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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INTERVIEW] 연출가 김광보 [No.142]

글 |나윤정 사진 |심주호 2015-08-14 5,369

꾸밈없이, 본질에 더 가까이


화려한 장식이 넘쳐나는 세상. 그래서 그 본질마저 잊을 때가 많은 요즘이다. 이런 순간, 김광보 연출은 불필요한 장식들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사는 사실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비워낼수록 오히려 채워지는 무대. 그것이 전하는 특유의 울림이 바로 지금의 김광보 연출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연극 <프로즌>과 뮤지컬 <신과 함께-저승편>을 연출하는 동시에, 서울시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된 김광보 연출. 쉼 없이 활약하고 있는 그의 연극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서울시극단과의 만남



서울시극단의 신임 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웠어요. 연출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만큼 서울시극단과의 시너지가 더 기대되는데, 어떤 방향으로 극단을 운영할 계획인가요?
첫 번째는 ‘서울시극단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 3년의 임기 동안 정기 공연의 연출을 맡아, 봄에는 고전 명작, 가을에는 창작극을 올릴 계획이에요. 그동안 서울시극단의 존재감이 조금 미미해진 것 같아요. 침체기였던 거죠. 극단의 존재감을 알리려면 일단 공연 편수가 많아야 하는데, 그 점에 한계가 있어요. 서울시극단은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정기 공연 하나, 겨울에 기획 공연인 어린이 연극 하나를 올리거든요. 편수가 부족한 편이죠. 극단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공연 편수를 늘려 나가는 노력을 하려고요. 마침 세종문화회관이 블랙박스씨어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요. 서울시극단이 이 극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단체가 될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극단이 ‘살아 숨 쉬는 단계’에서 ‘도약의 단계’를 맞이할 수 있겠죠.

올가을, 단장으로서 첫선을 보이는 <나는 형제다>가 눈길을 끌어요. 2001년 <인류 최초의 키스>를 시작으로 <웃어라 무덤아>, <주인이 오셨다> 등 15여 년간 연극계 콤비로 활약해 온 고연옥 작가의 신작이네요.
극단의 정체성은 단장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평소 제가 추구하는 것이 배우가 주체가 되는 미니멀리즘 연극이잖아요. 그 연장선이 앞으로 서울시극단의 컬러가 될 텐데…. 이를 가장 적합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역시 고연옥 작가의 작품이겠더라고요. 고연옥, 김광보 콤비잖아요. 마침 고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탈고했더라고요.

고연옥 작가의 신작 <나는 형제다>는 어떤 작품인가요?
테러리스트에 관한 이야기예요.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거예요. 한 소외된 인간이 나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가 그 극단적인 방법으로 주인공은 테러를 저질러요. 고연옥 작가가 그간 탐구해 온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에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외받는 인간! 한편으론 부담스런 부분도 있어요. 지금까지 고연옥과 김광보의 만남과는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시선 때문이에요. 하지만 분명히 다를 거예요. 단장인 저의 정체성이 서울시극단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서울시극단에서 완성시킬 거예요.

내년과 내후년에 계획된 극작가 장우재와 김은성과의 협업도 기대가 돼요. 이 두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한 이유가 궁금해요.
제 대학로 데뷔작이 장우재 작가의 <지상으로부터 20미터>예요. 최근 들어 작가이자 연출가 장우재가 새삼 주목받고 있잖아요. 시의적인 작품을 아주 재밌게 만들어요.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제 의식이 저하고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작품을 부탁했죠. 김은성 작가는 속된 말로 ‘말빨’이 장난 아니에요. 고전을 동시대 작품으로 각색하는 능력도 뛰어나요. 눈여겨보면서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제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한일교류연극협회에서 올해 초 낭독 공연을 했는데, 그때 <목란 언니> 공연을 위해 김은성 작가와 일본에 갔어요. 함께 지내면서 지켜보니 그 친구 참 괜찮더라고요. 소신이 분명한데, 주장을 세게 하는 대신 유머러스하게 말해요. 재밌는 친구다 싶어 사심 반으로 작품을 의뢰했죠.

상반기의 고전 명작 공연에선 어떤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2002년 서울시극단과 <헨리 4세>를 공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카드를 꺼내 들었어요. 서울시극단의 이창직 배우 덕분이에요. <헨리 4세>의 폴스타프란 인물은 그 배우가 아니면 도저히 연기하기 불가능하거든요. 폴스타프는 몹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나태한 인간인데, 그런 유형의 인간을 표현하기에 그만큼 적합한 배우가 없더라고요. 이 공연이 성공한다면, 임기 3년 동안 헨리 4세, 5세, 6세로 시리즈를 만드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싶어요. 이 공연을 서울시극단의 레퍼토리로 만들려고 해요.




배우가 중심이 되는 무대 




연극 <프로즌>이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 석 매진을 기록해 화제가 되었죠. 이런 반응을 예상했나요?
전혀요. 공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티켓이 매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죠. 저와 우현주, 박호산, 이석준, 정수영 배우가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을 땐 이런 효과가 안 나타났을 텐데. 함께 모이면서 폭발적으로 상승효과가 일어난 것 같아요.


