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이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언뜻 보자면 자연스러운데 가만 생각해보면 어럽쇼, 이거 쉽지 않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뮤지컬 <오필리어>가 그렇다. 햄릿이 아닌 오필리어가 주인공인 이야기. 일단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의 정체성은 고전을 뒤집는 해석적 상상력에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고전의 뒤집기는 작품을 창작하는 ‘고전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여전히 신선한 이유는 거기엔 뒤집기의 역량과 다시 보기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주제 의식이 명확하다. 기존의 읽기와는 다르게 인물을 발견하고 사건을 배치하는 까닭은 지금 여기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함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의 주제 의식은 그 온도에 상관없이 분명하고 강력하다. 고전의 뒤집기란 작가 의식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 <오필리어>는 자기의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장르로 뮤지컬을 선택했다. 이상할 건 없다. 작품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친숙한 형태로 전달하기에 뮤지컬은 가장 적합한 형식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햄릿의 이야기라 해도 뮤지컬의 옷을 입으면 복수 활극으로 탈바꿈하기 쉽다. 뮤지컬이라는 고유한 공연 언어 위에서 대사의 사유는 행위의 역동성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는 오직 음률의 감성과 맥을 같이할 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파고들 터. <햄릿>을 재해석한 <오필리어>의 주제 의식이 어떻게 뮤지컬이라는 언어와 조화를 이뤄낼지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이런 궁금증이 더해지는 이유는 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가 김명곤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걸출한 광대인 그는 이미 <우루왕>이라는 작품을 통해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를 시도했더랬다. 리어왕에게 버림받은 셋째 딸의 이야기와 역시 아비에게 버림받은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연결한 이 작품의 형식 또한 음악극이었는데, 국악을 근간으로 삼은 <우루왕>의 음악은 작품의 시선을 코델리아가 아닌 바리공주에게로 집중시키는 데 적잖이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오필리어>는 음악극이 아니라 뮤지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건데. 그가 생각하는 음악극과 뮤지컬의 차이는 무얼까.
그러니까 <오필리어>에는 세 개의 꼭짓점이 있는 셈이다.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주제 의식, 뮤지컬이라는 음악의 형식, 김명곤이라는 창작자의 개성. 이 꼭짓점을 펼치면 이 작품이 걸쳐져 있는 맥락은 아주 넓게 확장된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즉 고전이라는 공통점으로 엮이는 맥락이 있을 것이고, 부수적 인물을 부각시켜 원작을 뒤집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있을 것이며, 뮤지컬이라는 형식과 한국적인 무대화의 조화라는 시도로 모아지는 맥락도 있을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연극적이기도 하고 뮤지컬이기도 하며, 한국적이기도 하고 고전적이기도 하며 또한 현대적이기도 한 것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여타의 창작뮤지컬보다 복잡한 맥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복합성은 분명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자 가능성이다.
