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연출가의 영화 도전기
뮤지컬계의 대표 연출가 중 한 명인 김달중 연출가가 김명민 주연의 <페이스 메이커>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김종욱 찾기>와 <쓰릴 미> 초연 연출가였고, <헤드윅>, <스핏파이어 그릴> 등에서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였던 그가 <페이스 메이커>의 중요한 관점이었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영화에 도전했다. 김달중 감독에게 베테랑 공연 연출가의 영화 도전기를 들어보았다.
뮤지컬계에서 잘나가는 연출가였다. 작품 제안이 많았을 텐데 2010년 초 <로맨스 로맨스> 이후 돌연 영화에 도전했다. <로맨스 로맨스> 할 때 이미 영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원래 영화 때문에 못한다고 했는데 변희석 (음악)감독이 이미 오래 전부터 참여해 왔던 작품이고, (조)정은이가 유학 갔다 와서 복귀하는 작품이라 이런 관계 때문에 참여했다. 영화 작업 제안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뮤지컬 <댄서의 순정> 할 때도 있었고, 싸이더스에 있던 김미희 대표가 뮤지컬 하고 싶다고 해서 자문 비슷한 것을 하러 만났다가 <불꽃처럼 나비처럼>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는데 그때도 감독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까 가볍게 던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비슷한 경우가 반복되다 보니까 2년 정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더 나이가 들어서 무뎌지기 전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계 환경은 어떤가? 뮤지컬보다 사정이 나은가? 영화계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시장 자체의 규모가 다르다 보니까 넉넉함에서 오는 차이는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오픈 세트이다 보니까 날씨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촬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언제 개봉할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다. 공연이야 대관하면 어떻게든 올리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영화판이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근데 감독은 좀 다른 것 같다. 영화감독으로 반열에 오르면 직업 감독으로서 훌륭하게 살 수 있는 보상이 뒤따른다. 뮤지컬에서는 연출가가 아무리 성공해도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런데 영화판은 그게 가능하다. 물론 베스트에 들었을 때 이야기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게 현실적으로 영화판에 오게 된 이유이다. 뮤지컬을 10년 한다고 해도 내 작품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댄서의 순정>, <주유소 습격사건> 영화와 뮤지컬을 넘나드는 작품을 많이 했다. 그것이 이번 영화 작업에 도움을 주었나? <스핏파이어 그릴>도 외국 작품이긴 하지만 영화를 뮤지컬로 완벽하게 바꾼 작품이다. 영화는 만들진 못했지만 <샤인>도 뮤지컬 작업을 할 때 시나리오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유난히 영화와 뮤지컬을 오가는 작품을 많이 한 것 같다. 뮤지컬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영화는 영화여야 할 거 같았다. 뮤지컬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도 내가 해왔던 뮤지컬적 양식이 녹아들 텐데 영화 장르에 맞게 하자는 것이 첫 번째 생각이었다.
뮤지컬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공연은 극의 압축과 비약을 통한 재미가 있다. 관객들과 암묵적 약속이 생기기 때문에 독특한 표현이나 생각이 나와도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더 매력을 준다. 즉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비워두고 그것을 관객들이 채우는 데에서 재미가 발생한다. 반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다. 리얼리티가 담보되지 않으면 극에 몰입하지 못한다. 배경이나 드라마가 얼마나 사실적이냐가 첫 번째 미덕이다. 영화 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 이번 영화 작업에서 힘들었던 것도 그런 점이었나?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 마라톤 선수들이 시속 17~18킬로미터로 달린다. 다리까지 나오면 이들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가 느껴지는데, 런던 장면에서는 특히 타이트한 숏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시속 23킬로미터로는 달려야 그 느낌이 난다. 달리는 배우도 힘들지만 배우가 달리는 동안 배경이 시속 23킬로미터로 변하니까 그 그림을 다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리얼리티가 담보되니까. 우리 영화에서 총 135신을 사용했다. 그러면 세트가 135개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마라톤 장면이 나오는 한 20장면은 세트가 어마어마하게 큰 거다. 그 어려움이 상상을 초월한다.
