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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효경 서울시뮤지컬단 단장 [No.88]

글 |정세원 사진 |이맹호 2011-01-17 5,068

 

기틀 마련하는 것으로 내 일은 끝나지 않겠어요? 

 

 “이거 영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 불편하네요.” 결재 보고서에 사인을 하던 김효경 단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건넨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임된 지 한 달도 더 지났지만, 지난 40여 년을 무대 연출가로 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강단에서 학생들과 20여 년을 보낸 그에게 ‘단장’이라는 직책은 여전히 낯선 듯하다. 사무실 한쪽 벽에 붙어 있는 2년 치 빈 달력을 가리키며 “이것을 빼곡히 채우는 게 내 일”이라 말하는 김효경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을 만났다.

 

 

 

행정 일이 이전의 작업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보니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이 자리에는 경영자가 앉아야 맞는데 제가 연출만 하던 사람이다 보니 그래요. 우리나라는 단체장에게 예술감독 임무를 같이 부여하는데 사실 두 직책은 엄연히 역할 구분이 되어야 하거든요. 예술감독은 예술 활동을 하고, 단장은 운영 전반에 걸친 일을 해야지요. 뭐든지 전문화되는 시대에서 분업이 이뤄져야 하는데 막상 단체에 들어와 보니 머리 복잡한 일들이 많네요. 규정이라는 것도 있고 감사도 받아야 하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뮤지컬단의 단장 제의를 받아들이신 까닭이 궁금한데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어요. 정년퇴직도 했고 후배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까. 근데 시간을 끌면서 설득을 하니까 마음이 또 움직이더라고요. 명예나 돈 욕심이 아니라 보람 때문에 하는 건데, 내 능력껏, 생각대로 해보다가 안 되면 그만두면 되지 않겠나 싶더라고요. 그동안 관 단체 작업을 할 때마다 불만족스러웠던 점들을 어느 정도 시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과, 관에서 만들어지는 뮤지컬, 서울시뮤지컬단의 역할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 국내 뮤지컬 대부분이 작품의 질보다는 어떤 배우, 어떤 아이돌 스타를 캐스팅했는가를 중요시하잖아요. 누가 라이선스 계약을 먼저 했는지, 제작비가 얼마인지…. 철저하게 상업적인 면으로만 치중되어 있지 뮤지컬의 발전과는 거리가 멀어요. 일 년 동안 전국에서 천 편이 넘는 뮤지컬(악극, 어린이 뮤지컬 포함)이 올라가지만 98~99퍼센트가 적자예요. 이게 현실이다 보니 다들 스타 마케팅을 하고 라이선스 뮤지컬을 제작하고, 창작뮤지컬이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쉽지가 않지요. 대형 제작사일수록 더 그런데 서울시뮤지컬단도 예외는 아니라고 느꼈어요. 스타 마케팅을 했고, 라이선스 뮤지컬을 선보였지요. 지금도 옆에서는 <애니>를 연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정된 사업이라 손을 댈 수가 없지만, 이건 관 단체가 할 일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럼 단장님께서는 서울시뮤지컬단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자리에 앉으면서 제일 먼저 한 얘기가 스타 마케팅이 아닌 단원 중심, 실력 위주의 캐스팅을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능력 있는 자만이 서울시뮤지컬단의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전통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게 첫 번째 목표예요. 배우라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단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단장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오디션을 통해 뽑힌 배우들일 테니 기본적인 기량은 갖추고 있을 것이고, 연마를 게을리했다면 그 책임은 각자가 져야겠지요. 앞으로 서울시뮤지컬단이 선보이는 작품의 주인공은 한두 명 이상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매일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능력이 된다면 배우 한 명이 끝까지 끌고 갈 수도 있겠지요. 저는 단원들을 경쟁시켜 스스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자기 능력을 시험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단원들이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학교에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한 작품을 몇 개 팀으로 동시에 운영해봤는데 배우들이 서로 불꽃이 튀어요. 배우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능력과 노력한 시간들을 증명해야지 연습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프로의 세계예요. 대신 단원 누구나 전천후 배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니 해볼 만하지 않겠어요. 아쉬운 점이라면 연기자 24명의 키가 다 비슷하다는 거예요. 배우 집단이기보다는 무용단 같은 느낌이 크죠. 개성이 없으니까. 근데 우리 단원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 대부분이 그런 것 같아요. 외모를 너무 따지다보니 캐릭터 있는 배우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아 참 안타까워요.


