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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MAESTRO] 삶을 짓고 기억을 세우는 건축 미학, 건축가 승효상 [No.120]

글 |송준호 사진 |김호근 2013-10-07 4,186

실제로 무대 위에 집을 지어가면서 진행되는 연극 <1동 28번지, 차숙이네>는 집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공연 시간 내내 배우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완성하는 집의 건축 과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세워진 집은 단순히 문화나 예술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생존이나 존재 의미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하지만 한국에서 집은 거주 공간 이상의 의미가 됐다. 이제 집은 거주인의 계급을 구분하는 잣대이자 가장 유용한 재테크의 도구다. ‘삶의 터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어느새 퇴색된 지 오래다. 생활의 철학을 담은 건축 대신 무분별한 건설만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서민들에겐 ‘재개발’이나 ‘부동산’의 연관 검색어가 됐고, 식자들에게는 도시 공간을 압도하는 스타 건축가의 화려한 구조물을 연상시킨다. 어느 쪽도 ‘공존’이나 ‘사람’ 같은 건축의 원래 가치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이런 흐름에 일찌감치 제동을 건 이가 건축가 승효상이다. 그의 초기작인 ‘대학로 문화공간’을 비롯해 대표작 중 하나인 웰컴시티 등을 보면 그의 건축의 특징은 ‘비움’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열린 공간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언뜻 투박해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거주자의 생활 양식을 염두에 둔 섬세한 배려가 공간으로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지닌 그이기에 한강르네상스, 세빛둥둥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이전 서울시 당국의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행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에 뽑히는가 하면,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의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건축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건축가 김수근의 직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경력이나 위상과는 달리 그는 ‘빈자(貧者)의 미학’이라는 건축 철학을 선언한 뒤 실천해오고 있다. 빈자의 미학은 그 말처럼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이다.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되찾으려는 ‘좋은 건축’의 중심에는 ‘사람다움’에 관한 고민이 있다.
이런 고민과 철학은 당연히 그의 집무실이자 거주 공간인 이로재(履露齋)에도 그대로 담겼다.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과 사회 경제 분야의 책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서재는 그가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문필가이며 인문학자로 불리는 이유를 납득하게 한다. 그는 이제 건축 문화의 확산을 통해 현대인이 잃어가는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의 본질을 복구하려 한다. 그 방법은 건축 자체이기도 하고 강연과 저술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작업은 오랜 시간 멈춰 있었던 건축 문화의 진보를 위한 작은 발걸음이 될 것이다.

 

 

 

난민촌에서 시작된 나눔과 비움의 철학


‘빈자의 미학’을 거칠게 풀면 쓰임과 나눔, 비움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가치관이 형성된 건 역시 부산 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장 과정의 영향이 클 듯합니다.
저만 그렇게 살았나요, 뭐(웃음). 50~60년대를 보낸 사람은 다 그랬어요. 그런 환경뿐만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공간 기억력, 그 시절에 받은 기독교 교육 등이 생각을 깊게 만들었어요. 물론 나중에 여러 가지 건축적 가능성을 보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들도 있고. 제 건축을 선언할 즈음에 이르러서 그걸 하겠다고 정한 거죠.


그런데 지금은 1인 가구 시대잖아요. 도시엔 원룸만 가득하고, 그러면서 고독사는 늘고.
점점 우리 문화의 ‘모여 사는 삶’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도시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고 아파트에서 집단적으로 살긴 하지만, 붙어있을 뿐이지 모여 사는 삶은 아니에요. IT 환경이 발달해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니까 더더욱 혼자 살게 되죠. 하지만 그렇게 혼자 가상현실을 즐기다가 현실로 나가는 순간 비극을 맞는 경우가 매일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모여 사는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죠.


아파트 ‘단지 문화’는 여러 차례 지적하시기도 했죠.
단지는 특히 더 문제에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화인데, 아파트는 거대한 담으로 둘러치거든요. 외부에서는 여길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되죠. 밖에서 보기에는 하나의 섬, 도시의 섬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개인의 주택도 남과 교류하지 못하지만, 단지 자체도 다른 사회와 교류하지 못하고 관계가 와해되는 겁니다.


계속 강조하시는 ‘공유, 소통, 나눔’ 같은 말들에선 종교적인 느낌도 납니다.
어쩔 수 없죠. 어릴 때 받은 모든 가르침이 ‘절제’와 ‘나누는 삶’에 대한 것들이었으니까. 더구나 물신에 경도된 이 시대를 보면 여전히 유효한 말들이에요. 비단 성경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이야기하는 공존과 평화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거고. 종교를 떠나 지식인이라면 다 지지해야 하는 가치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원래는 신학과에 진학하려고 하셨다죠. 그때 가셨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사이비 신학자가 됐을걸요? 오서독스(orthodox)로 안 하고 이상한 신학을 했을 것 같아(웃음). 지금도 교회에 다니지만 목사님도 저에게 그런 말을 해요. 신학을 했다면 큰 신학자보다는 이상한 신학자가 됐을 것 같다고(웃음).

