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밖에서 만난 홍광호의 얼굴에는 지킬도 팬텀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배비장의 모습도 깨끗이 지워진 듯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곳에는 있는 그대로의 홍광호가 서 있었다.
더함도 줄임도 없는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홍광호는 스스로를 이야기할 때 그 어떤 치장도 보태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질문을 깊이 고민한 뒤 담담한 어조로 꾸밈없는 답변을 풀어냈다.
이상하게 그에겐 상대를 귀 기울이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의 생각들은 마치 소리 없이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 같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속에 오래 스며들었다.
스타일리스트 | 이한욱 헤어·메이크업 | 이창은
가장 나다운 무대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뮤지컬 배우가 올림픽홀 규모로 단독 콘서트를 연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이제 이루어진 꿈이 되었다. 2010년, 홍광호는 윤종신, 신승훈, 박정현 등과 함께 <10월의 눈 내리는 마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콘서트의 매력을 처음 느끼게 됐다. “관객들이 저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작품의 한 역할로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것과 제 자신으로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은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당시 그는 대형 단독 콘서트가 가능한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꿈이 있었어요. 콘서트에 대한 꿈.”
꿈이 현실이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홍광호는 올림픽홀에서 펼쳐질 첫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 있다. <10월의 눈 내리는 마을>을 연출했던 김서룡 감독이 2여 년 전부터 그에게 콘서트를 제안해왔고, <살짜기 옵서예>가 끝나고 차기작을 고르고 있던 지금의 시점이 적기가 된 것이다. “연출님과 무대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항상 있었던 공연은 식상하니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죠. 그래서 올림픽홀로 장소를 정하게 된 거에요.”
물론 올림픽홀 무대에 오르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공연장이 너무 큰 것 아니냐는 우려를 많이 했죠. 저도 고민되더라고요. 객석이 텅텅 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도전해보기로 했죠.” 하지만 티켓 오픈을 시작한 순간, 그 우려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공연 예매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매진 임박을 알린 것이다. 그는 뉴욕 여행 도중 소속사 대표님의 전화로 이 소식을 처음 듣게 됐다. “깜짝 놀랐죠. 기분이 이상했어요. 워낙 놀래도 티를 잘 안 내는 성격이라 ‘아, 그래요?’라고 덤덤히 말했지만, 속으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죠. 정말 감사했어요.”
뮤지컬 배우가 이런 대형 무대에서 단독 콘서트를 한 전례가 없었던 만큼, 그는 다양한 시도를 위한 구상에 한창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저만의 형식으로 만들고 싶어요. 뮤지컬 갈라 콘서트는 많잖아요. 그와 달리 이번 무대는 홍광호만의 고유한 콘서트가 됐으면 해요.” 그 까닭에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음악들도 다양하게 선보이려 한다. “제가 출연했던 작품들의 넘버뿐 아니라 대중적인 히트곡 등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하려고 해요.” 그의 매력적인 음성이 기존의 음악들을 만나 어떤 색채를 빚어내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이다.
“뮤지컬에서는 저와 제가 생각하는 캐릭터의 모습이 겹쳐진 면을 보는 거잖아요. 홍광호와 팬텀, 홍광호와 배비장의 교집합을요. 하지만 콘서트 무대에서는 홍광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만큼 이번 무대는 홍광호의 진솔한 매력을 한층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관객들이 생각하는 홍광호의 이미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그분들을 최대한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사실 뮤지컬은 관객들의 만족을 위해 공연하는 것도 있지만, 그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요. 하지만 이번 콘서트에서는 정말 오로지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데만 열정을 쏟고 싶어요.” 그의 바람에서 관객을 위한 애정이 한껏 묻어난다. 그와 관객 모두가 잊지 못할 무대를 마음속에 함께 새길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이젠 편안함으로
2002년 <명성황후>로 데뷔한 홍광호는 어느덧 10년 차가 넘는 배우가 되었다. 그 사이 그의 성장은 실로 대단했다. 한 편의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의 보폭은 유독 눈에 띄게 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배우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를 향한 질문들은 이내 꾸밈없는 담백한 답변으로 되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특유의 겸허함이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그를 이끌어준 힘이라 생각된다.
