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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뮤지컬 프로듀서의 세대 변화 [NO.166]

글 |박병성 2017-08-04 5,042

뮤지컬 프로듀서는 작품의 선정부터 최종 흥행 결과의 책임까지, 한마디로 한 작품의 A부터 Z까지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프로듀서는 작품의 선정, 창작진 확보, 캐스팅, 제작비 확보, 마케팅 결정 등 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진다. 프로듀서의 성향에 따라 창작에 깊이 관여하거나, 창작자에게 맡기는 등의 스타일은 다를 수 있으나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프로듀서의 개념이나 역할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뮤지컬 프로듀서의 개념이 명확해진 것은 불과 15년이 채 되지 않았다.



뮤지컬 프로듀서 0세대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프로듀서는 누구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답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전문적으로 뮤지컬을 제작했던 1960년대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뮤지컬 단체 예그린악단의 기획자나 대표를 거론할 것이다. 예그린악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전의 극단 방식과는 다르게 체계적으로 뮤지컬을 제작했다. 하지만 뮤지컬 프로듀서의 등장을 언급할 때에는 산업적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업적 판단이 고려되어야 한다. 자비를 들이거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거나,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방식을 상업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뮤지컬 프로듀서의 등장을 말할 때는 이전의 방식과 구별되는 제작 방식이 요구되고 이것은 상업적인 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뮤지컬 프로듀서는 뮤지컬이 그렇듯 서구적인 개념이고, 여기에서 상업적인, 또는 산업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지원으로 뮤지컬을 제작한 예그린악단에서 최초의 뮤지컬 프로듀서를 찾는 일은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롯데 그룹이 뮤지컬 제작을 시작한 1989년 롯데월드 예술극장의 김용현 프로듀서(현 팍스걸쳐 대표)를 최초의 뮤지컬 프로듀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용현 프로듀서는 롯데월드 예술극장에 소속된 직원으로 작품 제작에서 프로듀서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결과의 최종 책임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프로듀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삼성영상사업단과 공동 제작 형태로 <브로드웨이 42번가>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제작한 서울뮤지컬컴퍼니, TNS 당시의 김용현, 설도윤 프로듀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 이보다 앞선 1980년대 현대극장의 김의경 대표를 어떻게 볼 것이냐, 그리고 극단 체제에서 뮤지컬 극단으로 진화한 신시, 에이콤, 환 퍼포먼스의 박명성, 윤호진, 송승환 대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현대극장은 동인제 극단 체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며, ‘과학화, 전문화, 기업화’를 내걸고 김의경 대표가 작품의 기획, 재정, 심지어 연출과 극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런 면에서는 국내 최초의 프로듀서로 볼 수 있지만 현대극장은 여전히 동인제의 성격이 남아 있었고, 기업의 자금이 투자의 성격이 아닌 후원이나 협찬의 성격이 짙어 엄밀한 의미의 프로듀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1990년대 윤호진, 박명성, 송승환, 설도윤, 김용현 대표는 각각 뮤지컬 전문 극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뮤지컬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들을 흔히 뮤지컬 프로듀서 1세대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1990년대만 해도 프로듀서라는 명확한 개념이 없어 비록 하는 역할은 프로듀서와 사실상 거의 겹쳤지만 여전히 연극 극단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프로듀서의 개념이 명확해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그러므로 1990년대 윤호진, 설도윤, 박명성, 송승환 프로듀서의 활동은 뮤지컬 프로듀서 0세대로 불러야 할 것 같다.




뮤지컬 프로듀서 1세대

한국 뮤지컬 시장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작품으로 흔히 소개되는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 등장하기까지도 뮤지컬 프로듀서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설도윤 프로듀서조차 2001년 <오페라의 유령> 프로그램 북에 자신의 역할을 ‘제작총감독’이라는 명칭으로 대신했다. 아마도 기존의 대표나 기획자와는 다른 역할이자 당시만 해도 일반화되지 않은 ‘프로듀서’의 우리식 표현일 것이다. 2000년 이전 기사 자료 검색을 통해 ‘공연 프로듀서’를 검색해 보면 대부분 해외 프로듀서이거나, 음반이나 방송 쪽 프로듀서의 개념을 공연에 적용할 때 ‘프로듀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뮤지컬 프로듀서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언론을 포함한 공연계 일반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은 2002년도 일이다. 2002년 설도윤 프로듀서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보엠>에 투자해 작품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2004년 공연 프로듀서협회가 창립될 때는 이제 프로듀서라는 말이 적어도 공연계 내에서는 상용화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뮤지컬 프로듀서라는 개념과 자의식이 생겼던 2000년대 초반의 뮤지컬 제작자들을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에이콤인터내셔널의 윤호진 대표,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 PMC프러덕션의 송승환 대표, 서울뮤지컬컴퍼니의 김용현 대표 등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뮤지컬을 제작해왔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연극으로부터 공연 일을 출발했다는 것이다. 윤호진 대표는 극단 실험극장의 유명 연출가 출신이었고, 박명성 대표 역시 극단 신시에서 기획자로 공연 일을 배웠다. 아역 탤런트로 유명한 송승환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젊은 시절부터 연극 제작에 몸담아 왔다. 설도윤 대표 역시 현대극장에서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배우로 활동하다 안무가로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김용현 대표만이 유일하게 롯데월드예술극장의 기획자 출신이다. 1세대 프로듀서는 뮤지컬을 산업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면서 프로듀서의 역할을 정립해 왔다. 김용현 프로듀서는 창작뮤지컬을 중심으로, 윤호진, 송승환 프로듀서는 창작과 라이선스 뮤지컬을 병행했으며, 박명성, 설도윤 프로듀서는 라이선스 뮤지컬을 중심으로 제작하며 2000년대 한국 뮤지컬 발전을 이끌었다.




