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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INTERVIEW] <아비, 방연> 한아름 작가·서재형 연출가 [No.146]

글 |송준호 사진 |김수홍 2015-12-09 5,328

역사의 파도에 스러진 한 소시민의 비극


공연계의 대표적인 콤비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가가 국립창극단 신작 <아비, 방연>으로 돌아온다.  그리스 비극과 창극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던 <메디아>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새로운 창극의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이들은 이번 작품에서도 ‘왕방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또 한 번의 실험에 나섰다.  왕방연은 자신이 섬겼던 주군 단종의 귀양길을 호송하고 사약까지 바쳤던 금부도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과연 한아름과 서재형은 이 짧은 기록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왕방연’이라는 신하 혹은 아비


                  
 
두 번째 창극 작업인 만큼 <메디아> 때보다는 진행이 수월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한아름
  한다고 해서 노하우가 쌓이진 않더라고요. 매번 힘들어요. 특히 <메디아>는 대본을 다 바꾸긴 했어도 원형 캐릭터는 있었잖아요. 이건 아예 창작을 한 거라서 고생이 많았죠.

서재형  더구나 이제는 안 해야 되는 걸 알게 돼서 더 어려워요. 뭐가 선인지 모르고 할 때가 작품이나 인간관계에서 수월했어요. 이 작업에 대한 정보가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뮤지컬은 작업할 때마다 사람만 바뀌고 작품은 같아서 정해진 과정을 따르면 되는데, 창극 작업은 우리가 창극단에 와서 조직과 만나 맞춰가야 한다는 차이가 있죠. 어디까지 창극이라고 해야 될까 하는 고민도 있어서 자체 검열을 하기도 하고요.
 
<메디아>가 그리스 비극과 창극 사이의 어떤 것이었다면, <아비, 방연>은 우리가 익숙한 창극에 가까워 보여요. 두 작업을 하는 동안 창극의 정의에 대해 생각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한아름  창극의 기본적인 요소가 물론 있죠. 하지만 창극에 대한 고정관념은 <메디아> 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창극이라고 해서 더 특별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결국은 공연물이고 감동을 주는 게 목표죠. 관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가 빛날 수 있게 거기에 우리의 소리를 기술적으로 잘 담아내야겠죠.
서재형  저번 작업과 생각은 거의 같지만 달라진 점은 여기는 ‘창극’단이지, ‘극창’단이 아니라는 거예요. 창을 하기 위해서 극을 하는 거지, 극을 하려고 창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이번 작품이 정통 창극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공연 감각과 정통 창극의 감각을 조율하면서 새로운 감각의 공연을 만들고 있어요.


특히 이번에는 역사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왕방연’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셨죠.
한아름  ‘방연’이라고 하니까 요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때문인지 이성계 집안 여섯째 아들 이야기냐는 분들도 있었어요. (웃음) 이 시기가 제가 좋아하는 시대인데, 『단종실록』을 보면 단종이 목매 죽은 걸로 나와요. 『세조실록』에는 언급이 안 됐다가 『숙종실록』에 가면 왕방연이 사약을 갖다줬다고 해요. 야사에는 왕방연이 사약을 주었는데 단종이 주저하자 옆에 있는 노비가 공을 세우려고 목에 활줄을 걸어 단종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단종의 죽음을 여러 각도로 보다가 왕방연이라는 캐릭터에 호기심이 생겼죠.
서재형  연출가 입장에서는 생몰(生沒) 미상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상상을 즐기기에 충분한 점이죠. 한명회나 봉석주 같은 권력자들은 오래 살고, 바르고 정직했던 이들은 단명하며, 중간의 애매한 이들은 생몰 미상인 것에서 이미 어떤 이야기의 틀이 보였던 것 같아요.


구체적인 이야기를 위해서는 그 호기심에서 드라마를 뽑아내야 할 텐데요.
한아름  역사책을 보면 재미있는 게 권력의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기록이 적어진다는 거예요. 왕방연의 기록도 의문스러운 데가 있었어요. 그가 단종의 귀양지를 다녀오면서 지은 시가 굉장히 절절한데, 그가 세조의 수하라면 납득이 안 되는 점이거든요. 그렇다고 단종에 대한 충심이 있는 자가 왜 주군의 귀양지 호송 업무를 맡고 사약을 갖다 주는 일을 자처했을까? 그에 대해 기술된 건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죠. 



