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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캐리> CARRIE: THE MUSICAL [No.142]

글 | 조연경 (런던 통신원) 사진 | Claire Bilyard 2015-08-20 5,157

호러 아닌 청춘물이 주는 소름



1974년에 출간된 스티븐 킹의 첫 소설 『캐리』는 그를 스타 작가로 발돋움하게 도와준 중요한 작품이다. 스티븐 킹은 『캐리』의 초고를 몇 쪽 쓰다가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그걸 발견한 아내의 독려로 소설을 완성한다. 자칫 사라질 뻔했던 이 소설은 출간 이후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1976년, 공포 영화로 태어났다. 그리고 2013년에는 킴벌리 피어스 감독이 이 영화를 <캐리 2013>으로 리메이크하면서 클로이 모레츠를 주연으로 삼았다. ‘캐리’라는 강렬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선명한 피의 이미지와 굵직한 이야기가 짧게 펼쳐지는 작품을 무대로 옮기려는 시도도 당연히 있었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레 미제라블> 이후 공을 들인 작품이 바로 <캐리>였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해 영화에 참여한 로렌스 D. 코헨이 뮤지컬의 대본도 맡았고, 가사는 딘 피치포드, 음악은 마이클 고어가 담당했다. <캐리>는 1988년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홈그라운드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초연한 후 곧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올려졌다. 하지만 몇 회 공연되지 못하고 엄청난 손해만 남긴 채 사라져야 했던 비운의, 혹은 함량 미달의 작품으로 남고 만다. 그리고 올해, <캐리>가 재정비된 모습으로 돌아와 런던 무대에 섰다.



호러 뮤지컬의 가능성

밝고 신 나게 춤추는 모습이 일반적인 뮤지컬이라는 장르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귀신이나 악령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을 압박하는 종류가 아니라 <캐리>처럼 인간 심리를 소재로 삼았을 경우 더욱 그렇다. 그래서 <캐리>는 ‘뭔가 끔찍한 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기저에 깔아놓은 채, 모르는 척 밝은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은근히 긴장시키는 노선을 택했다. 빨간 피로 그린 여자아이의 일러스트가 담긴 포스터에 호러 뮤지컬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긴 했지만, 그건 <캐리>가 생소했을 관객들을 스티븐 킹이 조성한 공포의 세계로 찾아오게 만든 장치일 뿐, 뮤지컬은 그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캐리>의 호러는 소름 돋는 공포가 아니라 은근히 깔고 가는 불안이다.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상황을 빚어내는 인물들, 특히 사춘기 아이들이 보여주는 악랄한 순수함이다. 상상하기도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장난이 불씨가 됐을 뿐 이 작품 속에 진정 나쁜 의도를 품고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은 없다. 철들고 나면 가볍게 추억할, 어쩌면 부끄러워하며 웃을지도 모를 우리 모두의 학창 시절이 관객의 기억을 자극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바닥에 있는 무대를 삼면으로 에워싼 객석에서 배우들을 내려다보는 관객은 무대 위 이야기를 더 친밀하게 받아들인다. 객석까지 무대로 활용하는 연출은 침묵으로 동조한 공범이라는 이름표를 관객에게 부여한다. 비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이 내쉬는 열기와 무거운 침묵은 무대에 깔린 불안을 강화한다. 그리고 누구나 경험해 온 일상적인 상황과 작품 속 초자연적인 현상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긴장과 불안은 카타르시스로 폭발한다. 붉은 피와 빨간 조명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비주얼과 시원한 무대 효과가 펼쳐지는 <캐리>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간의 불안과 긴장을 해소한다. 그렇게 관객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설 수 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작품은 공포 뮤지컬이라 해도 전혀 무섭지 않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벗겨내고 나면 우리가 흔하게 접해 온 일상의 알맹이가 남고, 우리가 봐온 평범한 인물들이 보인다. 작품 속에서 캐리가 느꼈을 불안, 좌절, 분노는 낯설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모든 것을 목격한 ‘수’의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속을 뒤집어 한 번 더 생각할 때 비로소 <캐리>는 섬뜩하게 우리의 발목을 잡아챈다.
 