라이선스 뮤지컬에 대해서도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곧 앞으로 서울시뮤지컬단이 선보일 작품들이 주로 창작뮤지컬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라이선스 뮤지컬은 하지 않겠다고 들어왔지만 어쨌든 서울 시민에게 서비스하는 차원의 공연도 있어야 하니까 피치 못할 경우도 있을 거라고 봐요. 내년에 해야 하는 작품만 세 편입니다. 한 해 하나 올리기도 바쁜데 세 작품에 집중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일단 봄 공연으로는 창작뮤지컬을 올리고, 가을 공연으로 창작을 하지 못한다면 라이선스 뮤지컬을 하되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보다는 이웃 나라의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요.

 

내년 봄 공연으로 창작뮤지컬을 선보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다섯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새로운 작품을 준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한참 활동할 때는 두세 달, 짧게는 한 달 만에 작품을 만든 적도 있었어요. 관에서 연출 의뢰를 보통 두 달 전에 하면 그때부터 작품 선택하고 작가, 작곡가를 선정해서 동시에 작업을 시작했죠. 창작뮤지컬을 열 편 정도 선보였는데 준비 기간이 제일 길었던 작품이 90년대에 김상렬 씨가 쓴 <갈 길은 먼데>라는 작품이었어요. 작곡가가 표절을 하는 바람에 재공연을 할 수 없었던 아까운 작품 중 하나였죠. 어쨌거나 지금도 하라면 할 수야 있겠지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는데. 관객들의 수준도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학교에서 학생들과 만들었던 <투란도>예요. 교육을 목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보니 알면서도 못 고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걸 객관적인 시선으로 스토리 라인을 정리하고 음악을 수정·보완할 생각이에요.

 

2008년 안산에서 공연한 <그림이 된 란, 투란도> 말씀이시군요. 푸치니의 오페라로 너무나 유명한 <투란도트>를 뮤지컬로 만든 까닭이 궁금합니다.
넌버벌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대사가 없는 게 넌버벌이 아니라, 그리스 비극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모두 넌버벌이라고 생각해요. 언어는 몰라도 내용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작품들 말입니다. 『삼국지』도 마찬가지고요. 오페라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중국 백성들을 상당히 야만스럽게 그려놨어요. 오페라에서 투란도트는 죽은 로링의 덫이 씌어서 남자를 죽이는 귀신 들린 여자잖아요. 동양 문화를 잘못 이해한 느낌이 불만이었던 터라 뮤지컬에서 스토리 라인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무리수들이 발생하더라고. 계속 수정하겠지만 한술에 배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공연을 보러 가지 못했던 게 아쉽습니다. <투란도>의 대본과 음악 등은 누가 작업을 했나요? 아무리 학교 공연으로 선보였다 하더라도 푸치니의 음악과 비교되는 부담이 없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작가, 작곡가들과 작업을 해봤지만 그들은 너무 바빠서 한 작품에 투여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그래서 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2년에 걸쳐 작업을 했어요. 세계적인 작품들을 보면 음악 넘버가 20곡 내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같은 곡을 베리에이션해서 반복 사용하죠. <투란도>도 그런 기법으로 만들어봤어요. 창작뮤지컬의 경우 보통은 30~40곡, 많게는 70곡에 달하는 음악 넘버를 갖고 있지, <투란도>처럼 적은 수의 넘버들을 베리에이션해서 만든 작품은 거의 없을 거예요. 서양 음계에다 한국어를 붙이면 보통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거든요. 억양의 높낮이도 잘 맞지 않아서 처음에는 작곡가가 굉장히 힘들어했지만 깜짝 놀랄 만한 레시터티브를 만들어냈어요. 뮤지컬과 오페라를 접목한 덕분에 ‘상업성이 없다’, ‘음악이 너무 어렵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저는 뮤지컬의 음악은 대중가요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래에 우리가 수출할 만한 작품을 만들려면 음악적 깊이가 클래식에 버금가는 상품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오페라다, 뮤지컬이다 하는 장르의 벽이 조만간 깨질 것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비상업적인 뮤지컬로 객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거죠.

