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요즘 전병욱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그와 함께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던 창조자 로댕을 만나기 위해 <신의 손-로댕> 회고전을 찾았다.
눈부시게 푸른 날씨에 꼭 어울리는 차림을 한(깨끗하게 잘 다려진 흰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전병욱이 가로수 언덕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미술관 입구에 도착해 있는 우리를 발견한 그가 싱긋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와, 진짜 너무 좋네요.” 한낮에 갤러리를 찾는 이런 여유는 정말 오랜만에 가져본다며 전병욱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왜 아니겠나. 그는 현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와 <웃음의 대학>, 두 작품의 출연을 병행하고 있으며 그 외 몇 가지의 다른 일(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그의 바람대로였다면 우린 갤러리가 아닌 영화관에서 만났어야 했다. 국내에 친숙한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연출한 첫 장편영화 <우리 친구 지구인>을 보기 위해 말이다(그는 오는 7월 국내에서 초연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연극 <인간>에 출연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벤트 성으로 딱 한 차례 진행되는 <우리 친구 지구인>의 시사회 일정에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차선책으로 제안한 로댕의 회고전을 관람하러 미술관에 온 것이다. “이렇게 화창한 날 미술관에 오니까 진짜 좋네요.” 그는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기뻐했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자 로댕의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신의 손」이 우리를 맞았다. 로댕의 대리석 조각 중 진수로 손꼽히는 「신의 손」은 파리 로댕미술관에 상설 전시됐던 작품으로 해외에 반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땅 위에 손이 있고, 손이 다시 땅을 들고 있는 게 인상적이에요. 사실 전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라고 전병욱이 말했다. 로댕의 초기 걸작들로 구성된 ‘청동시대’(이번 회고전은 아홉 가지 테마로 방이 나뉘어 있다)를 지나 다음 전시실인 ‘지옥의 문’에 도착했다. “「지옥의 문」은 정말이지 볼 게 너무 많잖아요. 로댕미술관에서도 이렇게 한참 이 앞에 서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대학 졸업 직후 떠난 유럽의 추억이 떠오른다며 신이 나서 말했다. “미술관 화단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정원에 전시된 「생각하는 사람」을 딱 만난 거예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좀 높은 데 있어서 올려다봐야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커서 놀랐어요.”
사랑에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제4부 ‘사랑으로 빚은 조각’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좀처럼 쉽게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한 관을 다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곰곰이 하는 걸까? “각자의 해석이 다르고 즐거움이 다를 텐데 저만의 즐거움을 찾아야죠. 아, 이건 도대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네요.” 「안드로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병욱이 말했다. 우리는 두 연인이 감싸고 입을 맞추고 있는 조각 「입맞춤」 앞에서 발을 멈췄다. “남자를 감싸고 있는 여자의 오른팔이 안 보여서 조금 아쉬워요. 팔의 위치가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끈끈하게 공유하고 있는지, 서로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잖아요. 오른손이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새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재촉해야 했다. 우리는 2층의 마지막 전시관을 벗어나 다섯 개의 방이 기다리고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의 첫 번째 전시실인 ‘로댕의 작업실 엿보기’ 벽면에는 로댕의 작업실 사진들이 거대하게 프린트돼 있었다. “와” 전병욱이 짧은 탄성을 외쳤다. 그는 이 공간에 전시된 조각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몸을 웅크린 여체를 쥐고 있는 왼손, 「악마의 손」을 골랐다. 악마의 손 위에서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자 하는 나약한 인간의 의지가 발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 걸 보면서 얻은 창의적인 생각들은 삶에 자극이 돼요. 연기에 영감이 되기도 하고요.” 이 이야기가 과장되게 들릴지 몰라도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과 관련된 작품들로 구성된 ‘까미유 클로델’까지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전시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갤러리에서 나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 때는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어요. 근데 학교가 예술학교(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이다)다보니 과제가 만날 전시회, 공연 보고 레포트를 쓰는 거였거든요. 처음에는 이게 뭐야 싶었는데 자꾸 보다보니까 뭐랄까… 음악을 듣는다, 그림을 본다, 이런 느낌들이 생기는 거예요. 작품을 해석하고 나서 그걸 확인할 때의 뿌듯함!” 오늘 그는 그런 과정을 아주 즐긴 것 같았다. 오늘 본 작품 중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자 고민스러운 표정을 하고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말했다. “아, 너무 많은데. 「입맞춤」, 「악마의 손」, 「도망가는 사랑」그리고 또… 「도망가는 사랑」은 정말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닐까, 잡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닐까, 모르겠더라고요.” 그는 불쑥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좀 더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냐면 요즘 제일 큰 고민거리가 인간이고 그 다음이 사랑이거든요. <웃음의 대학>에 그런 대사가 있어요. ‘이 세상에서 사랑 이야기를 뺀 연극은 단 한 작품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무슨 소리야, 사랑 이야기 안 나올 수도 있지, 사랑 이야기 안 하는 공연 좀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공통 주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심, 사랑이죠. 사랑이 인간의 존재 이유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염세주의적이었던” 그에게 이건 정말 놀라운 변화 아닌가.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준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냥…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사람은 조금씩 바뀌잖아요. 필요에 따라 그렇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변하는 게 좋아요. 음,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쉬울 줄 알았단 것들이 쉽지 않더라고요.”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전병욱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냅킨과 볼펜을 가지고 뭔가를 끼적거리며, 족집게 강사처럼 오늘의 대화를 두 줄로 요약해 말했다. “전 요즘 인간과 사랑에 대한 고민으로 배우 생활을 하고 있고요. 배우 생활은 결국 ‘버티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이거 가져가셔도 돼요.” 그가 ‘오늘 대화의 키워드’가 적힌 냅킨을 내게 내밀었다.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니 챙겨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어느새 시계가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는 저녁 공연을 위해 서둘러 떠나야 했다.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남은 전시를 마저 둘러보기 위해 미술관에 남은 나에게 그는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좋겠다. 나머지도 궁금해서 한 번 더 오고 싶은데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전시 기간이 꽤 길군요? 아무래도 한 번 더 와야겠어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1호 201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