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심연 속으로
연극 <레드>는 상업 미술과 순수 미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의미를 묻는다. 이 이야기의 실제 모델은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숭고한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화가 마크 로스코. 5월에 막을 올리는 두 번째 재공연에서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을 연기할 배우들과 <마크 로스코展>이 열리고 있는 미술관을 찾았다.
오후 한 시.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빠른 시각이었지만, 켄을 맡은 박은석과 박정복은 벌써 미술관에 도착해 있었다. “<레드> 공연 기간에 맞춰 로스코전이 열리다니. 이건 정말 행운이에요!” 박은석이 흥분해 말했다. 그 후 십 분쯤 지났을까. 로스코 역의 한명구가 예의 그 점잖은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붉은색 물감이 흩뿌려져 있는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연습실에서 신었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온 것이리라.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 보니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게 쉽지 않더군요.” 한명구의 말대로 극 중 로스코와 켄은 1분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재빨리 그림 한 점을 완성해야 한다. 두 배우가 침묵 속에서 거대한 캔버스를 붉게 물들여 가는 행위를 감상하는 것, 이는 <레드>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무대 위의 행위자에게도 그 순간이 각별한 것은 물론. “순간적으로 맹렬히 열정을 쏟아낸다는 게 새로울 것 같아요. 침묵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느낌이 어떨지도 기대되고요.” 한명구가 말했다. 또 다른 로스코 정보석 역시 로스코와 켄의 그림 작업 장면이 무척 기대된다고 했다. “오늘 호흡이 별로였다 싶으면 제 파트너 정복이한테 물감을 튀기며 캔버스를 칠할 거라고 했어요(로스코와 켄은 각각 캔버스의 상하단을 나눠 칠을 담당한다). 공연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날에는 아예 물감을 아래로 쏟겠다고 했죠.” 정보석의 농담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도슨트의 전시 설명 시간이 가까워지자 배우들은 전시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전시실로 들어서며 마크 로스코의 초기작과 마주하게 된 배우들. “1940년대 초반 신인 화가였던 로스코는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나 입체파 화풍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갑니다.” 도슨트의 설명에 박은석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지금 이 시기에 있는 거겠죠? 황금기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지금 중요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레드>로 생애 두 번째 무대에 서게 된 신예 박정복의 목소리는 더욱 패기가 넘쳤다. “전 아직 준비 단계에도 못 왔어요. 젊음의 열정으로 세상에 들이대고 있는 시기죠.”
초기작 ‘신화의 시대’와 중기작 ‘색감의 시대’를 거쳐 로스코를 대가의 반열에 올린 회화로 구성된 ‘황금기’ 섹션에 이르자 배우들은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로스코의 색면 추상화는 천천히 사색하며 감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스코 그림은 시간을 들여 몰입하면 마치 색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저희 공연에도 그림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대사가 나와요. ‘컬러들은 죽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어. 우리가 시간을 들이면 공간을 돌아다녀.’ 아무래도 혼자서 다시 여길 와봐야 할 것 같아요.” 박정복이 말했다.
“1960년대 앤디 워홀로 대변되는 팝아트가 미술계를 장악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로스코는 미술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바로 공공미술인 벽화 프로젝트죠.” 네 번째 섹션 ‘벽화의 시대’에 전시돼 있는 벽화의 탄생 배경에 대해 도슨트가 설명했다. <레드> 속 로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큐비즘을 끝장냈어. 이젠 아무도 입체파 그림을 그리지 않아.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해야 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자신은 앞선 세대를 전복했지만, 자신이 이룬 업적이 깨질까봐 두려워하는 로스코의 모습에서 두 중년 배우는 공통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젊었을 때는 패기와 열정으로 앞서가는 예술을 탐구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그게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데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로스코를 괴롭혔겠죠. 솔직히 말하면, 요즘 내가 무대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계속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새로운 무대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죠.” 한명구의 말에 정보석도 공감했다. “다음 세대에게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요. 저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 여전히 멜로드라마 주인공을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나요. 젊은 세대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비참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로스코 채플(마크 로스코의 벽화가 있는 미국 텍사스 주의 예배당)을 재현한 전시실의 다음 공간에서는 <레드>에서 중요한 작품인 시그램 벽화가 배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그램 벽화는 뉴욕의 고급 빌딩이었던 시그램의 레스토랑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 1959년, 로스코는 2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그림을 완성한 후 돌연 계약을 파기하는데, 이 일화가 바로 <레드>의 모티프다. 예술의 상업화를 비난했던 로스코가 시그램 사의 작업 의뢰를 받아들였던 것, 그리고 갑작스레 계약을 취소한 것에 대해 배우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로스코는 물질주의에 빠진 뉴욕의 부자들을 각성하게 하려고 작업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했지만, 그 말이 진심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박은석이 꽤 도전적인 톤으로 말했다. “처음엔 한 공간을 자신의 그림으로 채울 거라는 제안에 그저 기뻤을 것 같아요. 최고 대우를 받는단 사실도 기뻤겠죠. 자기 합리화로 양심을 외면하려 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술의 순수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본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을 것 같아요.” 박은석의 해석에 한명구가 설명을 덧붙인다. “자기합리화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죠. 우리 작품에도 비슷한 말이 나와요. ‘이성의 차가운 거짓말 없이는 삶을 견뎌낼 수 없다.’ 하지만 로스코가 다른 이들과 달랐던 점은, 순수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는 거죠. 매순간 고통받았을 것 같아요.”
시그램 벽화를 감상한 배우들의 발길이 이른 곳은 온통 붉게 칠해진 커다란 캔버스, 속칭 ‘레드’가 걸려 있는 전시회의 마지막 방. 오직 한 점의 그림만이 걸려 있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배우들은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로스코가 죽음으로 완성한 핏빛 그림 앞에서 로스코로 무대에 서야 하는 두 배우는 무엇을 느꼈을까? “로스코는 결코 우발적으로 자살한 게 아니에요. 우울증 때문에 죽은 게 아니죠. 로스코가 동맥을 긋는 순간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쳐요. 전시회는 다시 보러 오겠지만, ‘레드’는 다시 못 볼 것 같아요.” 정보석의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친다. 한명구는 끊임없이 고뇌했던 천재 예술가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 두려워진다고 했다. “난 네 심장을 멈추게 하려고 여기 있는 거야. 무슨 소린 줄 알아? 난 네가 생각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린다고. 예쁜 그림이나 만들겠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전시회장을 나온 한명구가 로스코의 대사를 읊조리듯 말했다. 그 의미를 되짚는 게 지금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0호 2015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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