 

지난 40여 년 동안 100여 편의 작품들을 연출해 오셨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작품들이 어느 한 장르에 집중되기보다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극, 창극 등 다양한 장르로 무대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극을 알면 장르는 관계가 없어요. 극이 안 들어가 있는 게 어디 있나요. 사진 예술에도 있어요. 극적인 커트를 위해 수많은 셔터를 누르잖아요. 지금이야 연극쟁이로 살고 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합창반을 할 정도로 음악과 무용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운동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2년 동안 꼼짝없이 누워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음악만 들었어요. 덕분에 오페라 광이 됐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대학에 갔는데 연극만 가르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연극쟁이가 된 거예요. 연극만 하던 90년대에 김소희 선생님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의 <박씨전>을 연출했어요. 그땐 창에 ‘ㅊ’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한 작품으로 창극의 권위자가 됐죠. 국악 공부를 시작한 게 그때부터예요. 제 나이 마흔다섯 살 때니까 너무 늦었죠. 좀 더 일찍 접하게 됐더라면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제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으니까요. 창극을 하게 되면서 국악을 공부했고, 현대무용을 연출하게 되면서 한국, 중국, 인도 등의 무용 공부를 이어갔어요. 장르마다 재미있는 요소들은 다르지만 결국은 ‘극’이거든요. 극을 이해하고 장르에 대한 공부만 하면 다 할 수 있어요. 물론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깊이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에요.

 

단장님께서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는 것은 곧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하면 될까요?
그렇죠. 한 10여 년 동안 작품을 하지 않다가 지난해 <황진이>를 연출한 것도 서도·경기 소리로 소리극을 만들어달라고 해서였어요. 판소리는 많이 접해봤지만 경서도 창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실수했다는 걸 알았어요. 경서도 창법이 그렇게 단순한지도 몰랐고, 진지함이나 비장미를 느낄 만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던 거예요. 김대성 씨한테 경서도 창법의 특징을 살린 작곡을 의뢰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그 긴 시간 동안 연출가로 활동하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 세대는 서양 교육을 받았잖아요. 한국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었고, 우리 전통을 접할 기회도 적었죠. 유학도 못 갔으니 서양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얼마나 쌓여 있었겠어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제가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본 게 1987년이에요. 일본에서 극단 시키의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진국에서는 무대 개념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나한테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1989년에 조민 대표가 <캣츠>를 하자고 하는 거예요. 불법이긴 했지만 꿈에 그리던 브로드웨이에 가서 공연을 녹음하고 악보를 그려서 편곡을 했어요. 재밌는 것은 <캣츠>를 공연할 수 있는 배우를 못 구해서 고생했고 배우 훈련에만 6개월을 투자했다는 거예요. 서양에서는 이미 음역을 파괴한 작곡이 나오고 있는데 우린 거기에 맞는 교육 시스템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던 거죠. <스위니 토드>가 1979년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놀랍죠.


