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소설가 김연수는 지난 15년 동안 세상에 열두 권의 책을 내보냈다. 최근작 『세상의 끝 여자친구』는 소설로는 열 번째 책이다. 작가가 서면 인터뷰의 답변으로 쓴 이야기 중 한 조각을 잠시 빌려 보자면, 그는 살 만하지 않은 세상을, 조금 더 좋아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을 많이 썼다. 노랫말도 쓰고, 영화에도 출연하고, 블로그도 하지만, 어쨌든 소설을 쓰는 소설가, 프로 소설가인 그가 「뉴욕제과점」의 소도시 김천역 앞 커피숍에서 쓴 답신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 백다흠
첫 질문으로 이상할지 모르지만, 성균관대 영문과 재학 시절, 영어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건너서) 들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첫 연기 경험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영문과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탄생일에 맞춰서 셰익스피어 원어연극제를 하거든요. 우리가 올린 연극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였습니다. 4학년 연출 형이 아무래도 조명발을 받는 얼굴이라고 해서 대사가 많은 역할을 맡았는데, 경상도 출신이라 영어 발음이 잘 되지 않아서 결국 한 줄만 남고 대사가 모두 생략됐습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는 무대장치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작품 속에서 고향이 아닌 곳에 머물거나 들른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행할 권리」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내기도 하셨고요. 여행객, 이방인,이주민들의 무엇에 흥미가 있으세요?
문학이라는 게 언제나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는 일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자의 시선으로 내부를 바라보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에 여행객들을 많이 보면서 그들을 동경했던 일들도 제게는 인상적으로 남아 있고요. 늘 새로운 것에 끌리는 기질도 한몫하고요.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낯선 자들을 환대해야만 한다는, 어떤 당위 같은 걸 낳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쓴 소설들을 모은 단편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작품에는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사람들의 대화가 거의 대부분 등장합니다. 어떤 테마를 쥐고 계셨던 것인가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입니까?
아마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요? 다만 그 기간에 저는 매년 외국에서, 그 나라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외국인으로 거주했지요. 외국에서 거주할 때, 저는 종종 초등학생처럼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게 말하다보면 제 생각 자체도 초등학생처럼 되는 걸 경험했습니다. 소통과 관련한 외국인들의 곤란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저런 일들이 소설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만약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면, 지금과는 형식이나 형태가 다른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소설의 언어에는 개별적인 국가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 적합한 언어 형식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번역 작업을 할 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랄까, 조건이 있습니까? 작품을 쓸 때와 다른 번역 작업만의 기쁨과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선,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번역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고요. 일반적이죠. 번역의 기쁨은 반복적인 일의 즐거움, 밥벌이하는 일의 즐거움이죠. 어렵다면, 매일 규칙적으로 일해야만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여러 일들이 끼어들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맛보는 게 정말 힘들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설 번역이란 실패하는 일에 도전하는 일이고, 결국 그 실패를 다시 맛보는 일인데, 가끔은 이런 일들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에는 용산 참사, 5월 31일과 6월 10일의 촛불집회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언급됩니다. 1년 남짓한 시간적 거리 밖에 확보되지 않은 사건을 소설에 등장시키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셨습니까?
그 구체적인 일들을 구체적으로 쓴 게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심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배경으로 썼기 때문에 시간적 거리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모호한 배경이거든요.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건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가고 난 뒤에야 알게 되겠죠.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은 첫 소설의 수상소감에 뉴 트롤스와 <개 같은 내 인생>, <천국보다 낯선>을 공유하는 ‘나의 세대’에 작품을 바친다고 밝히셨습니다. 지금 현재의 ‘나의 세대’를 말한다면 다르게 말씀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세계관이 ‘나’라는 것으로 협소해진 세대들은 존재할 것 같습니다. 공동체라면 (아마도) 문화적 취향의 공동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이죠. 감성으로 연대한다거나. 지금 제가 생각하는 ‘나의 세대’란 그런 세대에 가까워요. 그렇게 치자면 첫 소설의 소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죠.
