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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올 댓 재즈(All that Jazz)>의 서병구 연출 [No.77]

글 |김영주 사진 |이맹호 2010-02-17 5,830

하나로 모이는 백 갈래의 길

한파가 계속되던 지난 1월 15일, 연희동에 있는 연습실에서는 신작 뮤지컬 <올 댓 재즈>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런 스루가 진행되고 있었다. <댄서의 순정>, <오디션>의 최대철과 <바람의 나라>, <샤우팅>의 문예신이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큐 사인을 주는 사람은 이 작품으로 연출가 데뷔를 하는 베테랑 안무가 서병구였다.

 


All That Dance
브로드웨이에서 안무가로 성공한 한국인 유태민은 자신의 안무 인생을 되돌아보는 신작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는 화제의 인물이지만 누구에게도 인터뷰를 승낙하지 않아 베일 속에 가려진 스타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태민이 케이블 채널 PD인 서유라를 자신의 인터뷰어로 지목하고, 유라는 복잡한 마음으로 뉴욕행 비행기를 탄다. 사실 그녀와 유태민은 한때 연인이자 댄스 파트너였던 것. 하지만 막상 도착한 뉴욕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 유라는 자신을 지목한 것이 유태민이 아니라는 사실과, 과거에 자신의 것이었던 태민의 옆자리를 데이비드라는 이름의 한국계 입양아 출신 댄서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처받는다. 극은 유태민이 간직한 과거의 사랑과 상처가 현재 그의 예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예술이 좀체 마무리 하지 못했던 옛 기억을 어떻게 묻어둘 수 있게 도와주는지를 담아간다. 태민의 춤을 자신의 몸에 담아내는 댄서 데이비드의 사랑과 비애 역시 진지하게 다뤄진다.
배우와 연출의 면면을 살펴보고 당연히 댄스 뮤지컬이겠거니 생각했던 <올 댓 재즈>는 이렇듯 배우의 대사와 노래로 극을 풀어가는 일반적인 형식의 뮤지컬이었다. 하지만 춤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이해가 없이 불가능했을 주인공들의 대사와, 그들이 선보이는 심상치 않은 춤은 연출가의 이력을 알 수 있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오랫동안 뮤지컬 안무가로 작품을 만들다보니까 내가 연출이라면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종종 하게 됐다. 처음에는 안무가 외에 다른 꿈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경험이 오래 쌓이다보니까 연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의 연출 제의를 받았는데, 한 안무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용과 주제가 모두 내 색깔을 살리면서 잘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수락을 하게 된 것이다.”
댄스 뮤지컬이 아니냐는 작품에 대한 오해는 안무가 출신 연출가라는 그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밥 포시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했던 동명 뮤지컬 <올 댓 재즈> 때문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만들어졌던 댄스 뮤지컬 <올 댓 재즈> 역시 그가 안무가로 참여한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작품이다. 예전 공연이 포시의 춤을 엮은 레뷔 형식의 공연이었다면 이번 <올 댓 재즈>는 뚜렷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을 구상할 때 처음에는 대극장 뮤지컬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을 소극장 무대에 맞게 전환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뮤지컬 안무가에게 충분한 공간과 댄서의 인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핍이야말로 창조의 가장 좋은 재료라 생각한다면, 그가 어떤 타개책들을 만들어냈을지 궁금하다. 연습실에서 대략적인 틀만 만들어진 채로 진행된 런 스루였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네 개의 거울을 활용한 안무였다. 작품 내내 다양하게 활용되는 이 거울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 실제와 환상이 맞물리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거울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장치인 만큼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올 댓 재즈>의 거울 신은 설득력 있는 안무와 맞물려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무대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도와주는 이 아이디어의 원천이 서병구 안무가의 학창 시절 경험이라는 점이다.
“어렸을 때 집에 AFKN이 나왔는데, <잭슨 파이브>나 <라이자 미넬리 쇼>를 해주면 넋을 잃고 봤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나오는 걸까 하도 신기해서 나도 따라해 보려고 하는데 집에 큰 거울이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생각해낸 게 큰 장롱의 문을 다 열어놓고 거기 비춰가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아쉬운 대로 하이그로시 같은 느낌도 나서 해볼 만했다. 춤추는 내가 장롱 문에 세 사람으로 늘어나서 비치는 걸 보면서, 저 문에 비친 내가 밖으로 나와서 나와 같이 춤을 추고 다시 들어가면 굉장히 멋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공연의 거울 신도 그때의 기억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주·조연 배우 네 명과 앙상블 네 명이 출연하는 이 작품에서 서병구의 안무 스타일은 다채롭게 펼쳐진다. 가령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안무가로 손꼽는 밥 포시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카바레 신에서도 포시 특유의 몸짓은 퇴폐적인 무게감을 다소 덜어놓되 관능은 유지하는 것으로 서병구화된다. 그는 시종일관 인상적인 안무로 작품을 눌러 채우는 대신 강약을 조절하면서 극을 진행한다. 가벼운 패러디처럼 보이는 코믹한 안무도 있고, 현대무용에 재즈, 발레가 가미된 인상적인 독무도 있다. 큰어머니의 전통무용연구소에서 처음 춤을 접하고, 경희대 무용과를 졸업한 후 MBC 무용단 상임안무가로 재직하며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뮤지컬 안무가로 입지를 다져온 그의 지나온 길들과 현재가 모두 투영된 작품인 것이다.

