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젓줄인 고대 그리스 문화가 인류에 남긴 정신적 유산은 믿기지 않을 만큼 무궁무진하며 또한 현재적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철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정치와 스포츠가 현대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가늠해보면 경이로울 정도이다. 지금으로부터 2,800여 년 전에 쓰였으리라 추정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는 현대 문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텍스트이다. 한국과 그리스, 로마(이탈리아)의 지정학적 거리나 현대와 고대의 시간차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삶을 광년만큼 까마득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21세기 인간인 우리조차도 서기 6세기에 멸망한 가야의 정치제도, 사상, 예술에 대해 아는 것보다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사대주의 운운할 것은 없다. 먼 옛날 그들이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남겨졌고 살아있는 유무형의 유산이 차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고, 때문에 그 찬란한 인류의 여명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는 8월 29일까지 열리는 <그리스의 신과 인간> 특별전에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르네상스와 중세, 근대 미술을 하나로 묶어서 정의하는 것처럼 무모한 시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 시기별로 양식적인 구분이 완벽하게 이뤄지지도 않는다.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은 고졸기(아케익), 고전기(클래식), 헬레니즘기로 나뉘는데(이는 후에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한번 변주된다) 정확한 시기와 구분 기준에 대해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 또한 헬레니즘기에도 불쑥 아케익 양식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완벽한 경계선이 없다는 것 또한 감안해야 한다. 감상자로서 가장 현명한 태도는 대략적인 흐름을 이해하되, 아는 것에 느끼는 것을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열린 시야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 소개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인 「대리석 여성상」은 기원전 2600년에서 240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전시된 136점 중에 가장 ‘모던’하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아케익기의 쿠로스는 양식화된 경직된 자세와 정면성,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아케익 스마일’로 유명하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도시 국가 그리스의 귀족들이 젊은 나이에 전사한 아들들을 기리기 위해 주문 제작하여 무덤에 세워놓았다는 이 쿠로스들은 먼 피안의 세계를 응시하는 듯 깊이 침잠된 시선과 신비로운 미소를 띤 것으로 유명하다.
공동체가 기억할 만한 뛰어난 인간을 쿠로스로 만드는 이 전통은 기술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고전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개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천재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이다. 인체의 황금비율을 수치화 한 내용을 『카논』이라는 저술로 남긴 그의 공로는 이후 로마 시대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 중 올림픽 우승자가 월계관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인 모습을 묘사한 「아름다움과 우수함」은 전형적인 폴리클레이토스 스타일의 대리석 입상이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몸과 다소 차가워 보이는 침착한 얼굴, 한쪽 다리를 뒤로 빼면서 인체의 사실성을 살린 이런 기법은 모든 인물상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던 아케익기와 비교하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고전기의 뒤를 이은 헬레니즘 양식을 대표하는 전시품으로는 광기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의인화된 포도나무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청년 디오니소스」가 있다. 마치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대비처럼, 이 대리석상은 전대에 비해 풍만하고 요염한, 여성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것들은 대부분 고전기와 헬레니즘기의 작품을 모방한 로마 시대 복제품들인데, 시대적 특성보다는 작품의 테마 별로 나뉘어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원반 던지는 사람」은 널찍한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데, 애초에 사방에서 볼 수 있는 환조 작품이지만 원작자는 한 방향에서만 보이기를 원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이 역동적인 대리석상의 전후좌우를 모두 둘러볼 수 있게 전시되었다.
1부 ‘신, 영웅 그리고 아웃사이더’ 섹션에는 그리스 신화 속 신과 영웅들, 그리고 그들에게 대적했던 괴물이나 반인반수들이 테마인 작품들이 모여 있다. 2부 ‘인간의 모습’에는 그리스 조각의 대명사인 이상화된 신체뿐만 아니라 당대인들에 대한 사실적이고 캐릭터가 분명한 인물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가면을 쓴 배우가 걸터앉아 있는 「대리석 희극배우 상」이나 비극과 희극 가면이 맞닿아 있는 부조 「극적인 가면들」은 극예술에 애정과 관심이 있는 관람객들에게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일 것이다. 3부 ‘올림피아와 운동경기’에는 고대 올림픽 경기의 특징과 룰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도기화들과 빼어난 스포츠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전신상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이상화된 운동선수」의 초상은 21세기의 ‘이상화된 영화배우’의 초상으로 이름을 바꿔 달아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듯 아름다웠다. 4부 ‘그리스인들의 삶’에는 당대를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상식을 엿볼 수 있다. 세부 파트로 나누어진 ‘성과 욕망’에는 그리스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인 소년애를 다룬 작품들이 있는데, 사실 이 테마는 네 개의 굵직한 전시 주제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아름다운 소년에게 구애하기 위해 토끼나 사슴 같은 사냥감들을 갖다 바치는 것이 일반상식이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묘사한 작품 앞에 선 점잖은 장년층 단체 관람객이나 어린이를 대동한 학부모를 보는 것은 다소 심란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무장에서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마치 신과 같이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신들은 아름다운 청년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으며, 인간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은 신적인 지고의 가치라는 그리스인들의 자긍심 넘치는 믿음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신과 인간> 특별전은 이 획기적인 신앙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2호 2010년 7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