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자정이 지나면 집 근처 길가에 라면 파는 트럭이 나타난다. 엄밀히 말하면 ‘라멘’ 파는 ‘라보’ 포장마차다. 하루는 늦은 귀가 중 시원한 라멘 국물로 그날의 취기와 담배 냄새를 털어내려 (라고 썼지만, 실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끌림에) 그곳에 들렀다. 그 시간에 과년한 여자가 흥이 덜 가신 얼굴로 자리에 앉자, 옆자리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재밌게 노셨냐고. 하하, 당연하지. 상대는 취하지도 않은 멀쩡한 얼굴로 묻는다. “무슨 일 하세요?” 짜식, 니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적당히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말투로 애매하게 답했(다고 생각한)다. “이 옆에 생긴 XX하우스, 제가 맡았어요.” 그가 맡았다는 게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는지, 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 이 동네 사는데, 거긴 처음 듣는데?” 뭐 그런 휘발성의 대화가 오가다가 다시 그가 묻는다. “그럼 앞으로 꿈이 뭐예요?” 응?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이런 건 스무 살 미팅 때나 하는 질문 아닌가? 지금 말하는 그 꿈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더라?
얼마 전에 친구가 알레르기 때문이라며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나타나선, 세상에 별별 알레르기가 다 있다고 했다. 복숭아, 땅콩, 오이 등등. 내겐 특별히 먹으면 괴로워지는 음식 알레르기는 없는 것 같은데, 음, 굳이 찾자면 ‘꿈 알레르기’가 있다. 세상에,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내게 꿈이란 건 아직은 내 몸 가까이에 닿으면 가렵고 귀찮고 불편한 대상이다. 지금까지는 안 먹고 살아도 무리가 없었고. 그런데 피하기가 힘들긴 하다. 너무 자주, 가까이에서 부딪힌다. 특히 내가 하는 일에서 가장 흔하고 중요한 요소이다.
뮤지컬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제가 ‘꿈’인 작품이 많은 장르다. 기사를 쓰면서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쓰는 단어가 꿈 아니면 열정, 희망이다. 보통의 직장인 친구들의 눈에, 나처럼 뮤지컬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고 사는 걸로 보이나 보다. 실제로 뮤지컬 배우나 스태프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이 일을 하기를 꿈 꿨거나 이 일을 통해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먹고 살려면 이 일 못한다. 꿈이 있으니까 그 열정으로 힘든 것도 이겨낸다”는 류다. 꿈과 열정은 이 바닥 사람들의 최고 무기. 어쩌면 그렇게 열정이 넘치는지, 내가 하는 일에 최대한의 도움을 얻는 데 그들의 열정은 무한히 감사해야 할 부분이지만, 일이 끝난 후 되돌아보면 그들의 뜨거운 마음에 신기한 생각마저 든다.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내게 무언가를 준다. 꿈꿨던 일을 하고 있어서, 더 잘하고 싶어서 끓어오르다 못해 넘쳐나는 열정 거품이 내게 쏟아져 흐른다. 이 낯선 기운은, 사실 상대의 마음까지 순간 뜨겁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수취 거부가 불가능하다.
이미 본 공연이지만 다시 봤을 때 새롭게 보이는 장면이 있다. 볼 때마다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맨 오브 라만차>가 꿈과 이상을 좇는 남자의 이야기란 건 이미 알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늘 감동적이지만 그때그때 특별히 와 닿는 부분이 다른데, 이번에는 이 장면이었다. (아, 최근에는 늙어 죽는 것에 대해 골몰하고 있던 터라 노인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눈빛만은 영민한 슬픈 수염의 노인이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철야 기도를 올릴 때였다. 훗날 이 장면이 어떻게 기록될지에 심취해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참 미사여구를 보태다가 ‘아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하고 퍼뜩 정신을 차린다. 허영에 들뜬 마음을 떨쳐내고 다짐한다는 말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께서 앞날을 꿈꾸다니! 충격적이었다. 별 일 없다면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 나는 생각지도 않는 일을. 그 노인이 미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놈의 꿈과 열정은 늙어서도 사람을 행복해 미치게 만드나 보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무대 위의 노인 때문에 내가 달라졌냐고? 알레르기에 효과적인 처방이 됐느냐고? 사람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꿈이란 게 꼭 풍선처럼 부풀어 하늘 위에 떠야 제 맛인가? 밤마다 꾸지만 아침이면 사라지는 꿈처럼, 보일 듯 말 듯 매일 밤 조금씩 나를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