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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YORK] <아나스타샤> [No.166]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사진제공 |Joan Marcus 2017-07-18 7,095

역사 뮤지컬과 판타지 뮤지컬 그 중간의 어디쯤    

<아나스타샤> ANASTASIA



20세기 폭스사가 선보이는 뮤지컬


해마다 상승되는 제작비에 골머리를 앓는 브로드웨이 프로듀서와 창작자들이 실패의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택하는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영화나 소설을 무대로 옮기는 것이다. 시즌마다 두세 편의 원작 각색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는데, 이런 변화에는 자회사의 뮤지컬 만화 영화를 무대화해 성공한 디즈니의 역할이 컸다. 물론 디즈니가 만든 모든 뮤지컬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에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타잔>은 500회  공연을 채우지 못했고, 2008년 배우들이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다니는 신선한 연출을 선보인 <인어공주> 역시 900회를 못 채우고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뮤지컬을 선보여 좋은 결과를 이뤄내는 디즈니의 행보는 다른 영화사에 자극이 됐다. 2010년 즈음 몇몇 영화사들이 사내에 공연 팀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20세기 폭스도 그중 하나이다. 20세기 폭스는 2012년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의 창립자이자 디렉터였던 아이잭 허위츠를 영입해 자신들이 보유한 콘텐츠를 뮤지컬화하기 위한 시동을 건다.


20세기 폭스가 지난해 코네티컷 하트포드 스테이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올린 <아나스타샤>는 지난 4월 브로드웨이 진입에 성공하는데, 폭스사의 첫 브로드웨이 입성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나스타샤>의 뮤지컬화 소문이 돌았을 때만 해도 1997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를 원작으로 할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지만, 애니메이션과 율 브리너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1956년 영화 <아나스타샤>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우려 섞인 기대를 보였다.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를 보고 자란 젊은 관객과 옛날 영화 <아나스타샤>를 기억하는 중년 관객을 두루 아우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지난해 코네티컷 트라이아웃 공연은 수정, 보완을 거치면 브로드웨이 입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토니상을 받은 바 있는 베테랑 극작가인 테렌스 맥널리가 대본을 쓰고, 스티븐 플래허티와 린 아렌스 듀오가 작곡과 작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기대와 우려 속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아나스타샤>의 리뷰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는데(별다른 소득이 없는 작품, 또는 정체성이 모호한 작품이라는 등), 관객들은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일반적으로 브로드웨이에서는 공연 평이 좋지 않을 경우 판매량이 저조해지기 마련인데, <아나스타샤>는 개막 2주간 판매량이 저조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거의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공연을 본 평일 저녁에도 빈 좌석이 거의 없었고, 관객들의 반응이 굉장히 즉각적이고 뜨거워 흥미로웠다.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왕족의 이야기


평단에서 지적하는 <아나스타샤>의 가장 아쉬운 점은 ‘아나스타샤’라는 소재가 지닌 애매함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 테렌스 맥널리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1956년 영화와 1997년 애니메이션에서 모티프를 얻어 대본을 썼는데, 각각의 원작이 지닌 다양한 시각과 톤이 한데 어우러지지 못했다. 뮤지컬의 기본적인 플롯은 만화의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연은 파리로 떠나는 아나스타샤의 할머니 마리아 황후가 아나스타샤에게 뮤직박스를 선물로 주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황후가 떠난 후 배경이 무도회장으로 바뀌면 어린 아나스타샤가 부친 니콜라이 2세와 춤을 추고 있는데, 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가씨가 되어 있다.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창문 밖에서 불길이 번지며 폭발음과 총성, 성난 군중들의 소리가 어지럽게 들린다. 볼셰비키 공산당 혁명이 상징적으로 그려지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가족들과 함께 도망을 가려다 할머니가 준 뮤직박스를 두고 나왔음을 깨닫고 되돌아간다. 그 사이 가족들은 암살을 당하고, 무대는 암전이 돼 또다시 십 년이 흐른다. 아나스타샤가 기억을 잃고 아냐라는 이름의 길거리 청소부로 살아가고, 실종된 아나스탸사에게 걸린 보상금을 노리는 사기꾼 드미트리와 블라드를 우연히 만나게 되며, 그들의 꾀임에 넘어간 아나스타샤가 파리에 갔다 마리아 황후를 만나는 등 뮤지컬은 만화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화와 뮤지컬 내용의 가장 큰 차이는 만화에서 주인공의 성공을 방해하는 악당 라스푸틴과 그의 심복인 흰박쥐 바톡이 뮤지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볼셰비키 공산당 혁명이라는 상황과 모호한 ‘악’,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글렙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라스푸틴과 바톡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역사적 사실과 판타지가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뮤지컬 톤은 중심을 잃는다. 글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산당 지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부친이 성공하지 못한 볼셰비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실종된 아나스타샤에 대한 루머를 퍼뜨린다. 만약 아냐가 아나스타샤일 경우 그녀를 죽이는 것도 그의 임무이다. 아냐와 글렙은 공연 초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중간중간 짧게 스친다. 그러다 아냐 일행이 파리에 도착하면서 아냐가 아나스타샤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그녀에게 총을 겨누지 못하고 행복을 빌어주며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마무리된다. 아나스타샤의 안타고니스트인 볼셰비키 혁명과 그 세력을 대표하는 글렙이 아나스타샤와 로마노프 왕조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인 중층성을 보여주려는 의도겠지만, 작품의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로마노프 왕가의 몰락에 대한 설명이 깊이 있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설정은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극 전반에서 역사적인 얘기를 깊이 다루면, <아나스타샤>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지닌 동화적인 매력을 잃는다는 딜레마가 있었을 것이다. 왕정 체제도 무너지고, 공산 혁명도 실패로 돌아간 21세기의 현실에서 ‘아나스타샤’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니메이션은 볼셰비키 혁명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역사적 인물인 라스푸틴과는 전혀 무관하게 동화적인 절대 악의 존재를 창조해 선악 구도를 확실히 했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아나스타샤와 그녀를 데려가 보상금을 받으려 한 허구적 인물 장교 부닌의 관계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춰서 역사적 상황과 거리를 두었다. 아나스타샤라는 인물과 로마노프 왕조가 지닌 역사성을 생각할 때, 맥널리가 극작가로서 극에 역사를 좀 더 끌어들이고 싶었던 의도는 이해하지만, 2017년 미국의 현실에서(특히 러시아의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의 이 시점에) 허구가 아닌 역사 속의 아나스타샤 대공녀와 공산 혁명, 그리고 뮤지컬의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매끄럽게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부분들이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음악과 무대


