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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하얀 앵두>의 극작가 배삼식 - 살아있는 슬픔과 기쁨 [No.83]

글 |김영주(자유기고가) 사진 |심주호 2010-09-01 5,660


눈이라는 이름의 어린 진돗개가 있다. 날씬한 몸피에 반듯한 얼굴, 이름값을 하느라 생김새가 유난히 깨끗한 백구인데, 어느 겨울 눈 오던 날부터 극작가 배삼식과 함께 산다. 그리고 원백이라는 나이 든 개도 있었다. 역시 진돗개인데, 이 녀석의 주인은 반쯤 잊혀진 중년 작가 반아산이다. 원백이는 주인이 강원도 영월 산골에 지은 전원주택에서 살면서 하루 중 제일 긴 시간을 집 앞뜰 한구석에 엎드려서 지냈다. 가끔 5억년 묵은 삼엽충을 모아서 숨겨놓기도 하고, 옆집 어린 개 복순이에게 눈독을 들이기도 한다.
극작가 배삼식의 자전적인 작품 <하얀 앵두>에서 사람들은 노견 원백이가 웅크린 앞뜰에서 아옹다옹하거나 서성인다. 산 사람이나 살다 간 사람이 늙은 개의 등을 어루만질 때, 넋두리하고 눈물지을 때, 그 일상적인 풍경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던 연극 <하얀 앵두>가 다시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지난 6월에 한예종에서 가르치시는 학생들이 뮤지컬 <삼포 가는 길>과 <서울, 1964년 겨울>을 만들어서 발표회를 가졌는데요. 작업을 지켜보시면서 생각하게 된 것들이나 느낀 점이 있으세요?
학생들과 작업을 하면서 이런 뮤지컬도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실 어려운 미션을 아이들에게 줬던 건데……. 물론 그것이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에서 꾸준히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만들고, 그러다 보면 그런 작품을 원하는 관객층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고….  따져보면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인 것 같아요. 흔히 말씀하시는 ‘뮤지컬 공식’, ‘뮤지컬 어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려면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정된 형식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형식이라는 것이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주제나 내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학생들이 협업을 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배웠어요. 그리고 꼭 뮤지컬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형식만 가능한 것은 아니고, 훨씬 더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아직 제가 할 자신은 없지만… (웃음)

 

<과학하는 마음> 시리즈를 보면서 일본 작가의 작품은 정말 일본 사람이라서 저렇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았고, <하얀 앵두>는 정말 한국 사람이 썼구나 싶은 작품이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니까요. (웃음) 일본적이거나 한국적이라고 말하거나, 동양적이다 서양적이다 같은 구분처럼 작가마다 다른 게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갈등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 거죠.
현재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는 한순간의 갈등을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것으로 날카롭게 벼려서 진검 승부를 하면서 거기서 뭔가 생기기를 바라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편에는 이 갈등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연적이며 수많은 억지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왜 우리가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나, <하얀 앵두>에서 말한 것처럼 5억년 후까지 가지 않더라도 10년 후, 아니 1년 후로만 놓고 생각해봐도 그 갈등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지 않나, 결국 이 갈등은 상대적이고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부딪힘일 뿐이라고 보기도 하고요. 그런 게 좀 달랐던 거 같아요.

 

<하얀 앵두>를 보고 나오면서, 어느 쪽이 당의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슬픔을 웃음이 감싸고 있는 것인지, 웃음을 슬픔이 끌어안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하신 작품이라고 들었는데요.
저한테도 그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오래 준비를 했다면 쑥스럽고, 그보다는 오래 마음속에 있었던 작품이지요. 보통 많은 작가들이 처음 작업을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했어요. 스스로 제가 이야기할 만한 바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그런 내밀한 이야기는 오히려 마지막에 가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지 하여간 그랬는데… <하얀 앵두>를 쓸 당시에,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제 마음이 참 공허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웃음) 그 허함을 어떻게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뻔뻔스럽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옛 이야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던 듯해요.    
극이라는 뜻의 한자를 보면, 호랑이(虎)와 돼지(豚)가 뒤엉켜 있고, 옆에 칼(刀)이 서 있어서 극(劇)이 되는데, 사슴이나 토끼가 칼을 들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 칼은 사람이 들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애초에는 극이라는 것이 놀이가 아니라 번거롭고 심한 상태,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그 조화가 깨져버린 회피해야 할 상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인 거죠. 이 극이라는 글자는 어디 한 군데만 삐끗해도 흩어져버리는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참 아슬아슬한 상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극은 번거로운 어떤 것이며 실제 삶의 상태도 아닌 일종의 시험대에요. 그 시험대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았을 때, 새로운 깨달음이 없다면 상당한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극의 갈등 그 자체를 즐기거나 자극만을 추구하는 것은 퇴폐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말이 좀 정신이 없죠?(웃음)