평범해서 더 강렬한 청춘물

어찌 보면 뮤지컬 <캐리>는 평범한 학원물이다. <페임>이나 <베어>,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그렇듯 청소년기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갈등하고 불안해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원작 소설이 40년 전에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이 작품은 지금과 통하는 구석이 많다. 사춘기 학생들은 작은 사건도 거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공고하다고 믿어왔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때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그 혼란이 모여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이라 치부할 수 없는, 피해자는 잔뜩 있지만 가해자로 누구 하나 점찍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진다. 
청춘이 관객들의 공감을 사는 것은 아무리 극단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해도,  극 속의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이나 감정은 관객들이 지나온 청소년기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마련이다. 관객들은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사춘기를 떠올리고, 학창 시절을 추억하며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 공감이 거대한 후폭풍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작품은 사건에 밀접하게 엮여 있는 인물인 수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여학생 수는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 날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해 반복해서 취조를 받고 있다. 온몸으로 불안을 표현하는 수와 혼란스러운 조명, 캐리 화이트를 주범으로 지목하는 앙상블이 이뤄내는 하모니는 호러 뮤지컬의 도입부로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캐리는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얌전하고 조용한 여학생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모두의 미움을 받고, 매일 야유와 따돌림에 시달리며 비웃음을 당한다. 그러던 어느 체육 시간, 수업이 끝난 후 여학생들이 재잘대던 샤워장에서 사소하지만 모든 비극의 씨앗이 될 사건이 벌어진다. 샤워를 하던 캐리가 첫 월경을 경험하고 영문을 모른 채 피범벅이 되어 도와달라고 울부짖지만, 다른 학생들은 캐리를 비웃으며 생리대를 던지고 조롱한다. 겁에 질린 캐리 때문에 샤워장 전등이 폭발하고, 아이들이 놀라 잠잠해진 사이 체육 선생님의 중재로 사건은 일단락된다. 캐리의 엄마는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 있어서, 월경이 어떤 건지 왜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는 캐리의 항의를 무시한 채 피의 죄를 씻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며 그녀를 학대하고 기도실에 가둔다. 캐리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신에게 염력으로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체육 선생님은 그날 이후 캐리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독특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쓰게 된다. 다음 날, 선생님은 캐리를 괴롭힌 여학생들을 모아 놓고 어제의 일을 나무라며 단체 기합을 주고 캐리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졸업 무도회에 가지 못할 줄 알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에 반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생인 크리스는 체육 선생님에게 반발하고 사과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캐리를 증오하게 된다. 반면 수는 체육 선생님의 훈계를 듣기 전부터, 반 아이들과 단체로 캐리를 괴롭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크리스와도 멀어지게 된다. 수는 속죄의 의미로 자신의 완벽한 남자 친구인 토미에게 캐리를 졸업 무도회에 파트너로 데려가 추억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수의 간곡한 부탁에 토미는 마지못해 캐리를 초대하고, 캐리는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이를 수락한다. 한편 크리스는 남자 친구인 빌리와 함께 무도회장에서 캐리를 골탕 먹일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다가온 무도회 날, 캐리는 그동안 연마해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염력으로 엄마의 반대를 잠재우고 토미와 함께 집을 나선다. 난생 처음 화장을 하고 직접 만든 드레스를 입은 캐리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고, 토미와 춤을 추며 평범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무도회의 왕과 여왕으로 선정된 토미와 캐리가 단상에 서서 다른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크리스가 미리 준비한 돼지 피가 캐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붉은 피를 뒤집어써서 놀란 캐리를 보고 아이들은 전부 웃음을 터뜨리며 캐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엄마가 말한 대로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아이들을 보며 캐리의 분노가 폭발한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염력을 휘두르는 캐리의 힘에 무도회장은 화재에 휩싸이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희생된다. 무도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캐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의 애정을 갈구한다. 하지만 캐리를 마녀라고 생각하는 엄마는 식칼을 들고 그녀를 맞이하고, 엄마의 칼에 찔린 캐리는 엄마마저 죽인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폭발시킨 캐리는 자신의 핏자국을 따라온 수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모든 사건의 목격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이며, 캐리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최대 피해자인 수는 혼자 남겨진 공포에 떨며 캐리를 추억한다.
 



