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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MAESTRO] 아코디어니스트 심성락, 달고 쓴 인생을 담은 바람의 노래 [No.119]

글 |송준호 사진 |김호근 사진제공 |구성조 한국음악발전소 2013-09-06 5,229

작은 키, 깡마른 체구의 노신사가 자신의 몸집보다 큰 아코디언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그의 모습은 어떤 무대에서든 합성사진처럼 한결같다. 지난 세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애잔한 아코디언 소리는 금세 공연장의 공기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디지털 기기의 인공음에 길들여진 관객들도 자연스레 그가 만들어낸 여유로운 선율에 몸을 싣는다. 그 순간 아코디언은 구슬프고 처연한 소리를 내는 지난 시절의 악기가 아니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회상하게 하는 타임머신이다. ‘감동’이란 말이 의미 없이 소비되는 지금에도, 그의 공연은 이렇게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반드시 관객에게 전해준다. 이것이 최근 몇 년간 ‘심성락’이라는 이름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다. 서늘하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녔지만 격앙시키지는 않는다. 항상 선을 지키며 미묘하게 감정을 절제한다. 이런 음악을 닮아 그의 표정 역시 늘 무덤덤하다. 웃거나 찡그린 모습도 여간해서는 볼 수 없다. 자신을 향한 때늦은 관심에 들뜰 만도 하지만, 그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일 뿐이라는 듯 늘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로 자신의 진심을 대신한다.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그저 묵묵히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객석의 박수에 답례하고, 다시 무대를 내려가는 일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에선 해탈한 느낌마저 받는다.

심성락이 주목받기 전까지, 젊은 세대에게 아코디언은 음악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오래된 이름이었다. ‘벨로즈(bellows)’라 불리는 주름 통에 바람을 담아야 소리를 낼 수 있는 아날로그 악기다. 하지만 그와 아코디언은 해방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근간을 지탱해온 주춧돌이었다. 패티김,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등 기성세대의 아이돌을 비롯해 신승훈, 김건모, 장윤정 등 젊은 뮤지션의 음반까지 수천 장의 앨범에 그의 음악이 묻어 있다.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인어공주> 등 유독 심금을 울리는 선율이 인상 깊었던 영화 OST에서도 그의 이름은 어김없이 발견된다. 이 같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1년에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도 받았다.

그러나 이런 몇 개의 프로필이 그의 음악과 인생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음악과 인생을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은 있었다. 2년 전 심성락과 후배 연주자들이 함께 꾸민 <유희열의 스케치북> ‘더 뮤지션’ 특집편에서 그는 정말 즐겁게 연주하고, 기뻐했다. 팔순을 앞둔 노구에도 이처럼 순수하게 음악 자체를 즐기고 감격할 수 있는 열정은 그와 그의 음악이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뮤지션 인생의 기초는 음악에의 천착에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에 부산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미 노래에 관심이 많으셨다죠?
형님이 음악을 좋아했어요. 24살 차인데, 만날 음악을 들었죠. 그게 내가 음악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일 거예요. 당시 레코드판은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이 전부였는데, 난 클래식 음악은 재미가 없더라고. 해방 이후 미군들이 많이 왔는데 형님이 그들을 자주 만났어요. 그러면서 영어와 미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지.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은 뭐가 있었나요.
‘장미의 탱고’나 ‘라 팔로마’, ‘이태리 정원’ 같은 노래들이었죠. 요즘 사람들은 아마 모를 거예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죠. 그때는 부산 KBS가 있긴 했지만 출력이 워낙 낮으니까 소리가 제대로 안 들렸어요. 대신 집에 큰 축음기가 있었는데 형님이 외국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니까 해외 음반들을 많이 가져올 수 있었죠. 또 그때 집에 왕래했던 분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작곡가들이더라고. 작고한 현인 선생 같은 분도 있었고.


