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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3월의 눈> 배우 변희봉, 어디에나 있는, 하나밖에 없는 [No.114]

글 |송준호 사진 |이맹호 2013-04-03 4,459

소설가 이장욱의 단편 『변희봉』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수에 의해 그 실체가 부정되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무기력한 삶을 사는 연극배우 주인공 앞에 대배우 변희봉이 매일 우연처럼 나타난다. 남자는 흥분하지만 주변인들과 인터넷 검색은 변희봉의 존재를 부정한다. 변희봉은 허상이었나, 남자마저 그의 존재를 의심하며 희망을 잃으려는 순간 변희봉의 실존이 입증되고 다시 멋진 희망으로 자리잡는다. 실제의 변희봉도 소설 속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장르에서건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온 이 배우는 지난 10여 년간 화제가 된 영화라면 어디에나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비슷한 연배의 연기자들이 대개 ‘실버 캐릭터’로 쓰이는 동안 그는 ‘변희봉’이라는 브랜드만으로 독보적인 입지를 다져왔다는 것이다. 연령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강한 개성이 그런 성취의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연극 무대에 선다. 그것도 전형적인 평범한 노인 역할이다. 40년 동안이나 밟지 않았던 무대, ‘변희봉’을 드러낼 수 없는 캐릭터의 한계. 이 개성파 배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3월 개막을 앞두고 공연에 매진 중인 그를 만나러 국립극단 연습실로 향했다.

 

40년의 연기 경력? 아직도 불안하고 긴장된다

대략 2시간 정도 걸릴 거라던 공연 연습은 어느새 3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우들의 미세한 실수와 손진책 예술감독의 즉각적인 디렉팅에 따른 지연 때문이다. 인터뷰도 인터뷰지만 노배우의 체력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연습을 마친 변희봉은 예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나타났다. 그는 3월 1일부터 시작되는 연극 <3월의 눈>에서 주인공인 장오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연극계의 두 원로인 장민호, 백성희 배우가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극장에서 2011년 초연하며 화제가 됐지만, 지난해 장 배우가 타계함으로써 이제는 대배우들이 거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고 있다.

 

공연이 며칠 후 시작합니다. 드라마 첫방이나 영화 개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안하죠. 연기를 40년 가까이 했어도 말입니다. 아무리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했어도 연극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장오는 80대 중반의 생활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데 쉬운 게 아니에요. 연극을 오래 해오신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힘을 빼고 진실하게 그 사람이 돼라’고 하는데 그 정수를 뽑아내는 게 어렵습니다. 게다가 전 약 20년 가까이 장오의 나이보다 젊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하는 데는 아무래도 난관이 있겠죠.

 

아까 보니 손진책 예술감독에게 질책도 받으시더라구요.
물론입니다. 비록 환경은 다르지만 작품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고 배우는 감독 말을 듣지 않으면 변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드라마는 빠른 시간에 만들기 때문에 배우가 자기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죠. 연극은 인물에 대해서는 연출가가 더 잘 알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게 옳죠. 연기를 오래 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 자신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배우는 감독의 말을 듣는 게 캐릭터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봐요.

 

손 감독은 주로 어떤 점을 주문하나요.
고 장민호 선생은 당신 연령대의 배역을 하셨지만 저는 훨씬 젊기 때문에 처음엔 제가 의도적으로 ‘노인스러운’ 연기를 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손 감독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서 소리를 목으로 내지 말고 가슴에서 내라고 해서 따르고 있습니다.

 

고 장민호 배우의 생전에는 관객으로서 <3월의 눈>을 보셨을 테지요. 그분의 연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떤 역을 하더라도 소홀히 한 적 없고 그 역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하신 분입니다. 감히 평가를 할 수가 없죠. 그만큼 확실하게 한 분이 없으니까요.

 

주옥 같은 대사들이 많더군요. 대본을 읽으면서, 직접 말로 읊으면서 가장 입에 착 붙는 대사가 있었습니까.
“이제 비워줄 때가 된 거지. 자네도 이제 다 비우고 가게”가 제일 맘에 들어요. 하나 더 한다면 “사람은 제일 추접스러운 게 끝날 때지. 볼 필요도 없고 보여줄 필요도 없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건 장오라는 인물이 대사보다 그의 표정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불만스러운 듯 말없이 찌푸린 표정이 자주 등장합니다. 도대체 장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비치던가요? 저도 그 부분을 어떻게 만들어야 좋을지, 이게 맞는 건지 아직 감독에게 묻지를 못합니다. 이제 2~3일 지나서 집중적으로 상의해봐야죠. 또 그렇게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여러 가지 심상을 표현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런 점이 장오를 표현할 때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변하는 세상과 인생의 순리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그 점이 나이든 분이나 젊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다 같이 공감하는 이유일 테죠.

