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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10주년을 맞은 연극 <이(爾)> 여전히 싸워야 할 것이 남아있다 [No.78]

글 |김영주 사진 |박인철 2010-03-09 6,010

한 작품이 10년째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작품에서 아직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다.
연극 <이>에 질문하고, 답을 들어야 할 것들이 남은 사람들 중에는 10년간 이 작품을 만들어온 연출가와 배우들도 있었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태웅 교수와 세 주연 배우가 함께 연극 <이>의 지난 시간들과 앞으로에 대해 말했다.

 

 

그동안 변한 것들이 많을 텐데 다시 연습을 맞춰보니 어떠세요?
오만석
저는 4년 만이지만 다른 분들은 계속 자리를 지켜오셨잖아요. 저는 오랜만에 나와서 연습을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초연 때 것이 많이 나오는데 다른 분들에게서는 그동안의 변화가 느껴지죠. 그래서 저는 저대로 ‘아, 그동안 이런 변천사를 거쳐 왔구나’라고 깨닫고, 다른 분들은 ‘어, 저 녀석이 초연 때 하던 걸 하네?’라고 하시죠.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신선하게 와닿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자극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김태웅 극장이 계속 바뀌면서 변화되는 와중에, 초연 때 포착했던 좋았던 것들을 놓친 게  있었는데 이번에 10주년 공연을 하면서 거칠었지만 핵심적이었던 부분들을 다시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내하 작품이 10년이 되다 보니까 재공연 횟수도 많아서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하지가 않아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서로 어느 게 좋다고 지금에 와서는 확신할 수가 없어요. 시간만큼 좋아진 것일 수도 있고, 덧칠이 된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딱히 언제와 비교해서 지금이 어떻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초연과 비교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김태웅
공연을 하면서 어느 시기에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초연 때 대본을 보면 녹수가 너무 권력만 추구하는 여자로 그려졌어요.
진경 그래서 문예회관 대극장 초연 때는 녹수를 아예 전형화시켜 분장도 새하얗게 하면서 연산, 공길, 장생과는 구별되는 권력욕의 화신 같은 느낌으로 표현을 했었어요.
김태웅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공길이 연산을 사랑한 것처럼 녹수 역시 연산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보상받지 못하자 그 빈 자리를 권력으로 채우려는 것으로 변해 간 거죠.
김내하 그런데 사실 극에서 그려진 것은 여자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질투에요. 내 남편이 나 아닌 사람을,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한다면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인데 초연 때는 그것이 권력욕 쪽으로만 조명이 되었죠. 지금은 그 감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질투의 화신이라는 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질투로 그려지고 있는 거고요.
진경 초연 때 녹수는 다른 캐릭터에 비해서 인물적인 기반이 약해 애를 많이 먹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엄청 싸웠어요. 태웅이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미웠을 정도로요. 서로 진짜 힘들어했죠. 게다가 그때 난 어렸으니까, 이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고 혼자 속앓이를 많이 했어요. 지금은 말없이도 통하는 사이가 됐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다뤄진 인물이지만 <이>에서의 연산은 참 특별한 캐릭터 같습니다.
김내하 드라마나 영화, 희곡, 소설에서도 연산을 많이 다뤘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거나 읽은 바로는 연산은 언제나 한쪽 면이 많이 부각되는 인물이었어요. 폭군이나 예술적인 인간, 그 두 가지 중 한 면이 크게 다뤄져왔다면, 우리 작품에서는 철학적인 인물로 풀지 않았나 생각해요. 연산의 폭력적인 면이라는 건 권력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만 그려지고, 그것보다는 인간으로서 느끼거나 가질 수 있는 감정들, 그것들을 아주 섬세하게 담고 있어요. 모성에 대한 그리움, 그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폭력성, 그로 인한 인간 자체에 대한 그리움. 그러다보니까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는 것들은 싫고 조금이라도 순수한 인간을 좋아하고, 그래서 녹수도 좋아하고 공길도 좋아하게 된 거죠. 공길에 대해서도 마지막에 나를 죽임으로써 공길을 살리려고 하잖아요. 거기에 폭력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장생에게 가하는 가혹한 처벌들은요?
김내하 사실 시대상을 고려하면 그건 폭력이 아닌 거죠. 그건 왕에게는 당연한 직무수행 같은 거 아닌가? 아니 그럼 자기 안방까지 신발 신고 뛰어들어오는 놈을 예쁘다고 품어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더군다나 권력자인데. 그 당시의 권력구조로 봤을 때 그 정도는 횡포라고 보지 않아요.
진경 횡포야.
김내하 무슨 횡포야? 임금한테 그렇게 대드는데.
진경 질투잖아.
김내하 아니지, 당장 임금한테 그렇게 대들면…. 그래. 뭐 횡포지. 폭력은 횡포니까.(일동 웃음)