‘아비, 방연’이라는 제목은 그 사연의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합니다.
한아름  역사 속 사육신에 대한 묘사를 보면 하나같이 비장하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잖아요. 그런데 당시에 그런 사람만 있었을까요? 난세의 영웅이 있으면 자식을 위해 신념을 꺾는 소시민도 있었을 거예요. 작은 이유일지언정 그런 모습이 폄하될 건 아니죠. 그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고 삶의 지향점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 사람이 사육신 시대에 살며 고통스러워했던 과정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한명회와 봉석주의 간계로 딸이 곤경에 처하면서 신하에서 아비로 국면이 전환되더군요.
한아름  딸이 단종 복귀 모의에 연루된 이와 연을 맺으면서 노비 신분으로 몰락하게 되니까 어떻게든 구해야 하잖아요. 말이 노비지 밤에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게 되니까요. 아버지로서는 초야도 안 치른 어린 딸이 겪을 일을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죠.
서재형  딸의 안전을 위해 조혼을 시키다 곤경에 처한 거니까 더 그렇겠죠. 지금 딸 역 배우도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그 설정은 연출가 입장에서 살려야겠더라고요. 어설프게 20대 배우를 어리게 보이려고 할 게 아니라 관객이 그 심정에 공감할 만한 상황을 위해서요.


결국 군신유의와 부자유친 사이의 갈등 같아요. 극 중에서도 부모의 도리가 신하의 도리를 넘어선다는 대사가 있는데, 그걸 저버리는 데서 오는 비극 같아요.
한아름  역사에서는 그래도 주군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죠. 저도 애를 낳기 전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식 앞에서는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돼요.
서재형  지금 부모의 모습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그가 나쁜 것이냐고 관객에게 묻고 싶은 거죠. 게다가 그의 선택은 딸에 대한 부성애가 51%, 단종에 대한 충심이 49%로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미세하게 앞섰던 정도예요. 이게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홀대받아야 하는 정서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아요.


두 분도 얼마 전에 ‘아비, 재형’과 ‘어미, 아름’이 됐는데, 만약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타협하지 않고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서재형  저흰 연극, 뮤지컬, 음악극, 무용, 오페라, 창극 등등 전방위로 활동했잖아요. 그건 예전에 선생님들에게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걸 통틀어 연극이라고 배워서예요. 그걸 신념으로 지키면서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더 나은 가능성을 전해 주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거기에는 타협이 없죠. 그런데 ‘아비, 재형’이 되고 보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던데요. (웃음) 아직까지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은 제게 어려운 과제예요.
한아름  연출님은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대본을 보거든요. 아침에는 이래저래 할 일도 많은데, 방에서 공부를 한다고 안 나오세요. 물론 아기가 보고 싶지만 연출가로서 그날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일단 보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다는 거죠. 그럴 때 저는 화가 나죠. 저는 일을 빨리 끝내고 애랑 같이 있고 싶어서 타협하게 되더라고요.




창작 초연이라는 고충과 즐거움



‘왕방연’이라는 인물이 작품 전면에 나서는 건 <아비, 방연>이 처음 같은데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듯해요.
한아름  창작극이라 어쩔 수 없이 같은 대본을 보고도 느끼는 게 다 달라요. 슬픔을 느끼는 대목이나 눈물이 나오는 지점들이 특히 그래요. 작가 입장에서는 그걸 하나의 감정선으로 모으는 게 좋은 건지 내버려두는 게 맞는 건지 판단하는 게 늘 어려워요.


반면 단종이나 한명회, 세조 같은 인물들은 기존의 이미지가 있어서 다르겠지요.
한아름  세조도 영화 <관상>에서 너무 나쁘게 그려져서인지 리딩 때 배우가 딱 그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물론 세조가 야망가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20% 정도는 다른 성격이 있거든요. 배우에게 그 20%를 설명하는 게 참 어려워요. 완벽한 선인과 악인이 어딨겠어요. 그 미묘한 지점을 잘 설명해서 배우가 잘 표현하도록 안내하는 작업이 중요해요. 연출님이 배우들에게 계속 리딩을 시키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반복해서 읽다 보면 따로 논리를 넣거나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작품이 단단해지거든요.