 

관객들이 변희봉의 장오에서 어떤 점에 주목해주기를 바라십니까.
<3월의 눈>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가정마다 한두 가지씩은 다 문제가 있잖아요. 전부 좋거나 전부 암울하기만 한 가정은 없어요. 장오의 캐릭터를 보면 자식들도 출가시키고 손주들도 보고 나름대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결코 성공한 사람은 못 되죠. 다만 자기의 고통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보듬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장오뿐만 아니라 이순도 있고 그밖의 인물들 하나하나가 우리 인생에서 다 있을 수 있는 캐릭터들이거든요.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우리처럼 현실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돌아온 무대는 비우고 성찰하는 공간

지금의 20대들에게 변희봉은 어쩌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묘한 캐릭터’ 정도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 10년간 영화판에서 소비되어온 그의 캐릭터는 헐레벌떡 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흥분하며 갑자기 버럭 하는 이웃집 할아버지였으니까. 뭔가 강조할 때마다 눈에 힘을 넣어 부라리는 표정은 희극적이면서도 어딘가 기괴한 느낌을 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장오는 그동안 그가 보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경박하고 시끄러운 요즘 캐릭터와는 달리 느리고 묵직한 감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변희봉의 무대 복귀는 마치 이제껏 거쳐온 캐릭터 목록을 리셋하는 느낌마저 있다.

 

연극과의 인연은 고 차범석 작가와 극단 산하를 통해 맺으셨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와는 장기간 접점이 없었죠. 무대보다 방송 일에 더 매력을 느꼈기 때문인가요.
어떤 분들은 돈맛을 보니까 그렇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전 성우도 했고 드라마, 영화 다 했는데 그쪽 일을 하다가 금방 다시 이쪽으로 오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자기가 했던 걸 떠났다가 회귀하는 게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꼭 해야 할 일이고 뜻이 있다면 지금처럼 70대의 황혼기라도 결국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비워보고 싶고 생각을 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게 또 사람의 본능인 것 같아요.

 

회귀나 본능 같은 말씀을 하시니까 자연스레 ‘고향’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연기의 고향은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죠. 성우 할 때부터 무대 연기를 했으니까요. 그때는 큰 무대였기 때문에 배고픔도 있었고 낭만이 있었는데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조금 낯설기도 합니다.

 

실로 오랜만의 연극 출연 제안을 받고, 오디션까지 자청해 치르셨습니다. 제안받은 날부터 오디션장에 오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연기를 하면서도 자주 쉬는 편입니다. 사실은 작년에 일을 좀 하고 금년 전반기는 쉬려고 했습니다. 저를 좀 비우고 성찰을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려고요. 원래는 여행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연극을 하게 됐는데 지금 보니 잘 된 거 같아요. 연극 자체로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 한 발을 뗀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초년생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그렇거든요.

 

연기 인생을 접으려 할 때마다 어떤 계기로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30년 전엔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설중매>가 그랬고, 10년 전엔 봉준호 감독과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이번 연극 역시 선생님의 연기 인생에 있어 분명 전환점이 될 것 같은데요.
이번엔 손 감독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가 물론 일을 많이 하면 좋겠지만, 무조건 많이만 하면 뭐하겠습니까. 되지 않는 일들을요. 그때그때마다 자신이 변할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그런 계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요. 뭔가에 쫓겨서 정신없이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난 좀 비우고 사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비우면 확실히 삶이 가벼워진다는 건 틀림없습니다. 뭘 너무 많이 생각하면 몸도 머리도 무거워져요. 까짓 거 콩나물 국밥을 먹더라도 호텔에서 식사한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계속 ‘비움’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시는 게, 선생님도 최근 몇 년간 너무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재작년엔 충분히 쉬고 작년에 다시 일을 좀 하다보니 썩 잘 되지 않고 흐름도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불쾌해지더란 말이죠.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2013년은 엔터테인먼트고 뭐고 안 한다, 전반기는 무조건 쉰다고 결심을 했던 거예요. 그때 손 감독이 전화를 걸어서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올레길이라도 걷고 있겠죠(웃음).

 

이번 작품 이후에도 연극 무대에서 계속 뵐 수 있을까요.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또 좋은 기회가 닿는다면 해야겠죠.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철들었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30대에도 듣고, 40대, 50대에도 듣습니다. 각 연령대마다 그에 맞는 철이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저도 70대가 되니까 또 새로운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아마 80대가 되면 그때의 철이 들겠죠. 연극도 40년 전에 하고 쭉 못했지만 손 감독과의 인연으로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어쩌면 철이 든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칠순을 넘기셨는데 철이 든다는 표현이 새롭습니다.
제가 인생의 후반기라는 건 분명합니다. 어찌보면 거의 다 왔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해는 계속 뜨겠죠. 연기 생활을 하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해내는 수밖에 없어요. 끝날 것 같았는데 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질 수도 있고요. 정말 끝날 때까지는 그런 기대감을 갖고 살아야 발전이 있지 않을까요.

 


 

<3월의 눈>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무대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결핍감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한다. 전통의 단절과 생명의 소멸이라는 전형적이고 무거운 주제는 어떤 특별한 사건 없이 잔잔하게 전개되지만, 젊은 관객들은 예상 밖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노년의 허망한 소멸과 생의 순환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까닭이다. 순환의 교차로, 겨울과 봄이 중첩되는 3월, 꽃처럼 내리는 눈, 그리고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온 배우 변희봉. 40년만의 무대 복귀에 대한 의문은 이제야 앞뒤가 들어맞았다. 이제 그는 이 무대에서 무엇을 얻을까. 그의 말처럼 확실한 건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새로운 변희봉과 만난다는 사실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4호 2013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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