분명한 주제, 미미한 캐릭터
<오필리어>가 내세우는 주제 의식,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의 질문을 ‘사랑이냐 복수냐’로 바꾸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자의 질문이 자기 존재를 향한 개별적 질문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타자와 마주하는 자기 태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근거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변주된 주제는 원작의 무게에 뒤지지 않는다. 주제를 살리기 위한 사건의 재배치도 눈에 띈다. 이 작품에서 햄릿과 오필리어는 마치 거울 관계와도 같다. 살해당한 아버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광기, 잃어버린 사랑 등 햄릿의 사건이 오필리어에게 그대로 반복되는 거다. 죽느냐 사느냐, 햄릿은 복수를 선택한다. 하지만 햄릿의 복수는 또 다른 희생자 오필리어를 낳는다. 이제 질문은 오필리어의 것이 된다. 복수의 고리를 계속 이을 것인지 아니면 끊을 것인지 오필리어는 선택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그녀에게 있다. 멋지고 흥미진진한 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설정이 그저 의도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정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야기는 오필리어를 중심으로 다시 짜여야 할 터. 그런데 그 새로운 이야기를 엮는 솜씨가 영 헐겁고 싱겁다. 정해진 주제에 억지로 이야기를 욱여넣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 오필리어는 새로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저 치마 입은 햄릿에 불과하다. 선왕의 유령을 보고 클로디어스의 고해성사를 들을 뿐 아니라 광대들의 연극까지 기획하는 그대의 이름은 오필리어. 강물에 빠진 오필리어가 레어티즈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와 햄릿과 대결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남매가 쌍둥이라는 밑밥을 깔아놓았다 해도,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오필리어에게 현대적 여성상을 부여하려던 ‘언어적’ 시도도 성공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햄릿의 고전적인 대사는 여전히 멋스러운데 비해 오필리어의 발랄한 화답, ‘오빠!’로 대변되는 일상적인 대사는 그저 새털만큼 가볍게만 들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성은 현대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극의 조화를 해칠 뿐이다. 주제를 향한 의욕은 몇 마디의 대사에서나 살아있을 뿐 인물이나 사건에서 효과적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오필리어의 존재감이 미미하니 그가 대변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가 피상성에 그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펼쳐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사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로디어스만 신났다. 부인도 얻고 죽지도 않고.
뮤지컬보다는 음악극에 가까운
<오필리어>의 현대적인 감각을 이끄는 역할은 전적으로 음악이 담당한다. 이 작품의 음악은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럽다. 극에서의 음악이란 선율만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모든 ‘소리’까지 포함하는 것임을(무대 위의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어보시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음악이 뮤지컬로서의 자기 기능을 다하는지는 따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비단 감성적인 대중성보다 이성적인 세련됨이 도드라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뮤지컬에서 음악이 담당해야 할 ‘극적인 역할’이 단지 선율의 감동이라면 수많은 뮤지컬이 흥행에 실패할 이유는 찾기 힘들어진다. 뮤지컬의 음악이 담당해야 할 고유의 역할은 극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분할하는 연출의 기능에 있다. 뮤지컬은 음악이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에 음악이 개입하는 방식은 여전히 평면적이다. 음악은 장면의 전환이나 사건의 전개를 주도하지 않는다. 장면전환은 암전이 주도하더라. 인물의 갈등과 대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일례로 햄릿과 오필리어가 칼싸움을 앞두고 복수의 내막을 추궁하는 장면에서도 그렇고, 진실을 알게 된 왕비가 절규의 노래를 부르는 짧지 않은 장면에서도 다른 인물들은 멀뚱멀뚱 서있을 뿐이다. 지루하다. 극의 시공간이 음악을 통해 중첩되지 않은 데는 물론 연출의 탓이 크다. 그러다보니 이 작품의 음악은 극적이기보다는 설명적으로 다가온다. 인물들의 대사에 입힌 선율과 극의 배경에 깔린 음악이 아무리 좋고 많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뮤지컬이라기보다는 음악극에 가까워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건 시공간을 조율하는 음악의 기능보다 음악 자체의 다양한 화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한국적 질감을 완성도 있게 채워내는 주체는 단연 광대들이다. 우리 시대의 걸출한 광대인 김명곤이 광대를 가장 잘 그려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명곤의 말과 무대그림은 이런 질감을 그려낼 때 빛난다. 광대들의 말은 시적인 리듬감으로 충만하고 그들의 몸짓은 재치 넘치는 춤사위로 가볍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전체적인 조화에 있다. 지극히 한국적인 광대의 말과 옷과 리듬은 여전히 고전적인 햄릿의 식구들과 묘하게 엇박자를 자아내고, 가벼운 주인공은 무거운 주제를 짊어지기에 역부족이며, 상사화의 상징성은 극의 얼개와 어울리기엔 지나치게 작위적일 뿐, 형식의 다양성과 스타일의 일관성 사이에서 작품은 갈 길을 아직 정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무엇보다 사랑과 용서라는 너그러운 낙관이 죄책감조차 없는 비인간의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9호 2014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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