국내 문학계에 존재하는 굵직한 상은 모두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영예가 작업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외부에서 주는 상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상으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상을 받게 되면, 자신의 글쓰기를 신뢰하게 되죠. 그래서 자신만의 속도대로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계속 글을 쓰다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문학상 덕분에 그 시기를 좀 앞당길 수 있는 것이죠. 제게 뭔가 상을 준다면, ‘혼자서도 잘 놀아서 다행 상’을 주고 싶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청춘 이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궁금합니다. 「스무 살」과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에 이어 불혹의 나이에 대해서 쓴다면 어떤 소설이 될까요? ⓒ 백다흠
글쎄요. 그건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이제 불혹인데, 스물이나 서른에 그랬듯이 저는 이 나이가 제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은 모르겠어요. 십 년 뒤에 다시 답변해드릴게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는 인간이 주인공인 소설을 구상해본 적이 있으세요?
구상해본 적은 있지만, 쓸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결국 그 어떤 등장인물이라도 이해하게 되고 연민하게 됩니다.
팝음악 전문지의 기자로 일한 경력도 있고, 문샤이너스의 노랫말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작가후기에는 글을 쓰는 데 영향을 준 곡들을 소개하셨고요. 음악을 듣는 것과 소설을 쓰는 일, 세상을 사는 일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습니까?
음악에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어떤 감정이 포함된 구체적인 장면들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보통 소설을 쓰기 전에 저는 수많은 음악들을 들어보면서 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과 가장 흡사한 감정 상태를 들려주는 곡들을 찾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일했습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이 세상을 꽤 좋아합니다.
오랫동안 블로그를 운영하고 온-오프라인 상으로 독자들을 만나는, 한국에서 독자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작가 중 한 사람이신데요. 그 만남들이 때로 버겁게 느껴지지는 않으세요?
온라인에서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일은 제 성격상 어울리는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진 사람들끼리 다정하게 얘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저는 물리적인 거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다정해지지 않는, 뭐 그런 속성을 지니고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오프라인에서는 되도록 공식적으로만 만나려고 노력하지요.
지난 2년간 한국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소설에 대해,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전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습니까?
아니오. 저는 소설이나 소설가라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항상 애씁니다. 지난 2년간의 일들이 제게 영향을 끼친 건 이렇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이란 나라가 그다지 살 만한 나라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좀더 밝은 소설을 쓰고 싶다.’ 말하자면, 좀 웃긴 소설들을 쓰고 싶습니다.
동서고금의 소설가 중에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러운 사람이 있으세요?
헤밍웨이입니다. 권총 자살만 아니라면, 그의 말년을 저는 너무나 사랑합니다.
민생단 사건이나 이상처럼 소설로 되살리고 싶은 사람이나 사건이 더 있으세요?
아니오. 이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서.
삶에서 견뎌야 하는 것들을 감당하는 데 소설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세요?
소설을 쓰는 일은 제게 직업이에요. 돈을 벌 수 있죠. 하지만 소설을 읽는 일은 절대로 직업이 될 수 없어요. 한때, 그런 직업을 꿈꾸기도 했지만 말이죠. 소설을 읽는 일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일이에요. 사람을 무기력하게도 만들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보냈는지 증명해주는 몇 가지 일들 중 하나에요. 스무 살에 어떤 소설을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무슨 소설을 읽었는지 기억할 수는 있지요. 그런 소설이 기억나면 그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왜 소설 따위를, 그것도 고전이랄 수 있는 소설들을 읽어야만 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성균관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로 등단
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작가세계문학상 수상
2001년 『굳바이, 이상』 동서문학상 수상
2003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동인문학상 수상
2005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대산문학상 수상
2007년 「달로 간 코미디언」 황순원문학상 수상
2009년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이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7번국도』, 『사랑이라니, 선영아』
소설집 『세상의 끝 여자친구』, 『스무 살』
산문집 『여행할 권리』, 『청춘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