2세대 프로듀서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들이 국내 뮤지컬이 산업화되기 이전부터 뮤지컬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이후 등장하는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 뮤지컬해븐의 박용호 대표, 쇼노트의 김영욱 대표 및 임양혁, 송한샘 부대표는 1세대 뮤지컬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하며 실무를 익히면서 독립하여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이들이다. 편의상 이들을 2세대 프로듀서라고 해본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청년 신춘수는 T.N.S에 입사하여 설도윤, 김용현 프로듀서 밑에서 기획 일을 배웠다. 신춘수 대표가 오디뮤지컬컴퍼니를 만들고 독립하면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설도윤, 김용현 대표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춘수 대표는 이후 <지킬 앤 하이드>를 성공시키면서 2000년대 중후반 가장 많은 뮤지컬을 올리는 제작자로 발돋움했다.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인 뮤지컬해븐의 박용호 프로듀서는 1990년대 중반 해외 합작 프로젝트인 <브로드웨이 42번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제작되는 과정을 경험하며 공연계에 입문했다. 이 작품들은 설도윤 프로듀서와 삼성영상사업단이 합심한 결과물이다. 박용호 프로듀서는 삼성영상사업단 이후 SJ엔터테인먼트 등을 거쳐 독립하여 뮤지컬해븐을 만든 후 마니아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였다. <쓰릴 미>, <넥스트 투 노멀>, <스프링 어웨이크닝> 등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쇼노트의 김영욱, 임양혁, 송한샘 프로듀서는 <오페라의 유령>의 제작사 제미로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이다. 제미로가 해체되면서 의기투합하여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 것이 쇼노트였다. 제미로에는 설도윤 프로듀서가 대표로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 디즈니 뮤지컬 <미녀와 야수> 등의 제작 과정을 경험하고 독립한 후 쇼노트의 첫 작품 <헤드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를 계기로 <벽을 뚫는 남자>,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 음악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뮤지컬 프로듀서 2세대로 볼 수 있는 이들은 1세대 프로듀서와 작업하면서 프로듀서의 역할을 배우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또한 이 세대의 특징이라면 본격적으로 공연계 입문을 연극이 아닌 뮤지컬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선 세대는 연극적인 색깔이 남아 있던 단체에서 공연계에 입문했다면, 2세대 프로듀서는 산업적인 성격이 명확해진 뮤지컬 제작사를 통해 공연계에 데뷔했다. 2세대 프로듀서는 기존 선배 프로듀서들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시장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거나 상대적으로 덜 견제당하면서 공연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블루오션을 찾아서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뮤지컬 시장은 놀랄 만큼 급격하게 성장한다. 작품 수도 해마다 많아지고, 더불어 시장의 규모도 커진다. 이때부터 과열 경쟁 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도하는 시장 환경상 유명 뮤지컬의 라이선스 획득을 위해 국내 제작사 사이에 뜨거운 경쟁이 벌어진다. 설앤컴퍼니, 신시컴퍼니, 오디컴퍼니 등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제작사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시장에 새로운 제작자가 들어설 여지는 많지 않았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유명 뮤지컬의 라이선스 획득 경쟁에서 신생 제작자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로열티를 굉장히 높게 지불하는 방법밖에 없었으며, 이마저도 해외 원작자에게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뮤지컬 시장의 블루오션을 발견하고 등장한 프로듀서가 NDPK의 정홍국, EMK뮤지컬컴퍼니의 엄홍현이다. 이들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 일색인 시장에 프랑스 뮤지컬과 체코, 비엔나 뮤지컬을 소개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장을 개척했다. 2005년 정홍국 대표는 <노트르담 드 파리>를 들여와 성공시키면서 국내 프랑스 뮤지컬 붐을 주도했다. 애초 호주와 한국의 문화교류 사업을 하던 정홍국 대표는 <노트르담 드 파리>를 너무 좋아해 제작에 직접 뛰어든 경우다. 내한 공연으로 작품의 인지도를 높인 후 라이선스 공연을 성공시켰다. 2005년 <노트르담 드 파리>가 크게 성공한 이후 국내 뮤지컬 시장에 다양한 프랑스 뮤지컬이 소개되었다. EMK뮤지컬컴퍼니의 엄홍현 프로듀서 역시 공연계와 상관없는 사업을 하다, 2006년 체코 뮤지컬 <드라큘라>로 공연계에 뛰어들었다. <드라큘라>는 크게 실패했지만 굴하지 않고 체코 뮤지컬 라이선스 대행 업무로 전환해 <햄릿>, <삼총사>, <잭 더 리퍼> 등을 수입한 후, 2010년 비엔나 뮤지컬 <모차르트!>를 시작으로 국내에 비엔나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그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SMG의 박영석 대표 역시 블루오션을 개척한 프로듀서로 볼 수 있다. 박영석 프로듀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드거 앨런 포>, <오! 캐롤>, <나폴레옹> 등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콘텐츠를 스몰 라이선스(넌 레플리카)로 들여와 한국적인 각색을 통해 국내에 소개했다. 앞선 정홍국, 엄홍현 프로듀서처럼 특정 뮤지컬에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수정 보완하면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한국화 과정을 통해 선보이는 전략을 짰다.


