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BETH
2014년 일본의 뮤지컬계 최대의 기대작 <레이디 베스>가 도쿄의 제국극장에서 개막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제작사 토호가 <엘리자벳>의 미하엘 쿤체(각본·가사)와 실베스터 르베이(작곡)에게 작업을 의뢰하고, 고이케 슈이치로(小池修一郎)가 연출·번역을 맡아 세계 초연한 화제작이다. 제국극장에서 일본의 창작뮤지컬 대작이 초연되는 것은 2006년 쿤체와 르베이 콤비가 쿠리야마 타미야(栗山民也) 연출과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 이래 처음이다. 개막 후 <엘리자벳>이나 <레 미제라블>처럼 재관람 관객이 쇄도하고 있진 않지만 서서히 뮤지컬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레이디 베스>는 일본 뮤지컬의 가능성과 뮤지컬계의 과제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처녀왕 베스의 러브 스토리
무대는 16세기의 영국. 황금기를 맞아 대영제국을 이끈 엘리자베스 1세의 젊은 시기가 그려진다. 일본 관객은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다. <엘리자벳>, <황태자 루돌프>, <마리 앙투아네트>,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베르사유의 장미> 등 성공한 대작 뮤지컬들은 대부분 왕실물이었다. <레이디 베스>는 지금까지 일본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던 튜더(Tudor) 왕조 시대를 다루고 있다.
막이 열리면 비스듬한 원형의 회전무대 위의 천구의가 눈에 띈다. 고이케 연출이 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의 천문 시계를 무대미술의 컨셉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베스의 가정교사 아스캠(Ascham)의 넘버로 시작한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베스의 운명을 읽은 아스캠은 작품의 시대 배경이나 베스에게 주어진 상황을 노래로 설명해 간다. 그다음 음유시인 로빈과 시민들의 생기 있는 모습을 그린 넘버가 이어진다. 이 노래는 언니인 메리에게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금지당해 불우한 생활을 보내는 베스의 고독과 대비된다. ‘처녀왕’이라고 불린 엘리자베스 1세는 왜 결혼하지 않은 것일까? 엘리자베스 공주는 어떻게 진짜 여왕으로 성장해 갈까? 그 수수께끼를 로빈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러브 스토리로 전개한다.
16세기의 영국. 헨리 8세의 왕녀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불린이 반역죄로 처형당한 후 가정교사 아스캠이나 양육 담당인 아슈리와 함께 하트퍼드셔에서 생활한다. 어느 날 베스는 음유시인 로빈을 만나고 그의 자유로운 마음과 방랑의 생활에 매료된다. 한편 베스의 이복 자매인 메리가 잉글랜드 여왕에 취임한다. 메리의 측근인 사교 가디너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베스를 제거하려고 모략을 세운다.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로 옮겼다. 베스는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는 프로테스탄트를 이교도로 여기고 아버지의 종교를 배제했다. 베스가 로빈과 사랑을 키워가고, 연하의 스페인 왕자 펠리페가 메리에게 청혼을 한다. 시민들은 이 결혼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가디너는 반란을 핑계로 무고한 베스를 투옥한다. 베스는 계속되는 역경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본 뮤지컬 배우의 세대교체
출연진은 일본의 대표 뮤지컬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지금까지 토호 뮤지컬의 주연급으로 출연해온 스타들이 조연으로 참여한다. 일본 뮤지컬계의 차세대를 책임질 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주목을 받는다. 베스 역의 히라노 아야(平野綾)는 성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원래 꿈이 뮤지컬 배우였다. 그녀는 청춘 멜로물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순수한 감성 속에 숨긴 강인함으로 베스 역을 책임진다. 또 다른 베스 하나후사 마리(花總まり)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12년간 여자 역할로 톱을 맡은 전설의 스타다. 다카라즈카 퇴단 후 잠시 휴식 기간을 가졌다가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무대 생활을 재개했다. 다카라즈카에서 단련된 호화스러운 의상을 잘 소화해내 여왕의 우아함을 잘 보여준다. 노래가 약한 것이 아쉽다.
로빈은 토호 뮤지컬의 젊은 배우들을 위한 역할이다. <모차르트!>나 <로미오 앤 줄리엣>의 주연을 맡았던 야마자키 이쿠사부로(山崎三郎)는 쾌활하고 귀여운 자유 시인 로빈을 연기한다. <로미오 앤 줄리엣>에서 티볼트를 연기한 카토 카즈키(加藤和樹)는 이 역할로 토호의 대형 뮤지컬에 처음 출연했는데, 순정만화에서 막 나온 듯한 외모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앤 불린 역의 카즈네 와오우는 가창력이 돋보였다. 엘리자베스의 마음속 어머니라는 표현하기 어려운 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노래는 극장 전체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아스캠 역에는 야마구치 유우이치로(山口祐一郎)와 이시마루 간지(石丸幹二) 등 두 명의 주연급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두 명 모두 <엘리자벳>의 토드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온 스타들이다. 아슈리 역의 스즈카제 마요까지 세 명의 주연급 배우들이 조역으로 등장해 안정감 있는 연기를 펼친다. 조역으로 등장한 스타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세대교체는 일본 공연계의 중요한 과제이다. 새로운 작품을 통해 이 어려운 숙제의 실마리가 풀렸으면 좋겠다. 한편으로 젊은 배우들이 개성에 맞는 역을 찾아 자신의 배역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러운 것은 인상에 남는 뮤지컬 넘버가 없다는 점이다. 콘서트에서 배우들이 부르고 싶은 후크송이 없다. 또한 일본어 번역 가사에서 고생한 흔적이 느껴진다.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 캐릭터의 속마음을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작품인데도 말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감정을 전해주는 인상적인 멜로디가 적은 것도 가사 번역의 어려움을 더해준다. 주연급 배우들을 조역에 캐스팅하면서 그들에게 솔로 곡을 주다 보니 이야기의 핵심이 흐려졌다. 줄기는 보이지 않고 잎사귀가 많은 나무같이 밸런스의 부조화가 느껴졌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자아를 성취해서 여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중심 이야기가 곧은 작품이었어야 했다.
해설자가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작품의 첫 장면이 약하게 표현된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의 내면에 불타고 있는 마그마 같은 감정으로 시작한다면, <레이디 베스>는 별의 예언을 듣는 안정되고 신성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그것이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섬세함이지만, 스토리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부족하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를 넘지 않는다. 배경으로 삼고 있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 베스와 메리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노래는 아름답고 격조가 높다. 그리고 베스의 삶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무대나 개성 강한 캐릭터들 덕분에 이 작품이 앞으로 더 사랑받을 가능성이 높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재공연을 통해 수정·보완하면서 완성도를 높여 왔다. 일본에서 창작뮤지컬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레이디 베스>가 앞으로 꾸준한 수정 과정을 거쳐 일본을 넘어 세계에서 공연될 날을 기대해본다.
<레이디 베스(Lady Beth)>
동경 제국극장 4월 13일∼5월 24일
오사카 우메다 예술극장 메인홀 7월 19일∼8월 3일
후쿠오카 하카타좌 8월 10일∼9월7일
나고야 중일극장 9월 13일∼24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9호 2014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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