단장님께서는 상당히 많은 서울예대 학생들이 일본 극단 시키에 입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들을 일본으로 보낸 것은 교육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진 않았어요. 저는 일본의 뮤지컬 시장을 눈여겨봤습니다. 한 극장에서 십 년 동안 한 작품이 공연될 수 있는 나라, 관객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는 나라가 일본이에요. 우리처럼 스타가 나오면 매진되고 안 나오면 망하는 이상한 구조와 비교하면 매우 성숙한 시장이죠. 그런 시장에 한국 배우들이 진출하는 게 제 목적이었어요. 가창력에 관한 한 한국인을 따라올 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양권에서는 특히 더 그렇고요.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셰익스피어의 후예들처럼, 일본의 뮤지컬 시장을 주름잡는 한국 배우들을 기대했어요. 700명의 시키 배우들 중 절반을 한국 배우들로 채우고 싶은 게 제 욕심이었죠. 중국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시아 인이 영국이나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건 배역에 한계가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 무대에서는 어떤 역이든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국 배우들이야말로 최적이죠.

 

시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2006년 <라이온 킹> 한국 공연 이후로 아사리 게이타 대표와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가요?
한국말을 잘 모르는 재일교포 통역자로 인해 서로 오해가 생겨서 틀어졌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아사리 게이타 대표도 그렇고. 일본에서는 ‘이거 드세요’는 결례에요. ‘이걸 잡숴주시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는 표현이 온건한데 제 말투가 어때요. 굉장히 직선적이고 험한 말도 막 하는 편인데 그게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문화적인 차이가 있으니 한국 관객의 정서를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는 제 얘기가 마구 뜯어고치겠다는 의미로 전달이 되었으니 아사리 대표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요. 결국 그렇게 틀어졌지만 한 일 년 정도 지난 후에는 학생 연수를 다시 진행했어요. 언젠가는 한국 배우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에서도 해야 하고요. 서울시뮤지컬단에서도 해외 진출의 문은 열어놓고 은퇴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단원 중심의 캐스팅, 창작뮤지컬 제작, 해외 진출 모색까지, 2년의 임기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는데요.
그렇긴 해요. 하지만 저한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2년 뒤에는 억만금을 줘도 더 안 할 거예요. 원래 석좌교수로 1년만 하고 다 접을 계획이었다가 2년 더 일하게 되는 바람에 우리 마누라와 약속을 했거든요.(웃음) 저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잖아요? 서울시뮤지컬단의 정체성을 마련하고 기틀을 잡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은 끝나겠다는 생각을 해요. 후임자가 그 바통을 이어 가줬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해외 시장 개척은 제가 서울예술단 작업을 많이 할 때부터 주장했던 것이었어요. 다른 민간단체가 쉽게 모험하지 못하는 일을 경제적인 부담을 덜 느끼는 관 단체가 개척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 거죠. 물론 국민의 혈세를 마음대로 쓰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일본이나 중국 상해, 광저우 등에 뮤지컬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국제 교류의 경험이 있는 문석봉 씨를 기획 파트로 영입해 함께 작업할 계획이에요. 그 전에 창작뮤지컬 제작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서울시뮤지컬단은 대관 사업을 하다 보니 일 년에 두 차례밖에 공연할 수가 없어 고민이에요. 지방 공연 시장 개척을 고려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서울시 뮤지컬단 단장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2011년이 기대되실 것 같습니다.
구상은 계속하고 있는데 얼마만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투란도>는 사비라도 털어서 3주 정도 연습실에서 시연회를 가질 생각이에요. 정당한 비평, 양질의 의견들을 모아서 수정·보완 작업에 반영할 테니 그때 와서 평가해주세요. 하지만 지금 제게 뜨거운 감자는 올해 8~9월에 계획되어 있는 <피맛골 연가>예요. 서울시에서 20억 원을 들여 만들었는데 서울시뮤지컬단이 배제되어 작업됐더라고요. 현재 풀어야 할 실타래가 너무 많아서 고민에요. 고생해서 만든 작품을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8호 2011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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