그렇게 어릴 때 많이 들으셨던 게 훗날 음악 활동하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됐겠네요.
처음에 아코디언 연주할 때 도움이 됐죠. 악보도 처음 보는 건데, 그땐 악보를 보고 배운 게 아니라 듣고 외운 거니까. 1절만 들어봐도 어떤 건지 다 기억이 났어요. 또 그때는 부산보다 일본 규슈나 본토에서 나오는 방송이 더 잘 들리던 시대였거든요. 국내 라디오에서는 아직 가요가 나오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걸 들으면서 음악의 기초를 쌓았죠.


그간 하신 인터뷰를 보면 늘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음악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통째로 외우는 능력은 확실히 재능의 영역이 아닙니까?
난 재능이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코디언을 배우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나처럼 확실히 미칠 수 있겠냐고 물어봐요. 일주일 지켜보고 ‘너는 안 되겠어’ ‘너는 되겠어’ 이렇게 감이 오는 게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 사람이 얼마나 음악에 심취해서 그걸 배우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며칠 해보면 딱 구별이 돼요. 그런데 내가 안 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성공하는 사람도 있어. 그건 그 사람이 다른 데 가서 죽도록 배우고 연습을 한 거예요. 내가 잘못 판단한 거죠.


선생님도 일찍 성공한 ‘재능파’라 잘못 판단하셨을 수도 있죠.
아니, 나도 똑같은 경험이 있어요. 고1 방학 때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려고 혼자 서라벌예고를 찾아갔지. 당직 교사가 나를 피아노로 데려가서 음 하나를 치면서 테스트를 했는데 내가 그걸 알 리가 있나. 그런데 그 교사가 ‘너는 평생 음악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그분을 원망했지만 그 덕분에 절치부심해서 나중에 21살 나이에 논산 군예대 악장을 했다고. 이건 음악 학교도 안 다닌 보통 사람으로서는 천재적인 거겠지. 그래서 지금은 그게 좋은 교훈이 됐어요. 요즘 실용음악 학원도 있긴 하지만 가요라면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나한테 못 따라와요. 내가 논문 쓰면 박사 칭호도 받을 만해요. 그렇게 미쳤다고 할 정도로 노력한다면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거지.

 

                            

 

 

아코디언과의 운명 같은 만남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많은 음반들까지 섭렵하고, 가게 옆 악기점에서 아코디언을 처음 만나셨다죠.
그때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레코드 가게 앞 스피커밖에 없었어요. 그 앞에서 매일 서서 음악을 듣는 거예요. 가사를 알 수 있는 방법도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루는 또 서서 가사를 적고 있는데 그걸 안에서 보고 있던 점원이 들어오라고 해서 가사가 적힌 전단지를 주더라고요. 그 후에도 계속 드나들면서 친해지고 나중에는 가게 사장님하고도 친분이 생기면서 가게를 대신 봐주는 정도까지 된 거죠. 그러다 나중에 가게 절반이 악기점이 되면서 아코디언을 만나게 된 겁니다.


왜 아코디언이었습니까. 다른 악기도 많았을 텐데요.
내가 나온 경남고가 야구로 유명했는데 투수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쳤는데, 알고 보니 손가락 두 개가 없어. 그래서 기타를 반대로 뒤집어서 치는데, 그래도 잘하는 거야. 그런데 나도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다가 사고로 새끼손가락 끝이 잘려나갔거든. 나도 그 친구 방식을 따라해봤는데 잘 안 되더라고. 기타는 소리 하나를 제대로 내는 데 1년이 걸리는데 잘못 짚어도 안 되고 세게 짚어도 안 돼. 그렇게 포기했는데 마침 가게에 중고 아코디언이 있더라고. 그건 땡기면 일단 소리가 났으니까.


하지만 아코디언 역시 손가락이 다 온전해야만 운지를 잘할 수 있는 악기 아닙니까.
당연하죠. 사실 이런 상황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만의 운지법을 개발한 거죠. 네 손가락만으로도 할 수 있는. 자, 도레미파솔. (손가락으로 시범을 보이며) 이렇게 해야 해요. 할 수는 있지만 어색하죠. 게다가 까다로운 부분을 연주할 때는 확실히 누르는 시간이나 세기에 따라서 차이가 나요. 저는 오랜 시간 동안 해와서 다른 손가락을 활용한 운지법을 개발한 거지만, 사실 이런 손가락으로 연주를 한다는 건 음악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남에게 가르칠 수도 없고 그냥 저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언젠가 다른 아코디언 연주자랑 방송을 하게 됐는데 나 하는 걸 유심히 보더라고. 신기했던 거지.


