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청춘
2014년 최고의 화제작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드라마 <미생>에서 엘리트 사원 장백기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강하늘.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뮤지컬 무대에서 실력을 쌓아온 무대 출신 배우다. 그래서일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을 지금, 강하늘은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는 열아홉 살 소년 해롤드로 생애 첫 연극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기쁨
2014년 최고의 화제작 <미생>을 하면서 많은 칭찬을 들었을 거예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예요?
‘장백기가 강하늘이었어?’ 하는 말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그 전까진 주로 학생 역할을 많이 맡아서, ‘강하늘 걔는 교복 말고 못 입잖아’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장백기가 저인지 몰랐다는 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는 얘기니까 정말 큰 칭찬이죠.
또래 배우들과 촬영하는 건 어땠어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다든가, 그렇진 않았어요?
솔직히 또래끼린 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 경쟁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전 배우가 역할과 상관없이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순간, 작품이 망가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또래 배우들과 경쟁하려고 해본 적이 없어요. 배우는 그 역할에 빠져있을 때 제일 멋있는 것 같아요.
과거 인터뷰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하려면 인지도를 쌓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는데, <미생>으로 유명세를 얻었잖아요. 뭐가 제일 좋아요?
전 <미생>이 이렇게 잘될 줄 몰랐어요. 우리 작품이 대박 나면 3퍼센트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해서 제작 발표회 때 시청률이 3퍼센트를 넘으면 이벤트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방송 초반에 3퍼센트를 그냥 넘겨버렸잖아요. 어쨌든 <미생>이 잘돼서 요즘 이런저런 대본을 받는데, 대본을 보고 내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요. 무언가에 쫓겨서 작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거, 이게 정말 좋아요.
주로 어떤 역할이 들어와요? 비슷한 점이 있어요?
다양한 역할이 들어와요. 정말 천차만별. 지난여름에 촬영을 마친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굉장히 나쁜 놈으로 나오는데, 이번에 개봉하는 <쎄시봉>에서는 또 완전히 다른 캐릭터죠.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배우는 ‘누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가 있는 게 좋다고. 비슷한 캐릭터를 하면서 확실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전 작품이 좋다면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어요. 역할보다 작품이 먼저죠.
다시
나를 채울 시간
지금같이 스타덤에 오른 시기에 무대로 돌아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제 생각에 드라마는 순발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땐 대본이 촬영 당일에 나오기도 하는데, 촬영 전 대본을 받아서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에서 연기하는 게 굉장한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전 그런 순발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에요. 골똘히 연구해서 연기하는 타입이라. 그런데 현장에선 어떻게든 해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좀 더 쉬운 길로 가게 되더라고요. 좀 더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그냥 쓱쓱 하게 되는 거, 그게 너무 싫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게 ‘100’이라고 치면, 그걸 조금씩 갉아먹는 기분? 제 자신을 다시 채울 만한 무언가가 필요해서 무대로 돌아오게 된 거죠.
지금처럼 관심이 높아졌을 때 연극에 도전하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어요?
그런 부담은 없어요. 오히려 좋은걸요.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거니까.
원 캐스트로 출연하는 건 제작사가 그렇게 해주길 바란 건가요?
아니요, 제가 원 캐스트로 하고 싶다고 했어요. 공연을 하면 할수록 공연은 원 캐스트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더블 캐스트로 공연하는 거지, 기본적으론 원 캐스트로 공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맡은 역할과 매일 만날 때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애정의 깊이가 달라지더라고요. 오늘 공연하고 나서 하루 쉬고 그다음 날 다시 무대에 서려면 어떤 땐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리고 이번엔 정말 오랜만에 공연에 참여하는 거라 다른 건 안 하고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에 원 캐스트로 하겠다고 못을 박았어요. (웃음)
어떤 점에서 <해롤드 앤 모드>가 좋은 작품인 것 같아요?
<해롤드 앤 모드>는 열아홉 살 소년과 여든 살 할머니의 사랑 얘기가 아닌 소통에 관한 작품이에요. 소통의 부재로 마음을 닫고 세상에 반항하는 해롤드가 모드라는 할머니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서, 뭐랄까, 정말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이 작품은 내가 가진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고 얘기해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강하늘도 십대는 이미 지나왔잖아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해롤드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대본을 보면서 해롤드, 얘 참 헛똑똑이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해롤드는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거든요. 세상에 자기만큼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죠. 해롤드에게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혹시 해롤드처럼 타인과의 소통 문제로 답답했던 때가 있어요?
그런 답답함은 여전히 느껴요. 지금도 이따금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먹먹함을 느끼죠. 연기에 대한 고민이나, 작품이 끝났을 때 찾아오는 공허함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거든요. 이런 먹먹함은 소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긴 하지만요. 이건 그냥 직면해야 하는 문제죠.
예전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연기에 대한 고민은 누구와도 나누기 힘들다는 말이요. 그리고 또래를 만나도 연기 얘기만 해서 진지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도 했죠.
네, 예전엔 연기 얘길 하도 많이 해서 진지하단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억지로 진지해 보이지 않으려고도 많이 했어요. 요즘엔 연기에 대한 고민은 속으로만 해요.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서 저 혼자 너무 진지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니까. 어떻게 보면 옛날에 비해 사회성이 많이 길러진 거죠. (웃음)
제멋대로 구는 열아홉 살 소년이 여든 할머니를 만나 마음을 열게 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들잖아요. 해롤드는 모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요. 해롤드가 왜 모드에게 끌렸다고 생각해요?
해롤드가 제멋대로 구는 이유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반항하고 싶어서예요. 그런데 모드는 해롤드의 그런 치기 어린 행동을 제지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줘요. 해롤드에게 그렇게 하도록 해준 사람은 모드가 처음이죠. 그리고 해롤드가 모든 걸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꽉 막힌 타입인 데 반해 모드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절차라는 게 없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어리다보니까 조금 다른 쪽으로 빠지게 되는 거죠. 해롤드는 모드에게 많은 것들을 배워가요.
연극계의 대모라 불리는 박정자 선생과 작품을 하면서 뭔가 배우고 있나요?
저는 대본 리딩을 매번 다른 버전으로 해보는 편인데, 제가 어떻게 하든 박정자 선생님은 다 받아주세요. 선생님은 마치 흐르는 물 같다고 할까. 와,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 되게 많이 해요.
일흔의 나이에 계속 무대에 서시는 걸 보면서 느끼는 바도 있었을 테죠.
있죠.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나라면 선생님 연세에도 계속 연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할 수 있을까, 제 자신에게 질문해 보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지 생각하다 언젠간 그만두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계속 생각이 바뀌어요.
언젠간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의외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힘들어서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연기가 진짜라고 믿게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연기에는 답이 없잖아요. 답이 없는 세계에서 제가 하는 행위가 답처럼 보여야 한다는 게 어렵죠. 가끔 배우를 그만하면 뭐하지, 혼자 생각해보는데, 만약에 연기를 안 한다면 다큐멘터리를 찍어보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꿨거든요.
음, 그래도 연기를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이번 작품에선 어떤 걸 기대하고 있나요?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미생>도 좋은 작품이지만, <해롤드 앤 모드>도 그에 못지않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오셔서 뭔가를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살면서 저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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