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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TAR INTERVIEW] <스팸어랏>의 박영규 - 코미디는 나의 운명 [No.85]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소품협찬 | DARE 2010-10-05 6,113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 역을 통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배우 박영규. 아들을 가슴에 묻는 아픔을 겪으며 2005년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뮤지컬 <스팸어랏>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이 앞섰던 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서 왕과 다섯 명의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과정에 벌어지는 황당하고 엉뚱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에피소드를 웃음으로 그려낸 코미디 뮤지컬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과 주체할 수 없는 끼로 똘똘 뭉친 배우가 선보일 무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준다.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아서 왕 역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는 배우 박영규를 만났다.

 

 

연습실 생활은 재미있으신가요? 워낙 코믹한 작품인 데다 함께 하는 배우들 역시 유머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라 웃음이 떠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매일 웃다가 끝나는 것 같아. 연습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공연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행복해. 오늘은 프랑스인들에게 쫓겨서 도망가고, 도망가면서 이상한 사람들 만나 엎어지고 자빠지는 장면들을 연습했지. (정)성화, (정)상훈, (김)재범 등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 순발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에 웃음 코드를 알고 연기를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


위기의식을 느낄 수도 있겠는데요.(웃음)
그런 것보다는 후배들이 재밌는 코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굉장히 반가워. 어차피 그들과 난 세대가 다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역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든. 어떻게 걔들하고 경쟁을 하겠어, 나이로 보나 순발력으로 보나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앞서 있는 것을. 하지만 난 그 다양한 메뉴들을 인생의 연륜으로 극복을 하는 거지. 연기의 근본을 잃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웃음의 코드를 잘 살려 내야지. 근데 젊은 혈기에 너무 오버하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은 생기더라고. 코믹한 장면, 대사들이 워낙 많다보니 관객을 웃기는 데 몰두하다 보면 자칫 작품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에 가끔 시비를 걸기도 해.

 

제작 발표회 때 ‘아서 왕은 꼭 만나야 할 운명의 캐릭터로 와 닿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점이 그렇게 와 닿았던 건가요?
아서라는 한 인간이 갖고 있는 그릇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 나이가 필요한 배역이었어. 나를 통해 백성들이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물고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세워지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시대적 사명을 갖고 있는 인물이거든. 그런데 뮤지컬이라는 장르이다 보니 깊이 있고 진지한 내용 속에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희화화해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 모든 것을 큰 그릇으로 안아서 극을 이끌어가는 것도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왕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뇌가 크게 와 닿았던 것 같아. 팻시가 옆에 있지만 자신은 혼자라고 느끼는 아서의 ‘I`m All Alone’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느낌이거든. 중요한 것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혼자라는 생각에 외롭고 쓸쓸해할 때 누군가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걸 보여준다는 거야. 외롭다 노래하는 아서 곁에 호수의 여인 기네비어가 나타나잖아.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또는 누군가가 내 곁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야 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져야 할 소중한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아서가 꼭 그렇더라고.

거기서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하신 거군요.

그렇지. 살아오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많았고 그 속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면 누가 꼭 나타나더라고. 가난한 시절을 보내면서 배우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을 했잖아. 그 과정 속에도 분명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은 내 인생을 바꿔놨어. 그동안의 일들은 나를 더 성숙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지만 그 일만큼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더라고. 부모님 일찍 돌아가셨지, 하나뿐인 아들도 하늘로 떠났지, 또 그때 내가 이혼한 상태였어. 정말 혼자라고 생각할 때 지금의 아내가 나타났고, 물론 그걸로 슬픈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던 내 마음을 다 채울 수는 없었겠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외로워하다 여자를 만나고 뮤지컬을 하고 결혼까지 하는, 나를 꼭 닮은 아서를 만나게 된 거야.


