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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발트에서 발칸까지] 끝과 시작 [No.98]

글 |김일송 2011-11-08 3,738

크라쿠프. 가장 먼저 가난한 여행자를 맞은 건 눅진한 바람이었다. 끈적이는 바람 속에는 오래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크라쿠프는 바르샤바로 이전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폴란드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 천년 고도의 수세기를 견뎌낸 낡은 건물들을 통과한 바람에는 고서(古書)만이 풍길 수 있는 향이 묻어있었다. 역사 출입구마다 줄지어 늘어선 헌책방의 진열대에는 『플레이보이』 같은 도색잡지와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의 사회과학 서적이 책등을 마주하고 진열되어 있었다. 크라쿠프의 바람에는 이 모든 향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크라쿠프를 떠올릴 때, 어쩔 수 없이 책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크라쿠프에서는 매일 서점을 찾았다. 크라쿠프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여행 내내 나는 서점 순례를 즐겼다. 주린 배를 채우러 레스토랑을 찾듯, 주린 머리를 채우러 서점을 찾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언어를 모두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 쓰였는지, 그 의미도 모르니 마음의 양식을 섭취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나는 눈의 호사가 아닌 코의 호사를 위해 서점을 방문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저마다 다른 향을 풍겼다. 책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배는 불러왔다.
서점을 찾는 데에 대한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대자면, 장서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서점 순례는 독서욕보다도 장서욕에서 비롯되었다. 일종의 허세라 할까. 하긴 독서욕이라는 것도 지적 허영에서 발로된 것이니. 독서욕이든 장서욕이든, 허세든 허영이든, 읽어내지도 못할 외국어 서적을 탐독하려 서점에 갔던 것은 그 비슷한 마음에서였다.

아무튼 다른 도시에서도 자주 서점에 출입하곤 했으나, 크라쿠프에서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크라쿠프에 머물던 때, 나는 매일, 하루 서너 차례 서점을 찾았다. 서점이 보이면 조건반사적으로 서점을 향했다. 골목마다 서점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많은 시간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의 시집 속에 파묻혀 보냈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아마도 낯선 외국어일 것이다. 만일 그의 시를 읽었고 그 이름까지 또박또박 발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상에서 소멸해가는 낭만주의자라고 부르겠다. 책 꽤나 읽는다는 주변 사람들도 심보르스카라면 갸웃했다.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한국에서 그는 무명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으로 대단히 인정받는 시인이다. 여성에게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스웨덴 한림원에서 1996년 수여한 노벨문학상은 아주 작은 증거에 불과하다.
나 역시 심보르스카에 대해 오랜 세월 무지했다.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추앙하는 후배가 없었다면 여전히 무지를 자랑했을 것. 후배를 통해 알게 된 시 몇 편이, 극장이나 공연을 소재로 한 시를 다수 썼다는 사실이 시인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특별히 더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마음이 동해서였을까. 크라쿠프에 도착하여 낡은 책 향기를 맡는 순간, 그를 읽어내고 싶어졌다. 시인에게 경도된 나는 서점에 들를 때마다 심보르스카의 시선집을 찾았다. 여러 권도 아니었다. 나는 늘 똑같은 시집을 찾았다. 그것은 시인의 시를 시기별로 모아놓은 시집이었다. 양장본으로 된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은 영문 병기였다. 왼편에는 폴란드어로, 오른편에는 영어로 병기되어있어, 까막눈인 나도 시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렴하지 않은 가격 탓에 시집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살까 말까 고민했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고민이란 심보르스카의 시집을 살 것이냐, 비엘리츠카(Wieliczka) 소금 광산을 볼 것이냐, 그것이었다. 소금 광산은 지각변동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혀지기 전, 그곳이 대양 한가운데였음을 입증하는 증거. 오랜 세월 소금을 털어서, 이제는 관광객 지갑을 털어서 폴란드에 짭짤한 재미를 안겨주고 있는 폴란드의 대표 관광지이기도 하다. 새들이 비행하는 그 하늘이 오래 전 바다거북이 유영하던 바다였다니. 게다가 소금 광산은 자연이 200만 년의 세월 동안 준비하고, 인간이 700년의 시간 동안 조각한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여타의 예술작품을 차치하고서도, 인간이 파낸 깊이 327미터, 길이 3킬로미터의 갱도는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소금 광산 입장료와 시집 가격은 둘 다 가난한 여행자의 하루 생활비를 우습게 웃돌았다. 시집도 사고 소금 광산도 구경하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도, 물론 가능했다. 그조차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넉넉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보다 비루했던 것은 심정이었다. 몇 푼을 선뜻 꺼내지 못해 만지작거리는 그 심정. 비루한 심정으로 시집과 소금 광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정은 어려웠다. 소금 광산이야 한 번 보면 그만이었지만 시집은 두고두고 볼 수 있었다. 말을 뒤집어, 시집이야 언제든 볼 수 있었지만 소금 광산은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집, ‘지금 여기서’밖에 볼 수 없는 소금 광산,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단념해야 했다. 선택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 게 좋았을까. 무엇을 포기하는 게 나았을까. 알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나는 크라쿠프를 떠올릴 때, 어쩔 수 없이 그 책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추신. 여행은 끝났고, 생활이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을 제목으로 붙여보았다. 이 시집에 「극장 문을 나서며」라는 시가 있다. 마지막은 시로 대신한다.


‘새하얀 화폭 위로 깜박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들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노래한다// 나. 그대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곳으로’ 

 

글쓴이 김일송은 씬 플레이빌의 편집장, 일상을 툴툴 털고 발자국이 적은 곳을 골라 디디는 아웃사이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8호 2011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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