 

아니요, 계속 말씀해주세요.
극을 한다는 건… 예를 들어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꽃을 피운다는 것이 무지 낭비지요. 온 힘을 들여서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는 건데, 그런 낭비를 하는 아주 중요한 목적이 그들에게 있잖아요. 자기들의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꽃을 피우는 거죠. 그런 번거로움과 갈등을 극한까지 치닫게 해서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몰고 갈 때는,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삶을 아주 날카로운 극에 올려놓을 때는 거기서 뭔가 합당한 물음이 던져지거나, 생각이 움직이고 있거나, 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최소한의 움직임이라도 있거나 그래야만 이 ‘낭비’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면을 드러내려고 했어요. 호랑이와 맷돼지와 칼 든 사람이 함께하는 아슬아슬하고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이 순간을 한 발짝 물러서서 살펴본다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일단은 그것이 내가 느낀 공허함,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스스로에 대한 위로일 수도 있고요.

 

대본이 2주 만에 완성되었다고 들었는데 빨리 쓰겠다고 작정을 하신 거였나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그동안 작정하고 이것이 어디에 쓰일 것이다, 요건 여기다가 써야지, 하고 모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고 이야기의 틀이 잡히니까 그동안 들여다봤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한데 뭉쳐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작업을 할 때 친구 집을 빌려서 썼는데, 시간이 얼마 없기도 해서 하루에 A4로 다섯 장씩 쓰자, 다짐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썼어요. (작업량을 못 채운 날은 없으셨어요?) 죽어라고 썼기 때문에… 다음 날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요.(일동 웃음) 일단 초고를 완성해놓고 연습을 하면서 많이 고치기도 했고요.

 

<하얀 앵두>에서는 복순이를 제외하면 다들 비범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요. 어떤 의미를 두고 지으셨나요?

그냥 그 인간들과 텅 빈 뜰을 생각하면서… 다 식물 이름이잖아요. (반)아산 같은 경우에는 수선화라는 뜻이고요. 나름대로 자기 연민에 빠져있고 나르시시스트 기질도 있고 가녀린 척하는 그런 인물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붙여줬고, 여배우인 영란은 은방울꽃이라는 뜻인데, 원래는 산속의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데 사람들이 앞마당에 옮겨 심긴 하지만 웬만해서는 자라기만 하고 꽃은 잘 피지 않아요. 곽지복은 탱자나무와 치자나무, 가시가 빡빡하게 돋아나 있지만 사실은 울타리처럼 정원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그런 이름을 붙여줬고, 딸 반지연은… 이 아이 때문에 그 가족이 반씨 성을 갖게 됐는데, 채송화가 반으로 가지를 잘라놔도 이어진다고 해요. 잘라서 땅에만 꽂아놓으면 바로 뿌리를 뻗는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고 해서 지연이에게는 채송화라는 뜻의 이름을 줬어요.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향나무처럼 향을 풍기고 있으니까 원백이, 마음에 뿌리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개구리밥풀 같은 사람이니까 오평이, 그다음에 종안이는 나팔꽃이라는 뜻이고, 소영은 사실 중국의 옛 시인이 매화나무를 아주 시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성긴 꽃그늘이라는 뜻이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라 매화라는 이름을 줬어요.