런던 촬영이 꽤 길게 나온다. 런던시의 협찬이나 올림픽위원회의 도움을 받았나? 그런 거 없었다. 오히려 런던 올림픽 촬영을 위해서 런던시와 IOC, 한국올림픽위원회 여러 곳의 복잡한 허락을 받아야 했다. 런던에서 프로덕션을 도와주는 현지 친구가 런던시를 차량 통제해서 촬영하는 데는 너희밖에 없다고 하더라. 런던 역사상 런던시를 통제했던 것은 재난 영화 <28주 후>를 촬영할 때 이후 없었단다. 우리가 무식했던 거지. 그들은 워낙 CG가 완벽하니까 원하는 것을 대부분 CG로 만들어낸다는데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할 수 없어서 날것으로 찍었다. 촬영 장소가 런던의 구 금융가가 있는 곳인데 주말에 완전 통제하고 촬영했다. 그들도 신기했는지 와서 구경하고 하더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느껴지는 게 런던 항공 촬영 장면부터 분위기가 비장해지더라. 지난여름에 갔을 때는 못 느꼈는데 해가 4시에 떠서 10시에 진다. 하루에 18시간 촬영을 했다. 런던 장면은 대화도 없고 계속 뛰어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나. 날씨가 가장 좋을 때를 잡아서 간 것인데 하루에도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었다. 이만 한 우박도 떨어지고.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했던 스태프가 이건 전쟁영화보다 더 힘들다고 다음 영화할 때는 뭘 해도 훨씬 쉬울 거라고 해서 위안이 됐다.
무대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런던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유가 있나? 초안 시나리오에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이었다. 아시안게임이든 올림픽이든 상관없는데 지나간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나 <국가대표>, <기봉이>도 그렇고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리얼리티가 떨어져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 작품은 완전 창작이다. 리얼리티가 살려면 이미 한 대회보다는 하지 않은 대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위해 런던 올림픽을 선택했다. 런던 촬영 때 공연하는 사람 티 낸 것이 한 장면 있다. 10킬로미터 급수대 뒤로 빨갛게 보이는 돔 극장이 로열 알버트 홀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그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어디를 볼지를 결정한다. 그런데 영화는 관객들의 시선을 카메라가 지정한다. 그래서 감독으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드라마 전개상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뭘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사이즈였다. 클로즈업으로 갈 것인지, 투 숏으로 갈 것인지, 부감으로 할 것인지 경우의 수가 너무 많고 사이즈를 정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먼저 내가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면 촬영감독님이나 연출부의 조언을 많이 들어서 결정했다. 현장에서는 현장 편집하는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처음 하는 사람이니까 현장에 가면 다 선생님이다. 부지런히 다니면서 물어봤던 것 같다. 나이가 드니까 뭘 물어보는 게 부끄럽지 않더라. 그들이 다양한 의견을 주지만 그래도 결국 선택은 내가 해야 했다.
무엇보다 다른 게 후반 작업 아닌가. 영화는 일단 올리면 고칠 수 없지 않나? 작품 만들다 보면 당연히 이견이 있지 않나. 공연에서는 그럼 일단 해보자 하면 된다. 보고 판단하면 되는데 영화는 그게 어렵다. 물론 여러 가지를 다 찍어놓고 편집실에서 다 해볼 수 있다. 그래도 극장에 올릴 것은 선택해야 한다. 대안 없는 비판을 싫어하는데 영화 작업하면서 대안을 줄 수 없이 무책임하게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무척 스트레스였다. 공연 쪽 연출가라는 걸 안 드러내려고 힘을 뺐는데도 역시 비우고 압축하는 것을 좋아하더라. 영화 쪽 분들은 그런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확률과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번번이 졌다.
