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정치보다 더 복잡한 모녀 정치학
한국 관객들에게 <씨 왓 아이 워너 씨>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마이클 존 라키우사는 현재 뉴욕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는 1~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발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지녔는데, 그의 작품은 종종 미국 뮤지컬 역사의 신과 같은 존재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과 비교되곤 한다. 다양한 주제와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음악적 전개, 참신한 노랫말 등으로 손드하임에 비견할 만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퍼블릭 시어터에서 개막한 <퍼스트 도터 수트>
지난 10월 21일 뉴욕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퍼블릭 시어터에서는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신작 <퍼스트 도터 수트(First Daughter Suite; 대통령의 딸 연가)>가 올라갔다. 뉴욕의 공연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이름인 퍼블릭 시어터는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다운타운 연극계(여기서 올라가는 작품들은 대부분 실험적이고 비영리적인 성격이 강하다)의 대부 같은 존재다. 최근엔 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뉴욕의 중산층을 위한 작품을 올려 엘리트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센트럴 파크에서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셰익스피어 인 더 파크>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하기도 한다. 브로드웨이의 최신 화제작
<해밀턴>과 <펀 홈>도 퍼블릭 시어터를 거쳐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씨 왓 아이 워너 씨>나 <자이언트> 역시 지역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퍼블릭 시어터에서 뉴욕 프리미어 공연을 올렸다.
정치인 주변인의 이야기
신작 <퍼스트 도터 수트>의 전신으로 여겨질 수 있는 1993년 작 <퍼스트 레이디 수트 (First Lady Suite; 영부인 연가)> 역시 퍼블릭 시어터에 올려졌다. 이 작품은 스티븐 손드하임의 1990년 작 <어쌔신>이 반향을 일으킨 지 3년밖에 안 된 시점에 올려졌다. 정치계 주변인들을 다룬 <퍼스트 레이드 수트>의 탄생에 <어쌔신>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퍼스트 레이디 수트>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엘리너 루스벨트, 매미 아이젠하워, 베스 트루먼, 그리고 재키 케네디를 주인공으로 그들 삶의 특정한 부분에 대한 장면을 구성한다든가, 아니면 가상의 상황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그린다. 공연 당시의 리뷰를 살펴보면 아주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라키우사의 이름을 알리고 손드하임의 후계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한 세트 같은 <퍼스트 도터 수트>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대통령의 딸에 대한 얘기를 다루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백악관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야 했던 대통령의 딸들이 그들의 엄마와 맺는 특수하지만 보편적인 관계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보여준다.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로 잘 알려져 있는 선댄스 인스티튜트의 부속 기관인 선댄스 시어터 랩의 초청을 받아 2014년 매사추세츠 주의 한 도시에서 개발 과정을 거쳐 뉴욕의 퍼블릭 시어터에 입성했다.
조금 특별한 공간에서 형성되는 모녀 관계
1막 1장은 1972년 백악관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리처드 리슨의 딸 트리샤 닉슨과 그의 동생 줄리 닉슨, 비가 올지도 모르는 날의 야외 결혼식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트리샤와 그녀를 달래려는 엄마 패트리샤, 그리고 줄리가 다투는 장면을 성스루 스타일로 그려냈다. 상황이 가져다주는 긴장과 갈등을 통해 패트리샤, 트리샤, 그리고 줄리 모두 그들이 처한 대통령의 가족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와중에 무대 가장자리에 닉슨 대통령의 엄마인 한나 닉슨의 영혼이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하는 조언은 때때로 긴장을 더해준다. 결과적으로 결혼식도 잘 진행되고, 패트리샤는 한나 그리고 트리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특수한 위치를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1막 2장은 1980년, 지미 카터의 딸인 에이미 카터가 엄마 로잘린 카터, 그리고 제럴드 포드의 딸인 수전 포드와 그의 엄마 베티 포드와 함께 꿈속에서 대통령 전용 요트를 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제 막 13세에 접어든 에이미가 백악관에서 연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 우상과도 같은 수전 포드를 자신의 꿈에 초청(?)했다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했다. 가상의 설정이라는 점에서 조금 쉬운 길을 택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에이미 카터의 꿈속에서 모녀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통해 에이미와 수전이 어떤 모녀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리고 백악관에서 산다는 것이 그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앞서 1막 1장에서 들려줬던 음악과는 다르게 좀 더 템포가 빠른 스윙 느낌의 음악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언더스코어링이 많아 전체가 노래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마치 그런 듯한 느낌을 받는다.