홍광호는 화려함에 현혹되어 스타 대열에 합류하기보다는 관객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앙상블로 시작했는데, 지금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하게 됐잖아요. 이런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어요. 과분한 일이죠. 솔직히 더 성공하고 싶고,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지금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 저는 그거 하나면 돼요. 제 공연을 보러 와 주시는 분들 앞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할 뿐이죠.” 그는 늘 무대에 설 때 어떻게 하면 관객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최근작 <살짜기 옵서예>는 그가 관객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지킬 앤 하이드>의 카리스마를 벗어던지고, 해학적인 인물로 변모해 객석에 웃음을 던져주었다 “일단 정말 재밌었어요. 무대에 서는 내내 행복했죠, 배비장 역은 지금까지 맡았던 무거운 역할들과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더 즐겁게 공연할 수 있었죠.”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즐거운 작업들에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작품의 배역과 배우의 삶이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도 그동안 배역의 성향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지킬 앤 하이드>를 할 땐 엄청 예민해지고, <맨 오브 라만차>를 할 땐 돈키호테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거죠.” 완벽주의적인 성향 탓에 그는 자기 세계에 대한 성벽을 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벽을 허물어뜨리려 한다. “우연히 선영 누나가 읽고 있던 책을 보게 됐어요. 제목이 ‘완벽주의에 작별을 고하다’였죠. 제가 완벽주의인지 몰랐는데, 그 책을 보니 심각한 상태더라고요. 생각에 많은 변화가 왔죠. 지금은 그것들을 깨부수려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 그는 무거움을 털어내고 좀 더 자신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 바탕에는 관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뿌리 박혀있다. “제가 즐거워야 관객들도 더 편하고 재밌게 무대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론 어두운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마음만큼은 즐겁게 임하려고 해요.” 예전에는 목표를 향해 욕심 부리며 달려갔다면, 이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려는 것이다.
진심이 이끄는 매력
배우에겐 무대에 오르는 시간만큼이나 막이 내리는 순간도 특별하다. 배역의 이야기가 끝나는 동시에 그의 일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홍광호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컨디션 관리를 해요. 저는 같은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지만, 객석에는 매일 새로운 관객들이 오시잖아요. 그분들에겐 그 무대가 뮤지컬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 될 수도 있으니,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거든요.”
배우의 일상에는 역시나 작품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하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공연 중엔 이런 생각들에 꽂혀 있어요. 좋은 거 잘 먹고, 잘 쉬면서 하루에 꼭 한두 시간은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죠.” 이렇듯 오랫동안 뮤지컬에 꽂혀 지내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도 삶과 무대에서의 여유를 위해 점차 주위를 둘러보며 즐거운 일을 찾는 중이다. “최근에 이사를 해서 그런지 집 꾸미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화초 키우는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물만 잘 줘도 꽃을 피우는 걸 보고 있으니 신기하고 행복하더라고요. 또 이번 콘서트 때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어서 피아노도 새로 샀어요. 집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죠.” 그가 느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앞으로 그가 서는 무대들에 고스란히 녹아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한편 홍광호는 뮤지컬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이야기를 할 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그의 눈이 빛났다. 그는 뮤지컬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연예인이 되지 않더라도 뮤지컬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 역시 수없이 오디션에 떨어지며, 뮤지컬은 연예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좌절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배들이 좀 더 현명하게 무대를 개척할 수 있도록 세심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제가 <명성황후>의 앙상블을 했잖아요. 앙상블이든 스태프든 모두 뮤지컬의 한 부분이에요. 그 팀에 소속되면서 전반적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를요. 어떤 식으로든 무대 경험을 해보는 게 도움이 많이 돼요.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미리 계획을 세워볼 수 있거든요.”
그는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노하우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오디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참가했으면 해요.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니 도전해봐야 돼요.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나를 오디션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오디션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가면 마음이 더 편해져요. 그리고 등장하는 순간부터 퇴장할 때까지 그 배역의 눈빛과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하죠.” 자신과 같은 길을 꿈꾸는 이들을 향해 자신의 열정을 듬뿍 나누어 주는 모습이 참 듬직해 보인다.
인터뷰 내내 진솔함을 잃지 않았던 홍광호. 그래서 더욱 마음을 열고, 그를 향해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상대를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새삼 그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짧은 만남 뒤 그가 남긴 오랜 여운만큼이나 그의 무대가 앞으로도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길 바라며, 지금 있는 그대로의 홍광호를 응원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7호 2013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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