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남단 배터리 공원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타임스퀘어를 중심으로 극장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브로드웨이라고 한다. 뮤지컬 세계의 수도이자 성지인 이 거리의 이름은 그 자체로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동의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수잔 스트로만은 21세기가 시작된 이후 브로드웨이의 영토를 넓힌 일등공신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걸출한 안무가 겸 연출가이다. 그녀는 의외로 남성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브로드웨이에서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토니상 연출상을 거머쥐었고, 네 편의 작품으로 네 개의 안무상 트로피를 휩쓸었다. 가장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쇼 <프로듀서스>와 가장 혁신적인 스타일의 <컨택트>가 같은 연출가 겸 안무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경이로울 정도다. <프로듀서스>가 해오름극장에 올려진 지 4년 만에 다시 한국 관객들을 만나게 된 수잔 스트로만이 자신의 가장 파격적인 작품 <컨택트>에 대해 서면을 통해 이야기했다.
극작가인 와이드먼과 연출가 겸 안무가인 당신이 작곡가도 없고, 배우들이 노래를 하지도 않는 이 작품을 위해 어떤 기준으로 음악을 선택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 - 수백만 명에게 둘러싸여 살지만 어느 누구와도 접촉(교감, 교분)이 없는 - 이 공감할 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세 번째 에피소드 ‘컨택트’에 나오는 음악들은 주인공의 인생에서 나온 곡들입니다. 주인공 남자의 CD 콜렉션이죠. 그가 자살을 시도할 때 그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것처럼 그의 음악들도 펼쳐집니다. 음악을 선택할 때 캐릭터의 인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극의 스토리를 끌어가는 역할도 고려했어요. 두 번째 에피소드 ‘Did you move?’에 나오는 음악은 남편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아내가 저항의 의미로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 발레라는 정황에 맞게 선택됐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음악에는 제가 가장 위대한 무용 음악 편집가로 추앙하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손길이 닿아있지요. ‘그네타기’ 에피소드에서는 스테판 그레펠리의 재즈 바이올린 작품들을 사용했어요. 관객들은 극장으로 들어오면서 클래식 바이올린의 선율을 접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재즈 바이올린 선율로 이어지죠. 관객들은 이 클래식한 그림에 어떤 비밀, 그것도 관능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겁니다.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 비치 보이스의 음악에 맞춰 안무를 한다는 것은 리처드 로저스나 멜 브룩스의 음악으로 안무를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그 음악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무용작가(Writer of Dance)예요.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표현하죠. 그리고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데는 음악만한 것이 없어요. 안무는 스토리를 전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작품을 따라올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때문에 어떤 음악이든 간에 저는 그것이 플롯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 돕는 대화인 것처럼 접근하죠.
<컨택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이나 영감을 준 작품이 있습니까?
우선 첫 번째 에피소드는 프라고나르의 그림 「그네」 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뉴욕의 리틀 이태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극 중 인물들도 그곳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사람들이고요. 세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바는 맨해튼의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에 있는 당구장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낮에는 당구장인데 밤에는 스윙댄스 클럽으로 변하는 곳이었죠. 제가 어느 날 밤 이곳을 방문했을 때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 여인은 춤을 추고 싶을 때마다 앞으로 뛰어나왔어요. 그때 ‘저 여인이 오늘 밤 몇몇 남자들의 인생을 바꾸어놓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뒤의 두 에피소드가 ‘컨택트(접촉, 관계)’에 대한 필사적인 갈망을 보여주는 데 비해 첫 번째 에피소드는 좀더 과장되고 풍자적인 유희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차별성은 의도적인 것인가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컨택트’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 에피소드는 ‘컨택트’를 갈구하지만 남편과는 ‘컨택트’할 수 없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 당장 ‘컨택트’를 하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세 번째 에피소드였고, 그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Did You Move?’ 였습니다. 그리고 ‘그네타기’는 뒤늦게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 세 이야기들이 거꾸로 전개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 아크로바틱과 볼룸 댄스, 두 번째 파트에서 발레, 세 번째 파트에서 스윙댄스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느꼈습니다. 각 파트에 적합한 양식은 어떻게 결정되었습니까?