처음 <이>의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오만석 이 중에서는 제가 제일 처음 대본을 받았을 거 같아요. 그때가 99년 7월, 8월쯤이었는데 학기가 채 시작되기 전에 학교에서 대본을 받았어요. 그걸 집에 가져가서 초독을 하는데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아마도 이 이야기가 광대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배우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꿈꾸는 것이 많을 때인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었던 제게 광대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광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풀어가는 이 한 판 놀이가 굉장히 강하게 다가왔어요. ‘배우로서 이런 작품을 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내하 처음 대본을 길거리에서 받았는데 길에서 그대로 읽었어요. 몇 장 넘기면서 아, 이거 해야 된다, 중간쯤 가서는 어, 이거 우리가 해야 된다, 거의 다 읽어가면서는 야, 이거 당장 해야 된다, 마지막에는 김태웅 연출의 멱살을 잡듯이 해서 ‘연산, 내가 할게!’라고 했는데….(웃음) 내가 연극을 해오면서 그렇게 빨리 읽은 대본은 없어요. 그때는 굉장히 뜨거웠고 가슴이 벌렁벌렁했죠. 그리고 우리가 바로 술 한잔 했을 거예요.
진경 처음 봤을 때는 ‘오, 잘 썼는데?’(웃음) 말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공길의 마지막 대사. ‘왕이여, 나 죽으면 한강수에 던져주오’, 그리고 연산의 마지막 대사도 정말 죽이죠. ‘저 어둠 뒤에 무엇이 있길래 너는 가느냐.’ 아 이걸 어떻게 썼지? 그랬어요. (김태웅 연출을 가리키며) 저 봐, 좋아하고 있어.