<프로즌>은 세 인물의 모놀로그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데, 세 배우가 무대에 공존한다는 설정이 작품의 구조를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연극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요. 랄프는 왜? 아그네사는 왜? 넨시는 왜? 이렇게 질문의 근원을 추적해 나가는 거죠. <프로즌> 역시 근원을 밝혀 나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다른 부가적인 요소는 필요 없었어요. 오로지 배우가 해야 한다! 금세 결론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결과물이 나온 거예요. 그리고 어느 날, 배우들의 연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인물들이 무대 위에 공존하지 않더라도 사고의 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겠구나! 그래서 세 배우들을 계속 무대에 머물게 한 거예요.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이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만큼 실시간으로 더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거든요. 한편으론 배우들이 오브제가 되는 효과도 노렸어요. 이를 통해 세 인물의 관계가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듯한 무대를 만들고 싶었어요.


곧 개막할 <신과 함께-저승편>은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만큼 표현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이 작품엔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요. 착하게 살자! 김자홍이 저승의 길을 통과하면서 느끼는 게 바로 이 주제거든요. <신과 함께>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보다 서사가 훨씬 강한 작품이에요. 그럼에도 만화적 상상력이 있다 보니 장면 전환이나 무대 연출에 한계가 있어요. 매번 뮤지컬을 연출할 때 느끼는데, 이건 종합예술이라는 거예요. 연출이 각 장르를 잘 꿰매는 역할을 해야 하더라고요. 그리고 꿰매는 작업에 음악이 99.9% 영향을 끼쳐요. 이 작품의 페이지가 유려하게 넘겨질 수 있도록, 제가 잘 꿰매야겠죠.


‘미니멀리즘’은 김광보의 연출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특징인데, 실제 연출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연출로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요?‘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여기서 ‘무엇을’이 바로 주제적인 측면이거든요. 그런데 경험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를 간파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게’라는 형태에 더 치중해 버렸어요.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난무한 상황이었죠. 다행히도 몇몇 어르신들이 적재적소에서 저를 건드려주었어요. 그것이 아니지 않느냐, 힘 좀 빼라! 이런 자극들이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어요. 힘을 뺀다는 게 뭐지? 계속 저에게 ‘왜’라는 질문을 했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내가 만드는 연극이 과연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결국 ‘그 주체가 무엇이냐’라는 답으로 귀결되더라고요. 거기엔 배우가 있다! 제 연극은 무엇이든 간에 거두절미하고 ‘배우를 중심에 놓는 것’이라 보면 돼요.


미니멀리즘의 중심에 바로 ‘배우’가 있는 건가요?‘배우를 어떻게 중심에 놓을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예전에는 배우들에게 광분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오도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배우를 통해 내 욕구를 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너무 부끄러웠어요. 일련의 경험을 거치면서 이런 생각에 다다랐어요. 장식이라는 것이 왜 필요할까? 배우가 주체인데, 이 주체를 빼고 어떤 장식이 있어야 하나? 그러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어요.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로버트 모르스가 ‘형태의 단순함이 경험의 단순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거든요. 이게 정답이더라고요. 여기에 제 연극의 방법론이 있는 거죠. <프로즌>의 형태도 굉장히 단순해요. 그런데 거기 내재된 경험은 엄청나거든요.


이런 생각에 영향을 끼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첫 번째 계기는 2012년 <그게 아닌데>였어요. 극단 청우의 원년 멤버들이 함께한 공연이다 보니, 상호 간의 믿음이 컸어요. 그래서 많은 부분을 배우들에게 맡겼어요. 제가 한 역할은 그들을 믿고 지켜보고 정리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결과가 엄청나더라고요. 도대체 이게 뭐지? 의아했던 찰나에 일본으로 3개월 연수를 떠났어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거죠. 나는 왜 스스로를 가두려고 하는 걸까? 이후 계속 변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요.


변화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연극이란 무엇이냐는 정의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연극은 보고 싶은 욕망과 변화하고 싶은 욕망의 충돌이다. 처음 이 말을 듣고 섬뜩했어요. 보고 싶은 욕망은 관객, 변화하고 싶은 욕망은 배우인 거죠. 배우가 변화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을 때는 관객도 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지 않잖아요. 연극은 변화하고 싶은 욕망과 보고 싶은 충동이 만나는 것이다! 이게 정답 같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끊임없이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연출님의 무대를 이끌어가는 큰 힘인 것 같아요. 평소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
일상이죠. 제 모든 일상이 연극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 돼요. 요즘은 휴대전화만 있어도 사회의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잖아요. 지금처럼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걸 예민하게 지켜보는 거죠. 항시 귀를 열어 두고 있어요. 이것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이것이 작품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 거지? 이런 끊임없는 생각이 제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다고 보면 돼요. 한마디로 피곤한 인간이죠.(웃음) 그러다 보니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맥을 다 놓아버려요. 안 그러면 못 버티거든요. 그래서 저의 유일한 휴식은 집에 가서 잠들기 전 두세 시간, 매일매일 영화를 한 편씩 보는 거예요.


이처럼 연극과 관련된 일상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궁금하네요. 어린 시절부터 연출가를 꿈꿨던 건가요?사실 어린 시절을 희망적으로 지내지 못했어요.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시간들이었죠. 삶이 막연했어요. 애초에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3 겨울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그런 만큼 미래를 꿈꾸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열아홉 살 때 처음 극단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 왜 그 문을 열었지? 정말 저도 모르겠어요. 그건 운명이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어요. 처음 느꼈어요. 인간적인 동질감, 공유, 배려…. 연극은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더라고요. 그때 현장에서 작업하는 게 정말 좋았어요. 계속 현장에서 연출만 하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죠. 그렇게 처음 극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30년 이상이 흘렀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2호 2015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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