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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3] 이 사람을 보라 - 블라디미르 말라코프

글 |김영주 사진 |김호근 통역 | 장진희 2009-11-02 5,603

 

무대 위의 사람들이 정말로 피 흘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을 기억하는지. 예술은 삶을 반영하지
만 그곳은 거울 속 세상이라 아무도 정말로 다치거나 죽어가지 않는다는것을 이제 우리 모두가 지나치게 잘 안다.
그러니 고통 받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장렬한 은유였던 에이프만의 발레에서 제 영혼이 흘리는 피를 본 남자의 비
명이, 차이코프스키라는 사람의 진짜 흐느낌이 들려올 때 관객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세상에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댄서가 단 한 사람 있다면,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말라코프다. 국립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 시
연회가 끝난후, 그저 좋은 무용수라거나 탁월한 발레리노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를 분장실에서 만났다.



 

오늘 공연을 보고 나서 당신의 이반 카라마조프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나도 매우 마음에 들고 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하지만 에이프만이 제의한 적이 없어서… 만약 그가 나를 위해 작업을 해준다면 춤춰보고 싶다.


에이프만의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보았을 때는 어땠나?
처음에는 몇 장면만 보았고 그 후에 전막을 다 보았다. 에이프만의 안무를 해보고 싶어서 그를 베를린으로 초청했는데 그가 나를 위해 <차이코프스키>의 안무를 약간 손보고 역할을 줘서 베를린에서 공연을 했고, 이번에 한국에서 하게 되었다.

독일 관객들이 바그너만큼 차이코프스키도 좋아하던가? (말라코프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베를린 슈타츠 발레단의 레퍼토리 중에 <니벨룽겐의 반지>가 있다.)
본질적인 면이 같은 작품들이다. 서사성이 강한 발레이고 사랑, 비극, 죽음, 삶이 담겨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매우 유명한 작곡가들의 강렬한 음악을 사용하고 있어서 관객들은 안무뿐만 아니라 그 음악에도 몰입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는데 다행히 관객들이 매우 좋아했고 나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당신이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면서는 당신이 음악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알았다. (한국어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떤 댄서들은 왜 음악에 맞춰서 춤춰도 그저 우아한 체조선수 같을까?
아니, 전혀 다른 의미다. 음악은 반드시 몸을 통해 흘러나와야 한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춰서는 안 된다. 발레는 음악에 맞춰 하는 동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음악을 느끼는 것이다.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을 만 번씩은 추었을 텐데 그래도 매번 새롭게 감정을 되살릴 수 있는가?
다시 무대에 서면 내게는 모든 게 다 새롭다. 100년이 넘게 비슷한 발레 작품이 상연되지만 사람들이 계속 찾는 것처럼, 내게는 그것들이 예전에 했던 일이 아니라 공연할 때마다 새로운 일이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면 춤을 추기는 힘들 것이다.


일류 댄서에게 자기만의 캐릭터 해석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작품의 설정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당신의 시도는 놀랍다. 가령 <지젤>의 2막을 알브레히트의 꿈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많은 발레리나들과 <지젤>을 춤췄지만 나는 발레리노로서 내 역할에 집중해서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2막에서 지젤은 알브레히트에게는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며 그의 환영이거나 상상이다. 지젤은 1막에서 죽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사랑만이 남아서 알브레히트를 구원하고자 한다. 알브레히트는 이것을 볼 수 없고 그저 어슴푸레하게 느낄 뿐이다.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무덤을 찾아갈 때 그는 이미 꿈속에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그녀의 사랑을 느끼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런 아련한 정조가 우리가 꿈에서 경험하는 것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처럼 어두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통증을 느끼게 된다. 춤을 추는 당신도 그런 육체적인 아픔을 느끼는지?
당연히 나도 모든 곳이 아프다. (몸 곳곳을 손으로 짚으며)여기, 여기, 그리고 이곳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물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도 죽는 것이고, 그가 괴로우면 나도 괴롭다. 인물의 모든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은 무대 위에서 흡사 메소드 연기자 같다.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매우 양식적인 장르인 발레의 기술적인 요소들이 몰입을 방