오만석 씨는 처음에는 연산 역으로 연습을 했다고 들었어요.
오만석 학교에서 처음 리딩을 할 때 계속 연산을 시키길래 그런가 보다 했고, 속으로도 사실 연산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캐스팅 발표를 딱 하는데, 지금 뛰다의 대표를 맡고 있는 최재영이 연산이 됐어요. 그때 연산이 아니면 장생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장생은 또 이선균이 되고 저는 공길을 시키는 거예요. 캐릭터가 좀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역이 따로 있었으니까 처음엔 정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더라고요. 그때부터 방향을 선회해서 <패왕별희>의 장국영을 찾아보고….(일동 웃음) 그때는 갑자기 공길로서 작품에 접근을 하려니까 어리둥절했던 것 같아요. 내하 형도 그렇고 지금까지 연산을 잘 표현해내셨고 인물에 대한 여러 해석과 표현들이 있었는데, 저도 연산에 대한 배우로서의 동경이 있어요.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라도 도전해 보고 싶어요. 좀 더 젊은 연산으로 가게 된다면 어떨까,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권력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젊은이의 고뇌, 바르게 권력을 쓰는 법을 모르는 젊은이의 비애는 어떤 것일까, 끝없이 사랑에 대해서 갈구하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올바르게 쓰여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은 조금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김태웅 만석이가 학교에서 공연을 하고 그 다음에 연우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됐을 때 포스터 촬영을 하던 게 나는 기억이 나. 그때 극장 안에 아무도 못 들어가고 사진작가와 만석이만 들어가서 올누드로 사진을 찍어서 그걸로 포스터를 만들고 팸플릿도 만들었어요. 그때는 ‘남자가 크게 되려면 한번 벗어도 봐야한다’고 그랬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네.(일동 웃음)
오만석 왜 영화 쪽에서는 공사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없었어요. 완전히 그냥 다 벗었죠.
김내하 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을… .(웃음) 맞아, 그랬어. 그런데 사실 뭐 그게 다 열정이지.
오만석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학교 초연 공연을 할 때 저희 아버지께서 너 이(爾)자를 직접 써주셨어요. 그걸 포스터에 사용했었죠.
김태웅 그때 써주셨던 이(爾)자를 내가 표구를 해서 책상 위에 붙여놨어. 간혹 가다가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 그걸 보면서 아니다, 내가 이(爾)야, 연극을 하고 있는 내가 이(爾)일 수도 있어, 라고 생각을 하면서 보는 거죠. 만석 씨 아버지가 써주신 그 글씨 아주 멋있어.
오만석 그해 학교 안에서 했던 작품 중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대학로로 넘어가면서 내하 형도 함께 하게 됐고, 연우무대라는 프로페셔널한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제가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우리 극을 잘 만들어오던 연우무대가 가지고 있던 색깔과 <이>의 색깔이 어우러져서 그전까지 다듬어지지 않았던 교내 작품이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방향성을 갖게 된 것 같아요. 99년 여름, 대본을 처음 읽으면서 흘렸던 눈물이 그 2000년 공연에서야 진짜 무대 위의 눈물로 이어졌던 거죠.


연극을 원작으로 영화와 뮤지컬이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으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그 작품들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으셨는지.
김내하 영화 <왕의 남자>를 재미있게 봤는데, 잘 만든 영화지만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오만석 뮤지컬로도 두 번 공연이 됐는데 저는 <이>가 다시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면 우리의 전통음악을 쓴다든가 하는 틀을 떠나서 파격적으로, 예를 들면 록인데 우리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멜로디를 차용하는 그런 식의 시도가 어떨까 싶어요. 연극보다는 좀 더 템포가 빠르고, 화려하면서도 풍성하게 가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태웅 예를 들면 신중현 류의 록이 될 수도 있겠네.