헤로인의 힘

캐리는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 있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비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선 전교생의 놀림감이 된 캐리는 늘 위축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기척 없이 걷는다. 긴 머리에 가려진 하얀 얼굴, 비쩍 마른 몸과 잔뜩 움츠린 어깨. 에블린 호스킨스는 그런 캐리를 훌륭하게 표현한다. 캐리의 커다란 눈에는 언제나 공포와 불안이 서려 있다. 비척비척 걷는 모습은 힘이 없어 연약해 보이고, 그런 그녀가 동급생들에게 놀림을 당할 땐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특히 강하고 센 엄마 역의 킴 크리스웰에게 휘둘리며 학대를 당할 때는 엄마의 거대한 몸집과 대비되어 더 큰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그녀인 만큼 독을 품었을 때는 누구보다 서늘하다. 엄마에게 당하기만 하던 캐리가 염력으로 엄마를 들어올리고,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명령조로 엄마에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때 뒤집힌 권력 구조가 흥미로운 장면을 선사한다. 특히 에블린 호스킨스의 연약한 겉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고음은 무척 매력적이다. 킴 크리스웰의 고음이 풍성하고 웅장하게 상대를 억누른다면, 에블린 호스킨스의 고음은 그동안 쌓아 온 한을 폭발시키는 것 같다. 고음부가 많은 캐리의 솔로 곡들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무대를 가득 채우는 힘으로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에블린 호스킨스가 흔들림 없이 뽑아내는 탄탄한 노래가 극 전체 구성을 잡아주는 힘이 됐다. 
캐리에 대적하는 크리스와 빌리는 전형적인 악동들로, 단순한 악당 캐릭터로 보인다. 하지만 매사에 자신만만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존심이 꺾이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캐리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크리스는 일반적인 인물이다. 그런 크리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못된 장난에 동참하는 빌리도 전형적이다. 두 사람의 장난이 학교에 대형 참사를 일으키긴 했지만, 결국 그 둘도 큰 악의 없이 행동한 흔한 청소년에 불과하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같이 캐리를 놀렸다가, 죄책감을 느끼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는 수나, 여자 친구인 수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토미도 일상적인 선을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들이다. 크리스, 빌리, 수, 토미를 비롯한 학생들은 교실에 한둘은 있었을 법한 평범한 청소년들이고,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그들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내는 장면은 여느 청춘물에 나오는 장면처럼 밝고 건강하다. 그들이 받쳐주는 일상의 세계는 캐리와 대비되면서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하는 앙상블 배우들은 활기찬 몸놀림으로 유쾌하고 건강한 장면을 만들었다. 
 



심기일전, 관객들과 통했다

<캐리>는 옛날의 초라한 성적을 뒤로하고 재정비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캐리>가 공연된 런던 서더크 플레이하우스는 참신한 공연을 자주 올리는 공연장이다. 약 한 달간 공연한 <캐리>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공연 기간 막바지에는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작은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들의 설렘과 그에 보답하는 배우들의 열정이 더해 열기가 가득했던 <캐리>의 2015년 프로덕션은 향후 재도약을 위한 성공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사방에서 핍박받던 주인공이 불안 속에서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모든 이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선사한 뒤 죽는 강렬한 서사가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뮤지컬 장르와 만나 빠른 템포로 진행되며 관객들을 집중시켰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끊임없이 뒷얘기를 궁금하게 만들고, 대체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호기심을 자아내는 연출은 관객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캐리>의 음악이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귓가에 어른거리고 혀끝에서 맴돌 만큼 중독성 있는 넘버는 아닐지라도, 작품 적재적소에 쓰여 불안과 긴장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해줬다. 공포 코드를 은근하게 작품 전반에 깔아둔 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청춘 뮤지컬로서 사춘기 학생들의 사랑, 시샘, 혼란 등을 표현한 <캐리>는 그야말로 갖출 건 다 갖춘 작품이다. 특히 같은 작가가 각색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갔던 1976년 영화와 달리, 밝고 건강한 가운데 음울한 불안을 깔아 마지막에 한꺼번에 폭발시킨 뮤지컬 <캐리>는 현대 관객의 입맛에 맞도록 효과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우리 앞에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색다르고 참신한 경험을 하고 싶은 관객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별미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2호 2015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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