해하지 않는지?
기술적인 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술은 안무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뿐이다. 거기에 극적 표현을 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경험, 체험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컴퓨터나 로봇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무엇을 먹었는지,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최대한 반영되어야 한다. 물론 작품에 따라 몰입도나 접근방식이 달라지기는 한다. 또 같은 작품이라도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그건 매순간 뭔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가, 관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파트너가 어떻게 춤추고 있는가, 이런 모든 상황들이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 순간, 그 장소, 그때의 현장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모든 것들에 마음을 열고 표현해내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먼 한국까지 올 만큼 <차이코프스키>라는 작품에서 좋아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 모든 게 다 마음에 든다. 무언가 하나를 고를 수는 없다. 이 작품은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점층적으로 전개되다가 한순간 나를 해일처럼 덮쳐오고 불꽃처럼 타오른다. 가끔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나,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지만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카드게임 장면에서 당신이 테이블 위에 섰을 때 우리도 당신과 같은 것을 경험했던 것 같다.
엑스터시와 오르가즘이 느껴지지. 그 장면에서는 나 자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완전히 역에 몰두하고 헌신하고 극에 복종하게 된다. 감정이 가장 고양되는 장면이고 그 부분에서는 무용수와 관객이 모두 똑같다. 아마 세계의 모든 관객들이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베를린에서 얼마 전에 공연한 <카라바조> 역시 차이코프스키처럼 어둡고 고통 받는 삶을 살았던 예술가에 대한 작품인데, 특별히 이런 역할을 좋아하는지? 이런 식의…
로맨틱한 역할들? 좋아한다. 하지만 에이프만과 달리 비곤체티는 카라바조의 생애가 아니라 그의 그림들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그림의 구도가 안무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카라바조> 역시 드라마틱한 발레이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카라바조의 모습이 있다. 이런 것들은 에이프만의 <차이코프스키>와 유사한 점이다. 


콜럼 매칸의 『댄서』라는 소설을 아는지? 『댄서』에서 에릭 브룬이 공연이 끝난 후에 분장실에 혼자 앉아서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당신 생각이 났다.
그 책을 읽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많이 있다. 오랫동안 어둡거나 어려운 역할들을 해왔는데, 공연 중에는 아드레날린이 최고조로 치솟고 매우 고양되어 있다가 공연이 끝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그 간극에 적응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을 오래 해서 익숙해졌다. 막이 내리고 30분 정도가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여전히 공연이 끝나면 무언가를 먹는 일조차 힘들기는 하다. 그저 음료수나 조금 마시고 쉴 뿐이다. 대체로 공연은 저녁 8시에 시작해서 10시가 넘어야 끝나고 이런 저런 일들을 끝내고 집에 가면 12시가 거의 다 되니까 회복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한다는 게 힘들다. 하지만 이게 무용수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선택한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많은 이들이 말라코프는 발레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스스로 그런 확신을 갖고 있나?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어머니는 내가 발레리노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어머니의 오랜 꿈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발레를 했고 모스크바의 발레 학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발레를 하게 되었지만 만약 어머니의 의지가 없었거나 내가 하고 싶지 않았다면 삶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냥 시골에서 동물들을 기르면서 살았을 것 같다. 수의사가 되어 동물들을 보살피는 일도 좋았을 거다. 꽃을 키우고 나무를 심는 것도 좋아한다. 물론 발레를 하는 게 지금은 가장 좋지만 집에서는 개들을 키우고 발코니에서 화초를 기른다. 개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사람들은 당신의 삶에 오직 춤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외의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다. 강가나 들을 산책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사야할 것이 있을 때는 쇼핑도 즐긴다. 내 인생에는 다른 많은 일들이 있다. 대체로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를 좋아한다. 휴식이 필요할 때 언제나 쉴 준비가 되어있다.


배우, 시인, 화가, 음악가 중에 누가 가장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모두 다. 왜냐하면, 우선 시인처럼 서정적인 감성을 표현하고, 음악가처럼 몸으로 음악을 이끌어내고, 배우는 당연하고. 또 누가 있었지? 화가? 화가처럼 장면의 스타일을 보여주니까.


확실히 <차이코프스키>의 몇 장면은 미술 속의 예수를 연상하게 했다.
그렇다. 그런 부분들이 있다. 예수의 죽음과 무덤을 연상케 하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신의 구원과 이상을 갈구한다. <카라바조>에도 역시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음악이나 시와 같은 다양한 작품에서도 이런 모티프가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부분들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을 바라보고 통찰하면서 짐작하게 되는 것들이다.