<이>와 관련해서 특히 선명한 기억이 있으세요?
김태웅 2003년도에 정동에서 공연을 했는데 마지막 공연 때 관객들이 전부 다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줬죠. 그때 ‘아, 연극을 하면서도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다니!’하면서 엄청나게 기뻤던 기억이 있어요. 힘든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연습할 때의 어려움 같은 건 누구나 겪는 거니까. <이>는 연습할 때도 정말 재밌어요. 아, 지방공연을 할 때 정말 좋아요. 봄에, 꽃도 피고 할 때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 옛날 떠돌이 광대들이 원형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법한 자유로움, 해방감 같은 걸 느껴요. 가족도 뭐고 다 필요 없고 우리끼리 어울려서 다니는데 꽃은 막 피어있고, 그러면 미치는 거지.(웃음)
진경 오빠는 작업할 때와 평소의 에너지가 정말 달라요. 평소에는 굉장히 가라앉아있고 내적으로 침잠해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작업할 때는 제일 에너지가 많아요.
오만석 저는 기억에 남는 일이, 한 달 내내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림스치킨에 갔던 거예요. 늘 림스치킨이 1차고 매일 똑같은 닭에, 김치쫄면에 소주를 먹는데 항상 맛있었어요. 거기서 작품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가 참 많았어요.
김내하 연습이라고 이제 낮에 1시나 모여서 세 시간, 네 시간 계속 싸우고 토론하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지쳐가지고  ‘야, 그냥 맥주나 한잔 하러가자’하고 림스치킨에 가요. 들어가면서 ‘술집에서라도 작품 이야기하지 말자’라고 서로 다짐을 하는데, 술잔이 오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연습장에서 싸웠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오만석 뭣 때문에 그랬는지 기억도 안나요. 그때는 너무나 절실하고 이거 하나에 목숨이 달린 것처럼 그랬는데.(웃음) 지금은 몸에 익어서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것들조차 그때에는 모든 게 처음이고 새로웠으니까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거였으니까 하다못해 옷을 벗는 장면에서 누가 그 옷을 받아주느냐를 가지고도….
김내하 당시에는 그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어요. 진짜로.
진경 그리고 우리 내하 선배님은 요만한 것도 이렇게 크게 생각을 하시기 때문에….(웃음) 굉장히 디테일하세요.
김내하 사실 출발이 거기부터니까.
진경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아직까지 풀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김태웅 처형 장면에서 녹수가 빠져야 하느냐, 아니면 나와야 하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결을 못해서 10주년 때 어떻게 결판을 내려고 하는데, 그 이야기만 나오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넘겨서 계속 싸워요. 녹수 역 하는 진경 씨 같은 경우에는 ‘이 장면에 나와야 하면 나 공연 안한다’라고까지 하니까. 이 상황에서 ‘연출 지시니까 해!’ 이런 식은 또 안 되니까, 배우 스스로 정당성을 가지고 거기 서 있으려면 장면의 목표가 뭔지 같이 생각을 해봐야 하죠. 그러다가 답을 찾게 되면 아주 명장면이 나와요.
진경 오늘도 모이기 직전까지 통화하면서 계속 그 장면 이야기를 했어요.(웃음)


지난 10년간 <이>라는 작품과 인연을 맺어오면서 감사한 일이 있으세요?
오만석
극의 마지막에 내하 형이 저를 붙들고 ‘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나는 쓰러져 있고, 형은 얼굴을 가까이 해서 부르짖는데, 그 소리가 내 몸 안을 휘감고 나가요. 물론 귀를 통해서 들어오지만 그 소리가 내 몸 전체를 통과해서 사라지고 나면, 마치 내가 정말로 ‘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게 다른 표현의 전율인 것 같아요. 광대가 죽으면 정말 이렇게 죽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전율이 매번 공연을 할 때마다 한 번씩 왔는데 아마 그게 내하 형이 연산을 했기 때문에 전달이 된 게 아니었을까… .무대 위에 있는 동안에는 뒷모습만 봐도 정말로 사랑스럽고, 그 품에서 광대로서 죽을 수 있다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마 내하 형이 가지고 있는, 무대 위에서 쌓아온 힘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배우가 무대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건 엄청나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김내하 민망하게 그런 걸 뭐 말로…. 그런데 이러면 내가 바로 이어서 만석 씨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게 우스울 것 같아서… .우리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태웅 씨에게 굉장히 고마운 걸 이야기할 게요. 솔직히 처음에는 초연, 그리고 재연 정도만 기대를 했어요. 물론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이건 아무리 못 만들어도 욕먹거나 관객이 없지는 않겠다고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래도 뚝심 있게 10년 동안 매번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팀을 챙기면서 끌고 와 준 것이 이 사람의 통솔력과 통찰력 덕분이지 않나 싶어요.
진경 저희는 다 더블 캐스팅을 한다든지 공백이 있었는데 사실 가장 오래 묵묵하게 <이>를 지킨 사람은 장생 역의 이승훈 선배에요. 한 번도 더블 없이 10년 동안 해왔어요. 사실 <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선배고요. 일등공신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김태웅 같이한 배우들, 주역은 물론이고 우인들까지도 이런 작품을 같이해서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한다는 것 자체가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고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아요. 작품을 하고 난 후에는 하기 전과는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 좋은 이야기 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데 창피해서 못하겠다.(일동 웃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78호 2010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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