 

             

                      

 

‘김수근’이라는 방점


어느 장르나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가 있고 건축에서도 그런 사조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사람이나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오로지 외형적 미만 추구하는 태도 말이죠.
그건 지금도 있어요. 저는 건축가의 태도가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예술가적 태도, 또 하나는 지식인적 태도예요. 예술가적 건축가는 자기의 예술혼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사람인데, 그런 건축을 보면 땅의 위치나 프로그램이 뭐든 간에 비슷해요. 프랭크 게리(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나 자하 하디드(라이프치히 BMW 빌딩,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설계) 같은 사람이 그렇죠. 지식인적 건축가는 장소나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법을 내놓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에게 기쁨은 주는 건축은 두 부류 다에서 나올 수 있지만,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태도는 후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선생님의 철학이 형성된 건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요.
한순간에 이뤄진 일은 아니에요. 몇 년간 그걸 찾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하고, 그 전에는 15년 동안 김수근 선생님 문하에서 기본을 다졌어요. 가정 환경과 교육 방식들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그러다 나중에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갔는데 제 어릴 때 살던 모습과 비슷한 거였어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게 실체화돼 있던 걸 보고 확신하게 된 거죠.


스승을 넘어보고자 지시한 설계 분량의 두 배를 그려 갔다는 일화도 들었습니다. 힘드셨겠지만 그때 실력이 일취월장했겠네요.
들어간 첫해에 모범사원 상을 받았어요. 알고보니 밤을 가장 많이 새운 직원에게 주는 상이더라고(웃음). 지금은 살이 붙었지만 그때는 역광으로 보면 안 보인다고 할 정도로 말랐었어요. 눈은 항상 시뻘겋게 충혈됐죠. 절박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했어요.


무엇에 대한 절박함이죠.
시대적 상황 때문에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끌려가서 죽기도 했어요.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삶을 버티고 있나, 그런 삶의 가치에 대한 절박함이었죠. 지금은 그런 독기가 없어졌지만.


김수근 선생이 남긴 것 가운데 선생님께 가장 큰 유산은 무엇입니까.
건축가로서의 태도일 겁니다. 우리나라 현대건축이 김수근 선생 덕분에 확립이 됐다고 말해요. 한국 건축의 현대성은 김수근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이전까지 건축가라는 존재는 단순히 자본가의 시녀거나 하수인, 조력자에 그쳤고 문화를 생산하는 원천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거든요. 김수근 선생의 등장으로 건축을 통해 사회에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빈자의 미학, 건축가의 자격


독립하신 후 처음으로 설계하신 ‘수졸당’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죠.
지금은 그동안 설계한 건축물들이 다 밉지만, 그래도 잊어버려선 안 되는 게 유홍준 교수의 집인 수졸당이에요. ‘승효상 건축’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첫 번째로 만든 건축이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점 역할을 해주거든요. 주택 건축에서 현대성이 무엇인가, 전통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주택을 고민할 때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그런데 굳이 ‘빈자의 미학’이라는 철학을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건축가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 선택에 제한을 받게 될 수도 있는데요.
돈을 벌고 싶으면 건축 설계를 하면 안 돼요. 돈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해요. 좋은 건축가라면 그것만으로도 근사하게 살 수 있어요. 돈에 욕심을 내면 틀림없이 판단을 흐려요. 가령 오늘 마감이어서 끝내야 돈을 받는데 아직 확신이 없다면 저는 연장을 해요. 하지만 자꾸 그렇게 늦다보면 돈을 제대로 못 받죠.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건축은 건축주에게 봉사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아무리 개인의 돈으로 짓는다고 해도 건축은 기본적으로 공공적 기능이 있어요. 건축은 공공에 봉사할 책임이 있어요.


건축주의 요구와 공공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도 있겠죠.
물론이죠. 가령 건축주는 10층으로 하고 싶지만 공공 이익을 생각하면 5층만 해야 될 경우가 있어요. 타협하다 설득이 안 되면 건축가는 설계비를 손해보더라도 그 일에서 손을 떼야 해요. 그래야 진짜 건축가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건축주의 시녀밖에 안 돼요. 한번이라도 그렇게 하는 순간 영원히 건축가의 지위를 상실하는 겁니다. 이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요.


건축 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급자뿐만 아니라 수요자의 인식도 중요할 듯합니다.
최종적인 구축물은 건축가의 손을 통해 나온 거니까 일단 1차적인 책임이 있겠죠. 하지만 좋지 못한 건축들이 많아진 데는 소비자들, 일반 시민들의 건축에 대한 의식 수준 문제가 분명히 있어요. 물론 그것을 조장한 정부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죠. 임기 내에 지어야 하니까 서양에서 쓰다 버린 플랜들을 베껴서 급하게 만든 게 신도시들이거든요. 집값은 올라가니까 국민들은 좋아하고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죠.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건축이 발전하려면 향유하는 계층의 의식이 높아져야 해요. 그래서 요즘엔 일반인을 상대로 한 강의만 하고 있어요. 강의를 듣는 수백 명 중 한두 명이라도 생각을 고쳐서 나중에 건축주가 됐을 때 좋은 건축을 하게 한다면 우리 사회를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까.