아코디언은 지금도 흔한 악기는 아닙니다. 당시라면 더욱 그랬겠죠. 자연히 배울 수 있는 길도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익히셨습니까.
아코디언 연주하는 걸 본 적도 없었죠. 당시 국민학교 교실에 풍금이 있었잖아요. 일단 음계는 알고 건반악기의 기본 구조를 아니까 한번 해본 거죠. 구조는 전혀 다르지만 건반 누르면서 한쪽을 땡겨보기도 하고 눌러보기도 하면서 혼자 터득해간 거죠. 그때는 정말 초보 수준이었지.


빠질 수밖에 없었던 매력이 있었나봅니다.
그럼요. 처음 해보면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하잖아요. 그다음엔 아는 곡들을 해볼 것 아닙니까. 운지법대로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손가락 두 개만 가지고 해본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아코디언은 음이 너무 붙어도 안 되고 끊어져도 안 돼요. 음 사이가 떨어지면 스타카토가 되는데 아코디언은 스타카토를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일단 음을 이해하는 게 먼저에요. 연주를 하는 건 다음이죠.

 

 

                           

 

 

그때까진 취미의 일환이었다면,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도 있었을 텐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이 운영하는 논산의 다방에 갔다가 우연히 형과 친한 군예대 책임자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아코디언을 한다는 말을 듣고 저를 스카웃하셨어요. 당시로서는 큰 돈을 받고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악단에 들어가자마자 사고가 터졌어요. 당시 색소폰을 연주했던 군예대 악장이 공연 펑크를 낸 거야. 그때 나이가 21살이었는데 갑자기 논산 훈련소 군예대 악단장을 맡게 됐죠.


‘심임섭’이라는 본명 대신 ‘심성락’이라는 예명을 얻은 것도 그즈음이죠?
군예대 일을 마치고 다시 부산에 내려갔는데 KBS에서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전속 가수 모집을 했어요. 그때 아코디언 주자로 나서게 됐죠. 당시 아나운서가 저를 소개했는데 발음이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도미도 레코드(‘이별의 부산항’, ‘남행열차’ 등의 히트곡을 낸 당대 최고의 음반사) 한복남 사장이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어주시더군요. 소리 성(聲)에 즐거울 락(樂)이라고, 그때부터 그게 내 이름이 됐어요. 소리로 남을 즐겁게 만들라는 뜻이죠.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작곡가로도 활동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수 최정자의 ‘등대불 하소연’과 김복자의 ‘그대 그리고 탱고’, 태현철(지금의 현철)의 ‘차라 목석인들’, 박지연의 ‘찾아왔는데’ 등을 만들었어요. 당시 천지 나이트클럽의 김인배 악단에서 활동했는데 아세아 레코드의 최치수 사장이 제가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걸 보고 훗날 색소포니스트 이봉조 선생과 아코디언 연주집 「경음악의 왕」도 녹음하게 해줬죠.


「경음악의 왕」은 대박이 났죠.
그때 경음악 판 하나를 470원 정도에 내보낸 모양이에요. 욕을 많이 먹었죠. 당시 이미자 씨 가요 음반이 200~300원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게 나가기 시작하는데 엄청나게 팔린 거예요. 나중에 돈을 받으러 갔는데, 녹음실 악단이 음반 한 판에 받는 돈이 2,500원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열두 곡 했는데 그때 돈으로 8만 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경음악 레코드 판매 기록을 깼고, 아마 이 기록은 다시는 안 깨질 겁니다.