 

뮤지컬은 뮤지컬이어야 한다
연출가로서 배우들을 대하는 것은 처음인 그이지만 디렉션을 주는 모습에서 어색함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극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주요 배역 유태민과 서유라, 데이비드는 모두 더블 캐스팅이 되었는데 배우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문종원은 작품을 처음 구상하면서부터 유태민 역에 딱 맞다고 생각한 배우다. 최대철은 워낙 춤을 잘 추는데 유태민이 의외로 춤을 출 수 있는 장면이 많지 않은 캐릭터라 본인은 아쉬워하는 것 같다. 데이비드 역에는 윤길과 문예신이 캐스팅 되었는데 둘 다 뛰어난 춤꾼이지만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문예신은 이 작품에서 춤도 춤이지만 뮤지컬 배우로서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자신을 대입할 만한 부분이 많은 캐릭터이기 때문인지 연기의 기술적인 면 이전에 진정성과 힘이 느껴진다.”
한 분야에서 이론의 여지없이 일인자로 꼽히는 것은 특별한 재능과 에너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화계에서 그 영향력이 20여 년간 지속된 경우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일단 외부적인 요인들을 떠나서, 그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열정과 창조력이 고갈되지 않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긴 역사를 갖지 못한 한국 뮤지컬계에서 그런 과업을 이뤄낸 사람은 매우 드물고, 그것으로 안무가 서병구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1990년 <캣츠>에서 미스터 미스토펠리스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뮤지컬과 인연을 맺은 이래 독보적인 위치에서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100여 편의 뮤지컬 작품에서 안무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양적인 결과보다 인상적인 점은 그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에서 능수능란하게 작업을 해왔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와 <피핀>, <내 마음의 풍금>과 <올 댓 재즈>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에서 딱 들어맞는 안무를 하면서도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일관된 ‘서병구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이 쉽지 않고 흔치 않은 일을 현재진행형으로 지속하고 있다. “솔직히 내 스타일이 뭔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아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작품을 할 때마다 그 작품에 가장 잘 맞는 새로운 안무를 하되,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말했을 때 바로 연상되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창작자로서 오래 기억될 수 있고, 어느 작품에서나 필요로 하게 된다는 말은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늘 강조하고 있다.”
동서대학교에 출강을 하면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는 그는 뮤지컬 교육이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뮤지컬이 연극의 세부 장르가 아니라 독자적인 특징과 스타일을 가진 다른 분야라는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뮤지컬계에서 안타까운 것 중 하나가 대부분의 연출자들이 연극을 기본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원래 뮤지컬은 연극보다 시각적이고 판타지적인 성격이 강한 장르인데, 한국에서는 유독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얼마 전 <더뮤지컬>과 서면 인터뷰를 한 <컨택트>, <프로듀서스>의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수잔 스트로만이 안무가 출신으로 큰 성공을 거둔 뮤지컬 연출가가 많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시각적으로 작품 전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꿰뚫어보고,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말을 전하자 그는 백퍼센트 동의한다며 반색을 했다.
따져 보면 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뮤지컬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참여한 작품 수로는 어떤 베테랑 연출가도, 작곡가도, 극작가도 그에 비할 수 없다. <올 댓 재즈>로 지금껏 걸어온 길을 조금 더 넓힌 그의 소망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나는 쉬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연습실에 와서 한다. 집에 혼자 있어봤자 그냥 멍해지거나 우울해지기만 하니까.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나에게는 일상이고 삶의 전부다. 바라는 것도 단 하나뿐이다. 일흔 살이 넘어서까지, 진짜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계속 작품을 하는 것. 그때까지 내가 하는 작업으로 존경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7호 201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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