어떤 것들을 하고 싶었나? 이를 테면 초등학교 운동회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하고 싶었다. 아니면 아무도 없이 만호와 동생만 등장하거나, 모든 배경을 하늘로 삼아서 하늘에 떠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 장면은 만호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다. 주변의 산, 학교, 건물 이게 뭐가 필요한가. 그냥 운동장이 있었고 그날 만호는 동생을 위해 달렸다. 근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나마 끝까지 고집했던 것은 런던 마라톤에 어느 구간엔가는 벚꽃 장면을 넣겠다는 것이었다. 벚꽃 장면은 만호에게 가장 행복했던 달리기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끝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대한 리얼리티가 보장되는 한에서 해보자고 해서 그렇게 나왔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몰아가는데 뭘 하려고 하는지는 이해가 됐지만 그 부분이 명확하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지원(고아라) 캐릭터를 놓고 보면 지원이는 4미터 40을 넘어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왜 넘어야 하지 그런 고민을 한다. 내 나이가 되면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지원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할지, 잘하는 것을 해야 할지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고민한다. 만호 같은 경우는 이분법은 아니다. 달리는 것이 좋았고 30킬로미터까지 달리는 페이스 메이커가 싫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체성에 대해서 별로 고민이 없었다. 근데 다리가 안 좋아지면서 더 이상 못 달린다는 위기감이 생긴다. 한번도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다가 내가 달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더 늦기 전에 끝까지 달리고 싶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주만호를 중심으로 한 휴먼 드라마였는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되는 개인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건드리고 있다. 결국은 선택이겠지만 감독(안성기)의 철학이나 가치를 부각하고 그에 상대되는 인물로 만호를 그려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페이스 메이커>는 한 남자의 달리기가 어떻게 시작됐고 끝이 어땠다를 보여주는 것이다. 주만호의 캐릭터를 어필하려고 했고 그래서 동생의 역할이나 지원의 캐릭터가 중요했다. 주만호는 달릴 때만큼은 카리스마도 보이고 평상시에는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어쩔 줄 모르는 엄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성기) 선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무게감을 갖는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봤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강압적인 힘이기도 하고. 더 찍어놓은 장면이 있긴 한데 안 선배 쪽을 선택하느냐, (고)아라 쪽을 선택하느냐 선택의 문제였다. 상업 영화에서 최종 선택은 아라 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관객 평을 보니 김명민 씨가 의치를 한 것에 대해 과하다는 평들이 있었다. 명민 씨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 병에 걸린 역으로 나왔고 해서 이번까지 자신을 학대하는 역을 한다고 보는 것 같다. 힘든 역할을 일부러 찾아하는 게 아니라 역할이 힘든 것이다. 명민 씨도 의치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최종적으로 하기로 한 이유는 이 영화가 다른 영화에 비해서 대사가 많지 않고, 주요 장면들은 다 달리는 장면들이다. 달리는 장면에서 주만호를 어떻게 하면 잘 보여줄 수 있겠는가가 중요했다. 주만호가 아닌 김명민 씨가 잘 달린다는 이미지가 생기는 게 불편했다. 명민씨 옆모습을 보면 엘리트 같다. <하얀거탑>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미지가 옮겨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다음 영화 계획은 어떤가? 일단 영화가 개봉되고 성과가 나와야 구체적으로 되지 않을까. 영화적인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제작자나 투자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관객을 끌어들였나가 중요하니까. 영화 관계자들은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는 평이다. 개봉이 되어야 알 것 같고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공연 계획은 어떤가? 공연에서 안 불러준다. (웃음) 작년 10월에 의뢰가 들어오긴 했는데 그때만 해도 영화 상영 일자가 정해지지 않아서 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연말까지는 못한다고 했다가 개봉이 늦어지면서 1월까지는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싶었다. 이젠 정말 아무도 안 부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1호 2012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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