이제 아픈 상처에서 벗어나신 건가요?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슬프고 아픈 감각조차 없었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새살이 돋고 마비됐던 신경도 돌아오더라고. 지금에야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아, 이게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뮤지컬 출연이 처음은 아니시지만 외국인 연출가와의 작업이 힘들지는 않나요?
아서를 두고 잠깐이나마 고민을 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데, 나는 ‘배우는 연출가로 인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야. 연출가가 판을 제대로 짜주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거거든. 그런데 알아보니 데이비드 스완이 한국에서 작업을 꽤 많이 했더라고. 작품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 일단 믿어보자 싶었고, 실제로 만나서 그가 갖고 있는 코미디관을 들어보니 나와 또 비슷한 거야. 그래서 더 열심히, 재밌게 작업하고 있어.


 

선생님의 코미디관이 궁금한데요.

나는 말야, 웃기려고 마음을 먹고 연기를 하면 그건 코미디가 아니라고 생각해. 진실한 마음으로 상황을 그려내고 그다음에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 따라 웃겨야 하는데, 개인기를 하려는 마음이 앞서면 진실성이 왜곡되고 웃음의 깊이도 가벼워져.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고. <순풍산부인과>나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나는 절실했어. 웃기려는 마음보다 어떤 절실함 속에서 연기를 했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캐릭터가 실제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거야.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전하는 게 내 스타일이야. 미달이 아빠가 만날 친구들한테 밥 얻어먹으니까 결국에는 친구들이 계산서를 마구 들이밀어. 그러면 계산하는 척하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도망치는 거야. 그러면서도 정말로 절실하게 ‘나는 오늘도 얻어먹고 도망갔다. 30년 된 우정을 버렸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하는 독백을 하잖아. 그건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꼭 같지는 않겠지만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거든. 그러니까 웃음이 터지는 거야. 꾸밈없이 절실한 삶이 묻어나야 해.


<순풍산부인과>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주로 멜로물에 출연하신 데다 조금은 느끼한 캐릭터들을 연기하셨잖아요.
그렇지. 내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순풍…>에서 날 버려버린 거야. 배우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걸 깨달은 이후로 내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불편했거든. 나를 망가뜨려서 가루로 만들었다가 리셋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기회가 온 거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냐고 놀랐지만, 사실 미달이 아빠도 내가 갖고 있는 모습이거든. 흉내 내고 만든 연기가 아니라 그냥 박영규. 그것이 내 배우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코미디가 된 거야. 그게 운명이지 싶어. 정말로 진실된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그런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서가 그 계기가 되면 좋겠어 나는.


연기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 극단 목화의 오태석 선생님과 작업하셨다고 들었어요.
1974년이었나? 오 선생님이 서울예대에서 가르치셨을 때 제자들몇 명을 모아서 ‘오사단’을 만들어 떠돌아다니며 연극을 했어. 그땐 내가 막내였는데 한 십여 년을 같이 다녔지. 그러다 방송을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선생님한테 그랬어. ‘이제 그만 떠돌고 극단을 하나 만드시죠’ 한 게 ‘목화’야.


극단 목화의 창단 멤버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창단 멤버가 아니라 극단 목화는 나하고 오 선생님하고 만든 거야. 선생님이 목화라는 이름을 갖고 오셨고 둘이서 같이 극단 문패를 달았어. 그 뒤로 정원중, 성지루… 뭐 지금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다 거쳐 갔지. 오 선생님은 배우의 근본을 만들어주시는 분이었어. 내가 거기서 훈련을 오래 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지, 만약 혼자서 폼 잡고 여기저기서 배우 생활을 했으면 지금의 내가 안 됐을 거야. 오 선생님이 목화를 잘 이끌고 계시고 활동도 왕성하게 하시지만 벌써 일흔을 넘기셨으니 언젠가는 내가 마무리해야겠지.