차이코프스키처럼 결코 밝힐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는 것과 관객들에게 모든 비밀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중 어느 쪽이 예술가에게 더 도움이 될까?
두 번째 가정은 아마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비밀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관객과 소통한다는 것은 상호작용이다. 내가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관객들도 무엇인가를 내게 보여주어야 한다. 서로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대 위에서 마음을 열고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활짝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때 관객도 기꺼이 내게 그들의 감정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그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차를 타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그런 것들은 작품을 표현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내가 모든 비밀을 드러낸다면 관객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워할 것이고, 그게 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1986년에 모스크바 클래식 발레단에 입단한 후로 세계 무용계의 중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를 겪었다. 시대별로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나 작품, 사람이 있다면?
긴 이야기가 될 텐데. 내가 모스크바를 떠난 것, 해외에서 일을 시작한 것, 수많은 안무가들의 작품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세계적인 무용수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었던 것 - 이를테면 마르시아 하이데의 마지막 파트너가 나였다. 다양한 나라의 여러 발레단과 함께 일을 했고 그런 것들이 모두 내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내 인생에는 정말로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중에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꼽는 것은 이제는 정말 힘든 일이다.  

어린 시절 당신이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지?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몇 달러를 벌기 위해 애썼다. 노동의 가치라든가 사람들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시절에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되면서부터는 이런 것이 내 삶이 될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 같다.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계속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매우 빨리 변하고 있는데 무용이 변화하는 속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변화하는 것이 있겠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내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았고, 베를린에서 일하고, 오스트리아 국적을 갖고 있고, 그리고 미국 영주권도 있다. (일동 웃음)

그리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조건을 모두 가지고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나?
이런, 말할 수 없다. 하나만 고르고 싶지 않다. 여기 저기, 이곳 저곳 모두. 모든 곳. 모든 시대에서 조금씩 전부. 모두 다 이야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하나만 말하기도 너무 힘들다. 이것저것 죄다 섞인 웃기고 이상한 샐러드 같은 것이다. 이탈리아도 좋을 것 같고 프랑스도 좋고… 그리고 또… 하나는 불가능하다. 미안하다.

 


무용수로서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나?
거의 없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면 싸워서 성취하는 사람이다.
실존 인물이나 유명한 작품 속 캐릭터 중 춤추고 싶은 사람을 고른다면?
너무 많다. 모두 다. 말하지 않고 그냥 내 소망으로 남겨두겠다. 만약 구체적인 계획이 잡히고 일이 성사될 것이 확실해진다면 그때 이야기하겠다. 힌트도 안 된다. 나는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이다. 소원을 입 밖으로 발설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비밀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비밀은 당연히 있다. 사실 나는 대체로 비밀이 없고 많은 것을 노출하는 편이지만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을 말하면 안 되는지는 확실히 구분한다.


어쨌든 내 소원은 이반 카라마조프다.(일동 웃음)
이반 카라마조프? 그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


가장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에 발표된 것 중 무용을 제외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나. 소설이나 음악, 영화 같은 것들 말이다.
역시 말할 수 없다. 이해해 달라. 나는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하나를 골라서 그것에만 열중하기 보다는 수많은 것들에 관심을 쏟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 가지, 혹은 열 가지라도 말한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의 몸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된 장르로서, 오직 발레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음악이나 그림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것.
글쎄,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춤을 춤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언가라… ‘순수성’. 발레, 특히 클래식 발레는 단순한 춤과는 전혀 다르다. 그저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발레는 훨씬 어렵지. 그것은 무언

가를 사용하지 않고, 또 무언가로부터 반영되지 않은 채 오직 인간의 몸이 지닌 순수함으로 이상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배재하여) 순수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순수다.

 

 

그건 굉장히 아름답지만 무서운 이야기라고 말하자 말라코프는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지난 세기를 풍미한 전설적인 무용수들과 깊이 교류했던 발레 미스트리스 엘레나 체르니초바는 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말라코프를 이렇게 설명했다. ‘에릭 브룬과 같은 고귀함, 누레예프를 연상시키는 정열, 마카로바의 무대에서 볼 수 있었던 감정적인 깊이와 바리시니코프가 갖지 못했던 완벽한 신체.’ 여섯 요정이 갓 태어난 오로라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을 이에 비할 수 있을까마는, 그 모든 빛나는 것들도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자신의 전부를 꽃피울 수 있는 발레리노의 숙명 앞에서는 허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말라코프는 시간이 빼앗거나 망칠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는 예언을 당연히 믿는다며 첨언했다. “그 명제는 언제나 유효하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어떻게 감화시키는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발레만이 아니라 음악도 시도 모두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문장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 않나.” 일본을 아흔 번 넘게 방문하는 동안 좀체 인연이 닿지 않았던 서울의 첫 무대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것 하나를 더한 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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