 

말씀하신 대로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아주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극인데요. 쓰시면서 각별히 마음이 가거나 더 의미를 둔 인물이 있으세요?
그러지 않으려고 되게 노력해요. 극을 쓸 때는 나조차도… 극이라는 것이 그런 거 같아요. 아까 글자에서도 봤듯이 호랑이와 돼지와 사람 중에 절대적인 존재가 없잖아요. 각자의 다른 입장이 있는 거고, 거기서 아주 잠깐 작은 호흡의 변화만 줘도 상대에게는 즉각적인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체호프가 정말 위대한 작가인 것 같아요. 자기 목소리를 전면에 드러내거나 누구 한 사람에게 작가가 감정을 이입했다면 재미가 없어졌을 거예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죠. 그분 작품에도 의사라든지 작가 같은 캐릭터가 꼭 나와요. 그렇지만 극 안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죠. 절대 그들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요. 내가 짐작하건대, 체호프는 『바냐 아저씨』에서 숲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문제가 엄청나게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면, 별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고,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넘겨버리거든요. 제 작품에서도 가능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같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웅성거리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한 가지 목소리가 지배해버리면 극은 단조로워지고, 관객들에게 강요를 하게 되니까요.

 

자신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를 작품 속에서 그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말 엄격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악취미 같기도 하고, 조금 고독해 보이기도 합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공존하는 가운데 나 스스로를 객관화시켜서 자신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극이 갖는 매력 중 하나지요. 세상에 대해서든 삶에 대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것이 곧 공부를 하는 거잖아요. 물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나는 나일 뿐이니까. 절대로 내가 아닌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달라지려고 노력해보는 것이고, 다른 인물의 입장에 서보려고 애쓰면서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 들여다보는 거죠. 제게는 그게 극인 것 같아요.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작가들도 있을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서, 확실하게 자신을 싣는,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해요. 기본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이 부분적인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불행하지요.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유머가 많은 작품이지만, 사람들이 제일 크게 웃는 장면은 반아산의 여고생 딸 지연이가 윤리선생님의 아이를 임신하고, 윤리선생님이 결혼을 허락 받으러 온 심각한 상황입니다. 극 초반에 원백이가 복순이를 임신시켜서 곽지복이 노발대발하자, 백배사죄하면서도 내심 흐뭇해하던 반아산의 모습, 그리고 지연의 임신을 알게 되자 반아산을 위로하면서도 이제 너도 내 속을 알겠구만 하고 슬그머니 좋아하는 ‘복순이 아빠’ 곽지복이 겹쳐지는 해학적인 장면인데요.
의도적으로 대비가 되도록 배치를 한 장면이지요. 딴 이야기인데 요즘 너무 흉한 일들이 많으니까 배우들은 그 부분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아무튼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든 그런 심각한 순간이 되면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을 배치하려고 애썼어요. 어떻게든 갈등을 상대화시키고 객관화시키면서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거의 무화시키거나 전환시키려는 의도인데, 사실 체호프가 이런 방식을 많이 썼어요. 한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옆으로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되잖아요.

 

어렸을 때 오래된 책을 보면 발행 연도를 꼭 확인해보고,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인쇄된 책이면 괜히 좋아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얀 앵두>를 보면 그 비슷한 기분이 들어요.
연극은 어쩔 수 없이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요.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인간에게서 벗어나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인간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수많은 생명의 그물망 속에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니까요. 지금 이야기한 책의 시간도 그렇고, 동전도 그렇잖아요. 나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얜 어디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아무튼 그런 것처럼 꽃의 시간, 개의 시간, 훨씬 오래된 화석의 시간, 그런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고물고물한 인간의 삶을 오래도록 내려보고 있으면 어떨지 이 작품의 바닥에는 그런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혀 새로운 생각은 아니죠. 이미 옛 어르신네들이 그런 상대적인 시각으로 인간을 벗어나서 인간을 들여다봤고, 그 마음이 저에게까지 전해진 것이겠죠. 요즘 고민하는 것들도 그거에요. 캠페인 연극은 안 되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만 삶을 바라보면 결국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인간 중심에 대한 반의라고 해야 하나 탈의라고 하나, 이런 것들을 연극에서 재미있게 풀 수 있을까.

 

앞으로 작품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계시는지요.
우리의 가까운 과거, 논쟁적일 수 있는 문제, 개인의 내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과거에 대해 기존에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까운 과거라면 당연히 전쟁일 수도 있고…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어떤 틀에서 벗어난 시각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사실은 우리가 그 과거에서 전혀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아주 내재화된 형태로 여전히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마 그 문제를 쓴다면 <하얀 앵두>와는 다르게 상당히 논쟁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민감한 사건들에 대해 기존의 사고가 규정해버린 틀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얀 앵두> / 8월 4일 ~ 8월 29일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3호 2010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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