2막 1장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의 딸인 패티 데이비스가 그의 엄마인 낸시 레이건과 1986년 낸시 레이건의 친구 별장에 있는 풀장에서 대화를 나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가족에서 멀어졌던 딸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리고 간다는 내용이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와 그와 관계없이 평범하게, 또는 반항적으로 사는 고집 센 딸과의 긴장 구도가 주된 갈등이다. 2막부터는 음악과 내용이 좀 더 균형을 이루면서 일반적인 뮤지컬과 같은 구성을 보여주는데, 레이건 모녀의 장면은 긴장과 화해, 그리고 긴장의 반복이 음악을 통해서 정확해진다.
마지막 2막 2장은 2005년, 아들 조지 W. 부시의 대선 출마를 앞두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부인인 바바라 부시가 그녀의 죽은 딸 로빈 부시와 가상의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아들 부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데, 결국 그녀의 며느리 로라 부시와 함께 정치인의 부인이자 가족으로서 그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그리며 공연이 끝난다.
불협화음 속의 화음, 화음 속의 불협화음
네 개의 장이 전혀 관련없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검은 정장 차림의 등장인물들이 무대로 올라와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내용은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혹은 딸로서 살아가면서 공통으로 겪는 경험과 애환이다. 노래는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의 불협화음이 늘어가는 구조로 진행된다. 사실 라키우사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뻔하지 않은 음악 구성과 전개, 그리고 음악과 내용의 부조화인데, 이 작품 역시 다르지는 않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비교적 건조한 내용과 대비되는 풍성한 멜로디였다. 실제로 드라마가 강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얘기이고, 그마저도 감성은 절제된 반면 음악은 마치 사랑 노래처럼 극적인 멜로디가 더 많았다. 뇌에 전달되는 인지적인 불협화음은 관객들 역시도 무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다가가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삼면이 객석으로 되어있는 돌출 무대는 챔버 뮤지컬의 느낌을 더욱 살린다. 특이한 점은 두 번째 장면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검은 투명 유리를 덮어 만든 바닥은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 관객들에게 또 한 차례의 불협화음을 만들어준다. 네 장면이 굉장히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도구의 교체로 장면을 전환하는데 바닥이 통일성을 준다. 각각의 장면은 긴 소파, 요트의 뱃머리, 풀장 옆의 긴 의자들, 그리고 바닷가 벤치의 교체로 비교적 심플하게 장면 전환이 이뤄진다. 의상 역시 첫 장면에 모두가 입는 검은색 정장을 제외하고는 당시의 시간적인 배경, 등장인물들의 문화적인 배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각적인 간결함은 음악의 풍성함과 대비되어 공연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춘다.
노련한 여배우들을 보는 재미
아홉 명의 여배우가 나오는 이 작품은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여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바바라 부시의 역할을 맡은 메리 테스타는 라키우사 작품의 단골 배우 중 한 명으로, <씨 왓 아이 워너 씨>를 비롯해 최근작 <퀸 오브 더 미스트>(나이아가라 폭포를 나무통을 타고 건넌 여자 이야기) 등에도 출연했다. 그래서일까, 모든 배우들 중에서 라키우사의 무게감 있는 유머를 가장 잘 소화했다. 특히 대통령의 부인이자 많은 비판을 받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엄마로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캐릭터를 몰입도 높게 표현했다. 메리 테스타가 작품의 마지막에서 문을 잘 닫아주는 역할을 했다면, 작품을 연 패트리샤 닉슨 역의 바바라 월시 또한 브로드웨이 베테랑답게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결혼을 돌아보며 얽히고 꼬인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아 문제를 풀어가는 복잡한 감정을 균형감 있게 잘 연기했다. 그 외에도 두 번째 장면에서 지미 카터의 어린 딸 에이미 역할을 맡은 칼리 테이머도 세 명의 어른 배우들 가운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리드를 잃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이 꽤 인상 깊었다.
재미는 없지만 흥미로운 작품
요즘 뉴욕의 많은 공연들이 그렇지만, 이 작품 역시 재미있는 공연은 아니었다. 사실 따져보면 라키우사의 작품은 재미있게 본 기억이 별로 없긴 하다. 그렇지만 라키우사의 작품은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보다는 이성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미국의 대통령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래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뉘앙스를 담은 대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국민 앞에서 진심을 담아 연기해야 하는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엄마와 딸의 얘기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어떤 부분들은 대통령의 딸이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었다. 스케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대통령도 사회 생활을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컨셉 뮤지컬처럼 기승전결 없이 에피소드 형태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라키우사의 다양한 음악적 스토리텔링과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완성도가 더해졌다. 일반적인 관객들이 보기에는 소화해 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선댄스 시어터 랩과 퍼블릭 시어터, 그리고 손드하임의 뒤를 잇는 작곡가로 여겨지는 라키우사라는 이름을 고려할 때, 작품에 다가가기 어려운 똑똑함을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퍼스트 도터 수트>가 브로드웨이행을 노리고 있지는 않겠지만, 라키우사가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를 되짚어 볼 때 빠른 시일 안에 브로드웨이에서 라키우사의 흥미로운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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