‘그네타기’장면에는 아크로바틱하고 에로틱한 분위기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댄서들이 그네 위의 안무를 소화해내려면 아주 강인해야 했어요. 두 번째 에피소드는 발레틱한 춤이 필요했죠. 극 중 아내는 남편이 방을 나가자마자 진심으로 반항을 시작합니다. 그저 단순히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그건 클래식 발레죠! 세 번째 에피소드는 ‘밀착 댄스(Contact Dancing)’가 핵심이에요. 스윙은 밀착 댄스의 대명사가 아닌가요. 댄스 파트너들은 서로에게 의지해서 움직여요. 스윙댄서들은 상대방의 품에서 춤추는 동안 사랑에 빠집니다.
작곡가가 없는 뮤지컬 <컨택트>의 안무가이자 연출가로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제가 원하는 대로 창작할 수 있었어요. 제한이나 한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내게 이 작품이 뮤지컬다워야 한다든지, 연극이어야 한다든지 무용 공연 같아야 한다고 지적하지 않았어요. 내게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컨택트>를 두고 ‘뮤지컬이다, 아니다’로 논란을 벌였습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의견들을 보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뮤지컬은 음악, 춤, 이야기로 이루어지죠. <컨택트>는 춤으로 스토리를 전달해요. <레 미제라블>은 춤이 없지만 그래도 뮤지컬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에인트 미스비헤이빙(Ain’t Misbehavin’)>은 대본이 없지만 그래도 뮤지컬이죠. <컨택트>는 춤으로 스토리를 말한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컨택트>를 보고 나온 평론가나 관객들로부터 당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감동적이었다고요. 당장이라도 나가서 누군가에게 춤을 청하고 싶다고!
당신은 극 속에 등장하는 소품에서 춤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요.
소품들은 극 중 캐릭터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노래하고 춤출 때 뭔가 그 존재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손에 들고 있으면 더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요.
마이클 와일리가 쇼핑백에 넣어온 트로피를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는 장면을 보면서 당신의 토니 트로피들이 무사한가 싶었습니다. 괜찮은가요? 그동안 당신이 받은토니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물론 제 트로피들은 무사하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상은 탈 때마다 뜻밖이죠. 작품을 할 때 특별히 상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일 자체를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제일 아끼는 토니 트로피는 <크레이지 포 유>로 첫 수상을 했을 때에요. 정말 꿈같은 일이었어요.
영화 <열정의 무대>나 뉴욕시티오페라단의 <돈 지오반니>를 위해 안무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뮤지컬이 아닌 다른 장르의 작업에서 어떤 소득이 있었나요?
서로 다른 장르를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레, 영화, 오페라 모든 작업을 다 좋아해요. 하지만 그래도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은 뮤지컬이에요. 만약 당신이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서 작업을 하게 된다면 그 경험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에도 발전을 가져와요. 다른 분야에서 작업하면서 얻은 것들을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일에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안무가 출신의 연출가들이 작곡가나 극작가 출신 연출가들보다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연출가 겸 안무가들은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작품의 모든 부분을 눈에 보이도록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극 전반에 걸쳐 시각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극이 필요로 하는 모든 창조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지난 30여 년간 퍼포머, 안무가, 연출가로서 브로드웨이에서 많은 변화를 지켜보았을 텐데요. 창작자의 입장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극을 만드는 비용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제작자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뭔가 새롭고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투자하길 꺼려합니다. 리바이벌 작품들이 많아진 이유이기도 하지요. 고맙게도 전 지금 오프 브로드웨이의 비니어드 극장(The Vineyard Theater)에서 <스카츠보로 보이즈(The Scottsboro boys)>라는 작품을 리허설 하는 중이에요. 아직까지 흥행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을 초연하고 싶었어요.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대를 찾아준다는 거예요. TV, 영화, DVD 등의 홍수 속에서도요. 사실 공연계는 지금 전성기에요. 어디 라이브 공연만한 게 있을까요. 배우들은 바로 그날 그 자리에 모인 그 관객들만을 위해서 공연하는 거잖아요. 굉장히 특별한 거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예요. 영화나 TV는 쉽게 잊혀질지 몰라도 어느 특별한 밤의 공연은 쉽게 잊을 수가 없어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6호 201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