소위 ‘대통령의 악사’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코디언이 아니라 전자오르간으로 청와대와 인연을 맺으셨다구요. 
삼청동 총리 공관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김종필 총리 생신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왔는데 그때 처음 뵙게 됐죠. 이봉조 선생이 일본에서 전자오르간을 사서 총리께 드렸는데 사용법을 몰라서 저를 불렀다더군요. 그렇게 김종필 총리의 전자오르간 교습 선생이 됐고, 김 총리의 소개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청와대의 각종 행사에서 전자오르간 반주를 하게 됐어요.

 

                         

 

동시대와의 소통 그리고 돌아본 인생

2000년대 들어 영화 OST에 참여하시면서 본격적으로 젊은 세대와도 만나기 시작하셨습니다. 영화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OST는 영화사 쪽에서 찾아와서 하게 됐는데, 한번 해보니까 그쪽에서 음악 작업을 한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꾸 연락을 해오더군요. 워낙 오랫동안 활동을 하다 보니 젊은 사람들 중에도 저를 아는 사람은 많았어요.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음악을 찾아보고 저를 모르던 사람들도 새롭게 알게 된 면이 있겠죠. 그런 세상이 왔다는 게 재밌는 거 같아요.


2009년 발매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런 변화에 정점을 찍은 앨범이었습니다. 당시 대중가요 사상 최고령 뮤지션의 앨범으로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구요.
하지만 내게는 좋은 기억만은 아니에요. 원래는 음반으로 나올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처음엔 광고 음악을 하는 강 모 감독이 찾아와 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난 그건 싫다며 하지 말라고 했죠. 하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찍게 됐는데 이후로 뭐가 나온다는 말도 없이 왠지 지지부진해지더라고. 그러다 나중에는 무슨 녹음을 하자고 해서 갔더니 처음 보는 악보를 주면서 연주하라고 했는데, 연주료 지급이 계속 안 됐어요. 나중에 정산 과정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어요. 결국 저는 그 앨범으로 인해 상처만 입고 다시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사연을 듣고 보니 과연 유쾌한 기억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녹음을 하시면서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르 갈리아노와 협주를 한 건 좋은 기억일 것 같은데요.
바로 그거예요. 그나마 내가 지금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게, 그런 분과 만나서 같이 연주를 할 수 있었다는 거죠. 그건 정말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 외의 기분 나쁜 부분을 삭힐 수 있는 거예요. 그건 돈 주고도 못하는 거잖아요.


두 거장이 만났으니 녹음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한데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두 곡을 요청할 수 있었는데, 한 곡은 ‘꽃밭에서’를 해달라고 했어요. 나머지 한 곡은 ‘리베르 탱고’로 정해졌고. 그런데 그 사람은 ‘꽃밭에서’를 처음 연주하는 건데 기가 막힌 거야. 문제는 그게 연습이라 녹음을 하지 않았다는 거지. 음악하는 사람은 다 똑같더라고. 그렇게 미칠 듯이 잘하던 양반이 녹음 들어가니까 점잖게 하더라고. 다시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웃음). 하지만 그렇게 해도 정말 잘하더라고. 사람이 아니에요. 귀신이야, 귀신. 녹음 끝나고 나와서 짧은 영어로 내가 ‘Yes, your highness(네, 폐하)’라고 했더니 갈리아노가 싱긋 웃더라구요.


그 앨범이 유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계속 욕심이 없다는 말을 강조하시구요. 그래도 음악인으로서의 남은 욕심은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 욕심이 없어요. 그동안 내가 욕심을 냈으면 이 자리에 없을 거예요. 이런 내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남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스포트라이트가 보컬리스트에게만 집중되는 게 우리 대중음악계의 오랜 관행이었죠. 선생님의 여정이 의미 있는 건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50여 년간 대중음악의 근간을 지탱해오면서 최근에는 연주자의 위상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부분에선 저도 당연히 뿌듯함이 있어요. 다만 인간이 살면서 좋았던 기억이 많아야 하는데, 그건 오래 안 가고 안 좋은 기억만 오래 가더라고. 그래서 내 음악이 그렇게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9호 2013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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