은 <비 모어 칠> <번개 도둑: 퍼시 잭슨 뮤지컬>을 통해 색다르고 젊은 감각을 보여준 연출가 스티븐 브레켓이 맡았다. 스티븐 브레켓과 안무가 레이자 페더 켈리는 배우 각각이 지닌 개성에 맞춰 안무를 짜서 여럿이 함께 춤출 때에도 제각각 다른 재미를 선사하도록 했다. 무대디자이너 아르눌포 말도나도는 무대에 6개의 문을 설치해 어셔의 생각을 대변하는 캐릭터를 비롯한 여러 조연 캐릭터가 그 문을 통해 자유롭게 등퇴장하게 만들었다.

 

 

차별 속에서 ‘나’로 살아남기


뉴욕대학교에서 뮤지컬 작곡 전공 석사과정을 마친 어셔는 가족 중 유일하게 가방끈이 긴 인물이지만 이렇다 할 커리어를 쌓지 못한 상태다. 어셔의 어머니는 먹고사는 데 도움도 안 되는 예술 학위를 따기 위해 가족을 떠나 뉴욕에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어셔를 이기적이라고 질책한다. 그리고 가스펠 공연을 만들어 타일러 페리처럼 성공하길 종용한다. 코미디 시리즈 <마디아>로 유명한 타일러 페리는 흑인들이 공감할 만한 소재의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인기를 끈 배우 겸 창작자이다. 흑인을 고용해 흑인의 이야기를 하고 흑인 관객을 극장에 불러 모으는 업적을 세운 인물로, 자수성가한 억만장자의 표본이다. 하지만 어셔는 가스펠도 타일러 페리도 싫고 단지 뮤지컬이 만들고 싶을 뿐이다. 어셔는 ‘Inner White Girl(내면의 백인 소녀)’이라는 뮤지컬 넘버를 통해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백인 소녀의 마인드를 가질 것이라 노래한다.


설상가상 어셔는 에이전트로부터 타일러 페리의 대필 작가로 가스펠 공연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어셔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지만 그의 머릿속 생각들은 그것이 “흑인을 배반하는 행위”라며 어셔를 손가락질한다. 이때 나오는 뮤지컬 넘버가 ‘Tyler Perry Writes Real Life(테일러 페리는 진짜 인생을 써)’인데, 여기서 배우들은 잘 알려진 흑인 실존 인물이나 가상 캐릭터가 되어 노래한다. 노예 해방 운동을 이끈 해리엇 터브먼부터 영화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 가수 휘트니 휴스턴 등으로 분한 배우들은 “타일러 페리야말로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며 “정말로 중요한 일은 가스펠 공연을 만드는 것”이라고 어셔를 압박한다. 이를 통해 미국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흑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순탄치 않은 건 커리어뿐 아니라 연애도 마찬가지다. 데이팅 앱에서 데이트 상대를 찾던 어셔는 ‘Exile in Gayville(게이빌로의 망명)’이라는 곡을 통해 인종차별과 외모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비판한다. 그뿐인가, 교회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활해 온 어셔의 어머니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긴다. 어머니와 대화하다가 감정이 격해진 어셔는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가스펠 공연을 만들어 동성애 혐오를 비꼬는데, 이때 부르는 뮤지컬 넘버가 ‘Precious Little Dream / Aids is God’s Punishment(작고 소중한 꿈 / 에이즈는 신이 내린 형벌)’이다. 단순했던 무대는 여기서 화려함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을 한 무대 1층에는 십자가가, 2층에는 위협적일 만큼 크고 강렬한 ‘HIV(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라는 글자가 자리 잡는다.


이렇듯 작품은 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의 면면을 유쾌하고 신랄하게 꼬집는다. 다양한 신체 사이즈의 흑인이자 LGBTQ 커뮤니티 구성원으로 캐스팅된 출연진이 이러한 메시지에 더욱 힘을 싣는다. 극 중에서 배우들은 종종 백인 역할을 맡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사회에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중심주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한다. 특히 여러 에이전트와 프로듀서가 돌아가며 어셔의 작품을 비평하는 장면에서는 마이클 R. 잭슨이 실제로 작품을 만들며 어떤 차별적인 발언을 들어왔는지 짐작된다.

 

 

브로드웨이의 중심에서 다양성을 외치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과 아시아계 혐오 범죄를 야기한 팬데믹을 거치면서 공연 업계에서도 백인 위주로 돌아가는 시스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캐릭터와 이야기의 부재에 관심이 모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방증하듯 2021년 브로드웨이 셧다운이 끝나고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흑인 창작진과 출연진이 참여한 작품이 유독 많이 공연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비영리 극장에서 기획한 작품이거나 비교적 짧은 기간 공연 후에 막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브로드웨이 셧다운 직후 돌아온 공연은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흑인 창작진과 출연진의 작품들을 단두대에 올린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여러 연극과 뮤지컬에서 유색인종 퀴어 캐릭터를 등장시켜 성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상황과 특정 인종에 대한 낙인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동시에 다루었는데, 이를 두고 “백인 프로듀서가 인종과 성정체성 양쪽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공연에 유색인종 퀴어 캐릭터를 끼워 넣는다”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단발성 이벤트로 눈길을 끌 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색인종 퀴어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대두되는 이슈다.


<스트레인지 루프>가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올리고 퓰리처상을 받은 뒤 브로드웨이행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날씬하고 아름다운 백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브로드웨이에서 뚱뚱한 흑인 게이 작곡가의 이야기를 선보여 전형성을 벗어나는 동시에 보편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뮤지컬 무대에서 보아온 퀴어 캐릭터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아름다운 백인 퀴어 캐릭터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흑인 퀴어 캐릭터, 그중에서도 주인공 캐릭터는 <킹키부츠>의 드래그 퀸 롤라가 유일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당찬 디바 롤라와 <스트레인지 루프>의 주인공 어셔는 전혀 딴판이다. 어셔는 일이 풀리지 않는 순간마다 “나는 너무 까맣고 뚱뚱한 흑인 게이일 뿐”이라고 자책한다. 그때마다 어셔의 자기혐오를 대변하는 배우가 등장해 “네가 그럼 그렇지” 등의 팩트 폭격을 날려 ‘웃픈’ 상황을 연출한다.


<스트레인지 루프>는 뚱뚱한 흑인 게이로 산다는 것, 흑인으로서 백인들이 주류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창작자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관객들은 어셔가 창작 과정에서 경험하는 자기혐오와 회의감, 타인의 기대와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 사이의 괴리감을 마주하고, 그런 어셔에게서 이 모든 것을 통과한 후 결국 <스트레인지 루프>를 탄생시킨 마이클 R. 잭슨의 모습을 겹쳐 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연진 전원이 흑인이자 LGBTQ 커뮤니티 구성원이라는 점도 신선하다. 엘 모건 리는 이 작품으로 토니 어워즈 역사상 최초로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된 트랜스젠더 배우가 되기도 했다. 모든 출연진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매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앞으로 브로드웨이가 선보일 다양하고 의미 있는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스트레인지 루프>는 올해 6월에 열리는 제75회 토니 어워즈에서 베스트 뮤지컬상, 극본상, 작곡상을 포함한 11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과 화제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이번 시즌 최고의 신작임을 증명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퓰리처상과 토니 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을 모두 받은 뮤지컬은 <렌트>와 <해밀턴>뿐이다. 과연 <스트레인지 루프>가 그 뒤를 잇는 새로운 시대의 대표 뮤지컬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몹시 기대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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