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을 겪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은 다 다르다. 그 차이로부터 종종 여러 개의 ‘진실’이 발생하곤 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를 흥미롭게 풀어낸 것이 근대 일본 문학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과 이를 원작으로 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 영화다.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각으로 과거를 복기하는 이 ‘라쇼몽 기법’은 지금도 다양한 장르에서 계속해서 변주되고 있다.
‘같은 사건, 다른 진실’의 매력적인 구도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1951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 부문 수상까지 안겨주며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쓴 동명의 소설집 중 두 개의 단편 「덤불 속(藪の中)」과 「라쇼몽」을 결합해 각색한 것이다. 배경이 되는 건축물 라쇼몽과 영화 제목 등은 「라쇼몽」에서 가져왔지만, 전체 구성은 「덤불 속」을 따르고 있다. 내용은 부부가 산적을 만나 아내는 겁탈당하고 남편은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편을 죽인 사람과 그 이유다. 범인을 가리는 야외 법정에서 도적은 자신이 정당한 결투로 죽였다고 진술하고, 아내는 겁탈당한 자신을 경멸하는 남편과 다툼 끝에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반면 무당의 몸을 빌려 강신한 남편의 영혼은 아내가 배신해 그 치욕으로 자결했다고 진술하고, 이들을 지켜봤던 나무꾼은 아내가 두 남자를 부추겨 결투를 벌인 끝에 산적이 이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진술을 들어도 명확한 범인과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이때 진실을 알기 위해 영화는 각자의 시각으로 당시 사건을 회상하는 ‘플래시백(Flashback)’을 사용한다. 바로 이러한 구성이 주관적 관점에 따라 한 가지 사실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라쇼몽 기법’이다. 이 기법의 핵심은 각 인물들이 동일한 사건을 경험해도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그 발언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진술자들의 다른 주장에서 비롯되는 진실에 대한 의문은 이야기 자체를 흥미진진하게 하기 때문에, 이 기법은 영화, 연극 등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곤 한다.
7년 만에 다시 공연되는 뮤지컬 <씨 왓 아이 워너 씨>도 그런 작품이다. 「덤불 속」 외에도 「용」과 「케사와 모리토」까지 아쿠타가와의 원작을 폭넓게 차용하고 있는 이 작품은 1막 ‘ㄹ쇼몽’과 그 앞뒤를 메우는 막간극 ‘케사와 모리토’에서 라쇼몽 기법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영화 <라쇼몽>처럼 살인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배경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로 옮겨왔다.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에게 반한 택시 기사 지미는 원작처럼 그녀를 겁탈하고, 남편은 살해된다. 목격자인 나무꾼 역할을 하는 극장 경비원은 여기서도 어딘가 미심쩍은 인물이다. 1막과 2막에 앞서 상반되는 내용을 보여주는 막간극의 케사와 모리토 커플 역시 의혹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통해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작품의 주제를 환기한다.
미국식 영웅주의의 도구 <커리지 언더 파이어>
걸프전을 다룬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라쇼몽 기법을 차용하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영화의 초점은 걸프전에서 전사한 공군 대위 캐런의 평가에 맞춰져 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최고 무공 훈장 후보에 오르는 캐런이지만, 부대원 중 일부는 그녀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다른 이는 겁쟁이라는 상반된 증언을 내놓는다. 이들이 진실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사 임무를 맡은 설링 중령은 캐런을 둘러싼 진실을 집요하게 캐는 과정을 통해 그날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 점에서 영화는 <라쇼몽>처럼 진실의 상대성을 주장하기보다 진실을 위한 용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차이를 보여준다.
8명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암살 <밴티지 포인트>
미 대통령 암살의 전후 순간을 8명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진실의 퍼즐을 맞추는 영화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반테러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 팀은 사방이 노출된 광장에서 테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대통령은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쓰러지고,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영화는 실시간 방송이라는 객관적 시각으로 시간을 거꾸로 감아 각 인물들의 주관적 시점으로 사건을 재현한다. 하지만 여러 개의 시점을 동원할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시점들이 반복되면서 긴장감은 떨어지고 만다. 여기서 각 시점의 플래시백은 진실을 알아가기 위한 드라마적 힘이 아니라, 단순한 사건을 더욱 역동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법정에서 밝혀지는 한 인물의 성장사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의 창시자인 마크 주커버그의 창업 과정을 다루는 이 영화는 유명인사의 전형적인 성공 신화를 다루기보다 주커버그라는 젊은이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윈클보스 형제는 마크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 주장하고, 페이스북 공동 설립자이자 마크의 ‘절친’인 왈도 역시 창업 과정에서 마크가 모든 것을 가로챘다고 말한다. 이처럼 하버드 천재들이 페이스북의 아이디어 소유권을 놓고 대립하며 소송을 펼치는 구성을 통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다양한 시점으로 마크 주커버그를 바라본다. <라쇼몽> 식의 ‘주커버그 보기’를 통해 과거에 친구였던 이들이 어떻게 대립하게 됐나를 되짚는 것이다. 라쇼몽 기법은 여기서도 세련된 영상과 감정이 녹아든 음악과 맞물려 어려운 법정 용어와 컴퓨터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담아낸다.
아이돌 팬클럽의 유쾌한 추리극 <키사라기 미키짱>
아이돌 키사라기 미키의 사망 1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다섯 명의 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하지만 이 중 한 명이 미키의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자 금세 격론의 장이 펼쳐진다. 거의 모든 장면이 옥탑방을 벗어나지 않아서 연극적인 색채를 띠는 이 작품은 각자의 회고를 통해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미키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추리극의 성격을 갖게 된다. 자살로 판명난 미키의 죽음을 두고 그들은 마치 탐정처럼 추리를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끝내 알 수 없는 채로 이야기는 마친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은 심오한 메시지보다는 왁자지껄하고 유쾌한 웃음을 주는 데 주력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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