방송에 데뷔한 것도 극단 목화 작업 중이었다죠?
1984년에 오 선생님이 MBC 창사 기념 뮤지컬 <메밀꽃 필 무렵>을 연출하셨는데, 그때 내가 약장수 역으로 무대에 섰어. 윤복희 씨가 아내 역이었고 녹화 방송되는 공연이었거든. 그동안 무대 위에서 쌓은 노하우를 신이 나서 발휘한 것이 방송국 사람들 눈에 띈 거야. 그래서 1985년 1월 6일에 방영한 베스트셀러극장 <초록빛 모자>에 서갑숙과 출연하게 된 거지. 정확히 25년 됐네. 나는 시골서 올라와 오 선생님을 만난 것 자체가 운명이 아니었나 싶어. 귀하고 귀한 인연을 만나서 그분을 따라다니게 됐고, 왠지 모르게 선생님이 갖고 계신 모습이 좋았어. 그분의 연극 언어를 배우고 싶어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따랐고, 또 거기서 얻은 것을 가지고 극단 목화를 만들고, 이렇게 배우로 살고 있는 것 모두가 운명이라고 생각해. 배역도 마찬가지야. 난 아서도 미달이 아빠와 마찬가지로 운명처럼 내게 왔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 소중한 인연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도록 연습을 하고 있는 거야. 아서한테 내 운명을 담아서 최선을 다할 때 그 배역이 내게서 안 떠나지 서운하게 하면 도망가거든. 그럼 아서 없이 박영규가 무대 위에서 혼자 폼 잡다가 끝나는 거야.


선생님이 출연하신 <7인의 신부>를 객석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 작품이 첫 뮤지컬 출연작이시죠? 그때가 1995년이었으니까, 드라마를 통해 어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실 때이기도 했겠네요.
그걸 어떻게 본 거야 도대체.(웃음) 그때 좀더 열심히 할걸 후회스러워. 한창 인기를 얻고 정신없을 때였고, 또 공연 기간이 짧아서 중요하게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 돈과 인기에 배우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던 게지. 1990년에 시립가무단의 <고향의 민들레>에 출연했을 때도 그렇고, 작품에 집중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아쉬움이 늘 많이 남아 정신을 차린 후로는 ‘언젠가 내가 꼭 뮤지컬에서 운명적인 배역을 맡아서 제대로 된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이번에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거든. 관객들한테, 후배들한테 진정한 배우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어. 난 그냥 적당히 나이 먹고 ‘생활배우’ 하면서 늙어가고 싶진 않거든.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야지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 나이에도 설 수 있는 무대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노래를 누구 못지않게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갈고닦으면 ‘저런 배우는 정말 뮤지컬을 해야 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된다고 보거든. 외모에서 풍기는 중량감, 인생이 묻어나는 음색… 나 같은 배우가 왜 안 필요하겠어.(웃음) 석 달 공연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을 구경하지 못한 새로운 관객 백만 명은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노력할 거야. 백만 명은 좀 심했나? 그럼 오십만 명.(웃음) 어쨌거나 내가 밤잠을 설치면서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게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이 배우의 도리가 아닌가 싶어.


<순풍산부인과> 이후로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셨지만, 미달이 아빠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다른 캐릭터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은 없으세요?
이번에도 분명히 내가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사람들은 웃을 거야. 하지만 그 순간에 진지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박영규가 미달이 아빠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야겠지. 물론 진지하면서도 또 웃길 수밖에 없겠지만 중요한 건 관객들이 ‘저 사람이 아서라는 인물에 푹 빠져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진지함 속에 묻어나는 코믹 연기를 통해 새로운 평가를 받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내가 조금 있으면 예순인데 젊은 애들이랑 같이 춤추고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아서는 춤을 안 췄다는데 데이비드가 나를 춤추게 해서 걱정이야. 하지만 전문 뮤지컬 배우들처럼 제대로 해내고 싶어. 관객들이 ‘저 사람 저거 안 하면 뭐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말이야. 폐결핵 걸렸을 때 무대 위에서 죽자는 생각으로 공연했던 것처럼, 죽을 각오로 연습하고 있어. 나뿐만 아니라 배우 모두가 적진에 투입된 특공대 같다니까.(웃음)


배우로서 목표가 있다면요?
음, 웃음에 관한 작품은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 코미디 영화도 좋고 아주 비극적인 것도 좋아. 웃는 거나 우는 건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지 같은 감성이거든. 울 수 없는 사람은 절대 웃을 수도 없어. 그런 감성을 담은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프로듀서도 하고 연출까지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연기도 물론 하겠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아보고 싶어. 코미디는 나의 운명이니까. 뮤지컬도 기회가 닿으면 계속 도전하고 싶고.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5호 2010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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