구성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매 공연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뮤지컬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스티븐 플래허티의 음악,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LCD 스크린과 조명,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아나스타샤>는 전형적인 뮤지컬 구성을 따르는데, 그걸 전달하는 데에 스티븐 플래허티의 음악은 시작부터 끝까지 적재적소에 왈츠와 발라드, 코믹한 듀엣과 스윙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배치하며 극의 전개를 돕는다. 애니메이션에서 잘 알려진 ‘Journey To The Past’나 ‘Once Upon A December’, ‘Paris Holds The Key’ 등은 뮤지컬에 어울리게 편곡됐고, 아냐가 드미트리와 블라드를 만나서 자신의 아련한 기억을 되짚으며 부르는 감성적인 ‘In My Dream’이나 파리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의 클럽인 네바 클럽에서 마리아 황후의 시중을 드는 릴리 공작부인과 앙상블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노래하는 스윙풍 노래 ‘Land Of Yesterday’ 등 새롭게 쓴 뮤지컬 넘버들도 이야기를 다채롭게 표현해 낸다. 특히 ‘Paris Holds The Key’는 코네티컷 트라이 아웃 공연에선 애니메이션에서 차용된 부분이 훨씬 더 많아서 작품의 일관성을 떨어뜨렸지만, 뉴욕 공연은 뮤지컬다운 2막의 오프닝 곡으로 만들어져 파리에 겨우겨우 도착한 아냐 일행의 앞으로 일정을 낙관적으로 풀어내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사랑과 살인에 관한 젠틀맨의 가이드>로 토니상을 받은 연출가 다코 트레스냑은 내용상의 문제점을 감안해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도록 완급 조절을 훌륭히 해낸다. 또한 소소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적절하게 사용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게 노력한 점이 돋보였다. 최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열연도 작품에 힘을 싣는다. 아나스타샤를 맡은 크리스티 알토매어는 1막에서 아냐를 연기하면서 유독 감정이 격해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강한 인물이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았다. 마리아 황후 역을 맡은 메리 베스 필은 브로드웨이의 베테랑으로, 모든 배역을 통틀어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2막에서 너무 많은 가짜 아나스타샤의 등장에 지쳐 더 이상 아나스타샤를 찾지 않겠다며 부르는 ‘Close The Door’는 공연에서 가장 깊이 있는 장면 중 하나였다. 글렙 역의 라민 카림루는 <오페라의 유령>으로 특히 잘 알려진 배우로, 늘 그렇듯 감미로우면서 파워풀한 목소리를 자랑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글렙의 애매한 인물 설정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결과를 낳는다.


무대 디자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LCD 스크린을 최대한 활용한 무대 전환이었다. 무대 중간쯤 반원형으로 여섯 개의 아치형 창문이 있는데, 중간 두 개는 무대 위쪽 플라이 공간으로 올라가고, 왼쪽 두 개, 오른쪽 두 개는 그 자리에서 회전하는데, 이를 통해 대도구가 이동하거나 배경 전환이 이뤄진다. 아치 뒤에 위치한 LCD 스크린 역시 러시아 왕궁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 기찻길, 파리의 밤거리 등등 영화 못지않게 다양한 배경을 그려낸다. 좀 더 연극적으로 풀어내지 않은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LCD 스크린이 효과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2막 오프닝 장면에서 아냐 일행이 파리의 에펠탑을 방문하면 LCD 화면을 활용해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에펠탑을 오르는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는데, 특히  안무와 함께 LCD 화면 뒤로 변하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LCD 화면을 통해 연출되는 벚꽃이 흐드러진 장면 또한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소재가 아니라 접근의 문제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나타샤, 피에르와 1812년의 대혜성> 또한 <아나스타샤>처럼 구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이 두 작품은 소재에 대한 접근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나타샤, 피에르와 1812년의 대혜성>이 소설을 원작으로, 역사는 배경으로만 두고 인물들의 관계와 내면에 집중해 오히려 더 어른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로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면, <아나스타샤>는 원작의 동화적인 이야기에 역사적 사실을 더해 소재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작품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의 기초가 부실한 상황에서도, 음악과 시각적 장치로 관객들을 극장으로 모으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인기가 얼마나 지속될지 올여름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6호 2017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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