정홍국, 엄홍현, 박영석 프로듀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선스 경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낮은 신인 프로듀서로서 레드오션에서 경쟁하는 대신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서 성공 사례를 만든 경우이다. 정홍국, 엄홍현 프로듀서가 시각을 브로드웨이에서 유럽으로 돌린 것이라면, 박영석 프로듀서는 검증된 작품에서 덜 주목받은 보석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대상을 바꿨다. 전자가 관심 국가가 바뀐 것이라면, 후자는 관심 대상이 바뀐 것이다. 후자로의 변화는 창작의 영역이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변화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창작뮤지컬 프로듀서

1990년대에는 서울뮤지컬컴퍼니, <블루사이공>의 극단 모시는사람들, 극단 맥토 등 창작뮤지컬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단체가 꽤 여럿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서울뮤지컬컴퍼니가 꾸준히 창작뮤지컬을 선보인 가운데, <난타> 제작사인 PMC프러덕션, <명성황후>를 만든 에이콤 등 대형 창작뮤지컬 제작사가 돋보였을 뿐 중소 창작뮤지컬 제작사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창작뮤지컬은 무수히 만들어졌으나 두 작품 이상 성공적인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 단체가 앞서 언급한 대형 제작사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2010년대로 넘어서면 분위기가 바뀐다. 신시컴퍼니나 설앤컴퍼니 등 라이선스를 전문으로 제작해 오던 대형 뮤지컬 제작사가 점점 창작뮤지컬 제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은 2010년대 중반에 이르게 되면 명확해진다. 꾸준히 창작뮤지컬을 제작해 온 PMC프러덕션, 에이콤은 물론 CJ E&M, EMK뮤지컬컴퍼니까지 이젠 라이선스 뮤지컬만 제작하는 제작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창작뮤지컬 제작에 활기를 띤다. 이는 앞으로 우리 시장이 확장성에 한계가 있는 라이선스 뮤지컬 제작만으로 유지되기 힘들다는 시장 환경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창작뮤지컬 위주로 제작하는 프로듀서가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프로듀서가 HJ컬쳐의 한승원이다. 그는 2014년 <빈센트 반 고흐>를 시작으로 <살리에르>, <파리넬리>, <라흐마니노프> 등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을 제작해왔다.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 해 신작을 하나 이상 선보이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라이브의 강병원 프로듀서는 2008년 <총각네 야채가게>로 뮤지컬 프로듀서에 데뷔한 이후, <마이 버킷 리스트>, <팬레터> 등을 선보였다. 라이브의 작품들은 한국 뮤지컬의 아시아 시장 진출 붐이 한창이던 2013년부터 일본 등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뮤지컬 시장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이는 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의 장상용 프로듀서이다. 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는 조용필 콘서트 등 주로 대형 콘서트를 제작해 오다가 2014년 <그날들> 재공연부터 뮤지컬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 제작사의 지금까지 창작뮤지컬 흥행 성적은 매우 좋다. <그날들> 이후 <아랑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소, 중, 대극장 뮤지컬을 흥행시키며 주목을 받았다. <로기수>를 제작한 아이엠컬처의 정인석 프로듀서 역시 창작뮤지컬 제작자로 최근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카포네 트릴로지>나,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등 기존 정통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벗어난 작품을 선보이며 공연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국내 뮤지컬 시장의 흐름은 창작뮤지컬의 성장 중심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변화는 기존 프로듀서들의 창작 영역으로의 확장 그리고 새로운 창작뮤지컬 프로듀서의 등장을 기대하게 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6호 2017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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