그래도 지난 정부에서 건축 관련 이슈가 쏟아져 나왔죠. 서울시 신청사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지금까지도 말이 많구요.
정확히는 건축이 아니라 토건이겠죠. 몇 개 만든 걸 보면 아주 전시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음이 보이죠. 18~19세기에 위정자가 자신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스펙터클한 풍경을 만들었거든요. 일종의 관각(館閣)이죠. 아무튼 이제 부술 수도 없으니 시민들이 참아야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겁니다. 파리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도 처음엔 엄청난 반대가 있었잖아요. 다만 익숙해질 때까지 분노나 감정적 박탈감은 견뎌내는 수밖에 없겠죠.

 

                               

 

소통하는 건축가


소통 불능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소통이라는 화두는 지금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건축은 결국 거주자가 완성하는 거지, 건축가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소통을 안 할 수가 없죠. 어떤 건축가는 자기가 살 것처럼 만든다고 하는데, 그건 착각이죠. 내가 사는 집이 아닌데. 건축 설계가 굉장히 중요한 까닭도 그거예요. 설계 도면의 평면도는 일반인이 볼 수 없는 범위거든요. 시점을 무한히 위로 올려서 신만 보게 한 건데, 이 평면도를 그린다는 건 자기 입장을 떠나라는 의미에요. 자기 밖으로 자신을 추방해야 그릴 수 있다는 거죠. 남은 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정작 건축에서의 소통은 그리 민주적이지 못하다면서요.
그래서 중요한 게 코디네이터로서의 능력이에요. 건축은 작곡가나 미술가처럼 밀실에서 혼자 영감을 받아서 작업하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건축주와 동료, 시공자, 공무원, 사용자 등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있어요. 각자의 사정들을 조율하면서 진행하는 역량이 필요하죠. 이 과정에서는 특히 논리적 타당성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중요해요. 한마디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으로 건축 읽기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나 봅니다.
저는 건축 자체가 인문학이라고 봐요. 건축 설계를 잘하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나 잘 알아야 되니까. 문학이나 영화도 봐야 하고 역사도 공부해야 하고 왜 사느냐도 생각해야 하니까 철학도 해야 하고. 이게 건축의 기본적인 공부죠. 생각해보면 인류가 시작할 때부터 집은 있었어요. 예술이나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이미 있었죠. 그래서 건축은 예술이나 공학의 일부가 아니라 인문학인 거죠.


바로 그 코디네이터로서 파주출판도시 건설을 지휘하셨는데, 당시 염두에 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었습니까.
정치나 자본 논리를 떠나 땅의 논리로만 짓고 싶다는 게 원래의 생각이었어요. 관련 부처와 뜻이 안 맞아 결국 반만 제 의도대로 됐어요. 그래서 파주에는 원죄를 느끼고 있어요. 지금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지만 나타나는 문제들이 그 원죄 때문에 발생하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도시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생물체처럼 항상 변하거든요. 거주하는 분들이 그 원죄를 속죄하면서 도시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근사한 곳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건축


공저 『북위 50도 예술여행』에 나오는 스웨덴의 우드랜드 공동묘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를 건축으로 옮긴 그 묘지는 땅의 활용에 대한 철학이 시적 감수성을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된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건축가를 이렇게 정의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적 감수성으로 보편적 세계를 보는 사람’. 사물을 감수성으로 보되 지적 바탕을 가지라는 거죠. 감성에서 지성이 없으면 감상주의에 빠지게 되거든요. 인간의 존엄성을 더 고귀한 가치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 수단이 바로 보편적인 세계, 즉 남도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시각인 겁니다. 이런 자세는 비단 건축가만의 것은 아니라고 봐요.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도 이런 태도를 지녀야 좋은 예술가가 될 거예요.


좋은 건축이란 결국 균형이 잘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성과 감성, 내부와 외부, 인간과 자연을 두루 아우르는.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게 반기능적인 집이에요. 불편한 게 더 좋은 집일 수 있다는 거죠. 기능적이고 물량적인 게 항상 선(善)일 수는 없어요. 그런 기능주의를 주장했던 게 모더니즘인데, 모든 걸 이성과 합리로만 재단한다는 주의죠. 그런 정신을 담은 마스터플랜으로 신도시들이 탄생됐지만, 결국 모두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갔어요. 이성과 합리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재단할 수 없다는 거죠.


<말하는 건축가>의 고 정기영 건축가는 ‘기적의 도서관’을 남기고 떠나셨는데, 선생님께서도 훗날 은퇴에 즈음해 남기고 싶은 흔적이 있으신지요.
아뇨, 전 건축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실수가 없는 설계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해요. 건축을 남기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어요. 다만 내 건축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건축은 언젠가 다 사라집니다. 그걸 영구적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은 망상이에요. 다만 제 건축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이 진실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건축을 하는 거고.


건축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바꿀 수 있을까가 아니라 실제로 바꿔왔어요. 20세기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게 건축에서 비롯된 거잖아요. 우리가 사는 아파트, 건축이잖아요. 그래서 건축은 중요하면서도 위험하기도 한 거예요. 건축은 종교적 행위이고 건축가는 성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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