<메디아>는 코러스가 부각됐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어떤 음악적인 특색이 있나요?
서재형  각종 피리 연주가 권병호 씨가 공연에 참여하는데, 그분의 개성이 한국적 정서와 맞는 데가 있거든요. 그걸 어떻게 감각적으로 옮기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아요. 소리가 아닌 작창으로 참여하는 박애리 씨와 현대음악 작곡가 황호준 씨까지 세 분에게 주문한 건, 창극처럼 보이되 감각적으로는 다른 느낌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이분들이 지닌 독특한 감각이 전통 안에서 어떻게 현대화되느냐에 따라 음악적 색깔이 결정될 거예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서재형  방연의 선택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죠. 방연은 주군과 딸에 대한 정이 다 있는데, 그게 딸에 ‘약간’ 쏠리면서 결과적으로 이런 비극이 초래된 거거든요.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게 그의 선택은 70대 30 정도로 명쾌한 게 아니라 51대 49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라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단종 앞에서 그렇게 슬피 우는 거죠. 반대로 딸을 만나는 장면은 슬퍼도 최대한 참으라고 주문하는데, 주군과 딸에 대한 감정이 같으면 부정(父情)을 선택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 51대 49의 미세한 감정의 균형이 잘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두 분은 늘 장르의 전형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이번에도 그런 시도가 있는지?
서재형  있긴 한데 잘될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일부 관객밖에 안 보는 특정한 장르의 공연이 아니라 훨씬 폭넓은 관객층이 볼만한 공연을 만들려 하고 있어요. 그런 작업을 미약하나마 <메디아> 때도 했고, 지금은 배우들에게 대놓고 말하면서 하고 있어요. 그런 시도의 결과 “창극 배우들인데 연기 잘하네”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창극 배우인데 소리 잘하네’는 당연하잖아요. 만약에 운이 좋아서 재공연을 하게 되면 더 다듬어서 “연극 배우들이 창을 왜 이렇게 잘해” 하는 소리까지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가 바라는 장르를 넘어서는 공연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메디아>와는 다르게 완전 창작이라는 점에서 두 분도 기대와 설렘이 있을 것 같아요.
한아름  사실 창작 창극이라는 게 흔치 않아도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늘 ‘흥부전’이나 ‘춘향전’을 비틀고 판소리 다섯 바탕의 주 레퍼토리들을 보셨다면, 이번에는 배우나 소리꾼으로서의 박애리가 아니라 작창자 박애리의 재능을 보는 즐거움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또 우리끼린 농담 삼아 <메디아>가 6대 판소리고 이 작품이 7대 판소리라고 하는데, 운이 좋아 30~40년 후 <아비, 방연>이 ‘춘향전’처럼 창극의 주 레퍼토리가 된다면 제일 좋겠죠. 이번 공연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 <아비, 방연>의 초연이니까 저희의 첫 창작 창극의 증인으로 오셔서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같이 있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좋은 파트너십의 대명사로 알려진 두 분인데, 언젠가 이런 작품을 꼭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이상적인 작품이 있으세요?
한아름  일단 다음 작품이 늘 더 나은 작품이기를 바라고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작품이 인생의 가장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국 공연 예술의 모든 걸 집약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우리가 오페라, 창극, 무용, 뮤지컬, 연극까지 가리지 않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언젠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커다란 프로젝트를 하게 됐을 때를 대비하는 거예요. 가령 올림픽 주경기장 같은 곳에서요. 그만 한 작품을 하려면 한 장르만 아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춰서 무대를 채울 예술가나 스태프와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 총연출이 서재형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연출님은 지금도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공부를 하세요. 언젠가 최고의 안무가들과 디자이너, 성악가, 소리꾼, 배우 다 모인 자리에서 첫 리딩을 하는 날을 꿈꾸면서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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