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만난 한국 뮤지컬 음악의 힘
작곡가 겸 음악감독 이성준이 지난달 20일 일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콘서트를 선보였다.
이제까지 배우가 주인공인 뮤지컬 콘서트는 많았지만 음악감독을 브랜드로 내세운 콘서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일본에서 한국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일까.
< K- Musical Conductor 이성준 콘서트 VOL.1 >의 리허설부터 본 공연까지 동행하며 한국 뮤지컬 음악에 대한 일본 현지의 관심을 직접 느껴봤다.
배우에서 음악감독까지, 커지는 한국 뮤지컬 파워
<잭 더 리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삼총사>, <뱀파이어> 등 일본에서 한국 뮤지컬이 꾸준히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배우뿐 아니라 창작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프랑켄슈타인>을 인상깊게 본 티켓 피아는 이성준 음악감독을 주인공으로 하는 콘서트를 기획했고, 이 감독의 일본 측 에이전시인 VOICE와 왕용범 프로덕션이 함께하는 행사가 성사됐다.
1월 <로빈훗> 개막 준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이성준 음악감독이기에 연습 일정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콘서트 전날인 12월 19일에 도쿄에 도착한 제작진은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근처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트링 콰르텟에 오보에와 플루트 연주자가 가세한 현지 오케스트라가 이성준 작곡가와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통역을 거치는 만큼 처음에는 소통에서 약간의 빈틈이 보였지만, 속도가 붙자 금세 서로의 의도를 파악해 연주 진행에 반영됐다. 덕분에 리허설은 곧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번 콘서트의 주인공이자 총연출을 맡은 이성준은 기타와 피아노를 분주히 오가며 연주자들을 조율했다. 이번 콘서트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의 이력도 화려했다. 센다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마스터인 니시토모 히로유키가 퍼스트 바이올린을 맡아 스트링 콰르텟을 이끌었다. 여기에 도쿄교향악단에 몸담고 있는 모가미 다카유키가 오보에를, 클래식계와 영화계에서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하토리 미사키가 플루트로 참여했다. 이성준 음악감독은 노련하게 이들과 소통하고 때로는 격려하면서 호흡을 맞춰갔다. 서지영과 박성환 배우의 순서와 목 상태도 점검했다. 4시간에 가까운 연습을 거쳐 밤이 깊어서야 끝난 리허설.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자리였던 만큼 모두가 집중했던 까닭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래도 본 공연에 대한 대비를 끝내 흡족한 얼굴로 내일을 기약했다.
유명 곡들과 토크의 이상적인 조화
오전에 한 차례 드레스 리허설을 마치고, 오후 2시에 요미우리 오테마치 홀에서 드디어 이성준 음악감독 콘서트의 막이 올랐다. <잭 더 리퍼>의 서곡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을 잇따라 선보인 이성준은 공연장을 찾아준 관객과 처음 마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서툰 일본어로 인사말을 건넨 이성준은 긴장한 탓인지 살짝 더듬거렸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진심을 느끼고 힘찬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두 곡으로 몸을 푼 이성준과 오케스트라는 <프랑켄슈타인>의 ‘나는 왜’로 분위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비올라가 힘차게 곡을 주도하는 가운데 바이올린과 첼로가 뒤를 따르는 인상적인 곡 전개에 관객의 몰입도는 높아졌다. 곡을 마친 후 이성준은 첫 게스트로 박성환 배우를 소개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상처’와 함께 등장한 박성환은 애잔한 감성으로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위대한 생명 창조가 시작된다’가 이어지자 분위기는 금세 반전됐다.
이날 콘서트는 이성준 음악감독이 MC와 연주자를 겸하는 컨셉으로 진행됐다. 그가 박성환에게 ‘위대한 생명 창조가 시작된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상을 묻자, 박성환은 이성준의 멱살을 잡는 제스처로 웃음을 자아냈다. 이성준은 <프랑켄슈타인>의 가이드 곡을 맡아 처음 불렀다는 박성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박성환은 “노래는 제가 불렀는데 정작 본 공연은 다른 배우들이 출연했다”며 농 섞인 푸념을 던졌다. 두 번째 게스트로 소개된 서지영은 <프랑켄슈타인>의 ‘남자의 세계’를 열창했다. 극 중에서는 거친 성격의 격투장 주인 에바가 부르는 곡이지만, 이날 서지영은 우아한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나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줬다. 서지영은 이성준의 작곡가로서의 출중한 능력을 설명하며 “제가 80살까지 활동한다면 계속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찬사를 던졌다. 하지만 이성준은 “80살은 너무하고 그 전에 끝났으면 좋겠다”고 받아쳐 웃음을 유발했다.
한편 두 게스트는 이날 유일한 듀엣곡인 <삼총사>의 ‘당신의 나의 기사’를 열창하기도 했다. 서지영은 ‘지난해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성민 결혼식 때 배우 이건명과 불러준 노래’라고 곡을 설명하며 “오늘은 그 중후한 아토스보다 훨씬 젊은 박성환과 부르게 돼 기분이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두 게스트는 각자 고른 곡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박성환은 <잭 더 리퍼>의 ‘이 도시가 싫어’, 서지영은 ‘아주 오래전 얘기’를 선택했다. 특히 이성준의 기타 연주와 어우러진 ‘아주 오래전 얘기’에서는 서정적인 멜로디에 흠뻑 빠진 서지영의 열창에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본 관객들의 열렬한 관심
이날 콘서트는 크게 이성준 음악감독의 곡들을 들려주는 시간과 게스트와의 토크,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의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관객과의 소통 시간은 이성준에 대한 일본 팬들의 관심도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질문에서 이성준은 여러 가지 숨은 에피소드를 털어놓아 관객들을 흥미진진하게 했다. 그 중 괴물의 ‘상처’ 신이 도쿄 근교인 하코네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던 경험을 살려 만들었다는 설명에 객석은 놀라움과 반가움에 잠시 술렁거리기도 했다. 서막인 워털루 전쟁 신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로 불꽃이 떨어져 괴로웠다는 고백으로 관객들을 웃음 짓게 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이성준 음악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이 무대에 올라 직접 노래를 부르는 이벤트였다. 이 아이디어는 이성준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는데, 부끄러움이 많은 일본 관객들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관객 참여 무대는 기대 이상의 높은 호응도를 보였다는 후문이다. 행운의 주인공은 <잭 더 리퍼> 중 ‘어쩌면’을 박성환과 듀엣으로 소화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콘서트의 마지막 곡은 ‘난 괴물’이었다. 오보에의 리드와 오케스트라의 합주는 괴물의 처연한 심정과 슬픈 운명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작품의 진수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성준 음악감독은 끝인사에서 “일본어를 못하지만 이렇게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작곡이 힘들어서 하기 싫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팬들의 성원이 있기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작곡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는 말로 응원의 박수를 이끌어내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피아는 이번 콘서트가 일본 관객들에게 한국 뮤지컬의 다양한 매력을 전해 관심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콘서트에 쓰인 ‘VOL.1’이라는 표현에는 향후에도 이 콘서트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겠다는 피아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마지막 인사에서 ‘꼭 돌아오고 싶다’는 이성준 음악감독의 말에 보낸 일본 관객들의 박수에서 열렬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피아와 왕용범 프로덕션은 이번 콘서트를 시작으로 좀 더 구체적인 콘텐츠를 고민해 새해에는 정기적인 시리즈로 이어갈 예정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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